새샘(淸泉)
혈액순환 이론과 수혈 본문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 Università degli studi di Padova(UNIPD)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온 윌리엄 하비 William Harvey(1578~1657)는 한 개인병원에서 혈액순환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살아 있는 심장을 볼 수 있는 동물 즉 껍질이 투명한 새우와 껍질을 조심스레 벗긴 달걀을 이용해 장기간 연구 관찰한 결과 심장에서 나와 몸으로 골고루 보내진 혈액은 소멸되지 않고 다시 재순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혈액이 재순환되지 않는다고 가정했을 때 하루에 필요한 혈액량은 얼마나 되는지 하비는 계산해 보았다.
심장이 한 번 수축할 때 나오는 피의 양과 하루 동안 심장이 수축하는 횟수를 곱하면 하루에 만들어지는 혈액량을 구할 수 있다.
하비는 살아 있는 양을 대상으로 실험해 보았다.
양의 대동맥을 잘라 분출되는 피의 양을 분 단위로 모았다.
비례식을 이용해 그 결과를 사람의 경우로 추산했을 때 인간의 심장이 하루에 만들어야 하는 피의 양은 무려 1,800리터였는데, 사람이 하루에 섭취하는 음식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양이었다.
이렇게 수학적 계산을 통해 기존 혈액 이론의 문제점을 확인한 하비는 자신의 혈액순환을 증명하는 간단한 실험을 창안했다.
바로 유명한 '묶음실(결찰실, 결찰사結紮絲) ligature 실험'이다.
하비는 주먹을 쥔 사람의 팔 윗부분을 묶음실로 묶었다.
그러면 묶은 부위의 아랫부분이 부푼다.
갈레노스 Galenus의 주장대로 정맥이 심장에서 팔쪽으로만 흐른다면 묶은 부위의 윗부분이 부풀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는 동맥까지 압박할 수 있도록 묶음실을 더욱 강하게 묶었다.
그러자 묶음실의 윗부분이 부풀면서 묶음실 아랫부분이 피가 통하지 않아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하비의 묶음실 실험의 결론은 심장에서 동맥을 통해 흘러나온 혈액이 몸의 말단부위를 돌고 난 뒤 정맥을 따라 몸의 중심부로 다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팔을 실로 묶는 것은 고대부터 의사들이 피를 뽑기 전에 해오던 방식이었다.
그런데 묶은 부위의 위쪽이 아닌 아래쪽이 부푸는 현상을 그동안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은 그때까지의 의학, 과학을 통틀어 가장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것이었다.
그가 혈액순환 이론을 주장하면서 제시했던 근거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해부학적 관찰을 통해 기존에 알려진 두 가지 사실―심장 사이의 구멍이 없다는 점과 혈액을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해주는 판막의 존재―이 혈액순환을 뒷받침한다는 점, 둘째는 심장에 필요한 하루 혈액의 양을 수학적 계산을 통해 알아내고 기존 이론으로는 그 많은 양의 혈액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마지막으로 묶음실 실험을 통해 혈액의 흐름을 간단하게 재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비의 이 위대한 결론은 1628년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혈액이 온몸을 순환하며 그 중심에 심장이 있다는 그의 이론은, 갈레노스의 고대 해부학이 베살리우스 Vesalius의 근대 해부학에 의해 무너졌듯이 갈레노스의 고대 생리학도 하비에 의해 무너지고 있음을 뜻했다.
하비가 이렇게 위대한 발견을 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갈레노스가 주장했던 자연 정기精氣, 생명 정기, 동물 정기 같은 복잡한 요소들을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고 오로지 심장이 보여주는 단순한 기계적인 혈액의 흐름에만 집중했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인체의 모든 부분은 만들어진 목적이 있으며, 그것을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창조주의 목적과 의도를 이해하려는 것이 의학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하비는 심장의 존재 이유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동물의 심장을 연구하면서 심장은 단지 혈액 펌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런 생각이 그를 혈액순환 이론의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에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 혈액이 순환한다면 심장에서 출발한 동맥이 몸의 말단부위까지 구석구석 피를 공급한 뒤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되돌아와야 하는데, 하비는 동맥과 정맥이 만나는 부위를 보여주지 못했다.
동맥과 정맥은 육안으로 관찰이 불가능한 아주 가느다란 혈관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비가 죽은 뒤 이탈리아 의사인 마르첼로 말피기 Marcello Malpighi(1628~1694)가 개구리의 허파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중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가는 혈관, 즉 '모세혈관'을 발견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둘째, 하비는 혈액이 우리 몸을 그렇게 빨리 순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혈액순환과 호흡의 관계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조지프 블랙 Joseph Black이 고정 공기라는 이름으로 이산화탄소를 발견한 것이 1756년, 프랑스의 라부아지에 Lavoisier가 산소를 발견한 것이 1775년이니 동맥과 정맥 안을 흐르는 혈액의 차이를 알아내는데 100년이 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이 후대 연구자들에 의해 보강되면서 의학자들은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이 내포하고 있는 놀라운 가능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정맥의 어느 부위에 주사를 놓아도 혈액이 순환하면서 원하는 곳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수혈의 가능성이었다.
혈액이 말단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에 혈관을 통해 적당량의 타인의 혈액을 주사하면 혈액이 우리 몸을 순환하면서 온몸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각종 비상 상황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혈액순환 이론의 완성
동맥과 정맥의 연결 부위를 찾아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을 완성한 의학자는 마르첼로 말피기였다.
그는 하비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1661년 개구리의 허파혈관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던 중 아주 가느다란 혈관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심장을 떠난 동맥 혈관들로, 여러 갈래로 가늘어지다 인체 조직의 끝부분에 이르러 정맥과 연결되었다.
이렇게 말피기는 '모세혈관'의 존재를 발견했다.
당시 말피기의 현미경 연구는 동료 의학자들에게 의외로 관심을 못받았다.
많은 의학자들이 동물의 작은 내장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환자를 치료하는데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현미경을 이용한 미생물 관찰은 의학이 아니라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의 취미 연구 정도로 취급받았다.
의학에서 현미경을 진지하기 받아들이기까지는 이후로도 15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과 말피기의 모세혈관 발견으로 의학이 순식간에 도약했다고 생각하지만 기존 의학자들을 지배하던 통념을 극복하는 데는 몇 세대를 아우르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수혈의 역사
피를 뽑는 게 아니라 피를 보충해 주는 것이 수혈輸血 transfusion이다.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진 경우 젊은이의 피를 공급받으면 젊어질 수 있고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다.
중세 유럽의 일부 교황들은 말년에 어린아이의 피를 뽑아 몸에 주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혈액이 우리 몸을 한 바퀴 돈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다시 순환한다는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이 인정을 받으면서 수혈에 대한 연구가 더욱 관심받기 시작했다.
하비와 같은 대학의 실험 클럽이었던 크리스토퍼 렌 Christopher Wren(1632~1723)은 정맥 주사가 가능하도록 공기주머니가 달린 뼈대 모양의 관을 만들어 개의 정맥의 꽂고 여러 가지 약물을 투입하는 실험을 했다.
1656년 렌은 개의 정맥에 술을 주사해 개가 술에 취하는지 확인해보았다.
당연히 개는 취했다.
이 실험으로 렌은 사람의 혈관에 약물을 주사하여 약효를 전달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렌의 실험에 이어 1665년에는 영국 내과의사 리처드 로어 Richard Lower(1631~1691)가 다양한 약물을 동물에게 주입하다 '혈액'을 주입해보기로 했다.
한마디로 수혈 실험을 한 것이다.
그는 실험용 개의 힘이 거의 빠질 때까지 피를 뽑은 다음 다른 개에게서 뽑을 혈액을 주입했다.
수혈을 받은 개는 다시 힘을 찾은 듯 보였다.
수혈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동물끼리 수혈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로어는 사람에게 동물의 혈액을 수혈하기도 했다.
과학자의 탐구정신은 실로 끝이 없다!
영국 과학자들의 수혈 성공 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 과학자 장 밥티스트 드니 Jean Baptiste Denys(1635?~1704)도 수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드니는 개 세 마리를 이용해 서로 혈액을 주고받게 했다.
개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드니는 동물의 혈액을 사람에게 수혈해 보고 싶었다.
그의 가설을 꽤나 참신했다.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면 그 동물이 가진 좋은 성격이 사람에게 전달될 것이다."
즉 포악한 사람에게 양의 피를 수혈하면 양처럼 온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드니는 1667년 한 소년에게 양의 피를 성공적으로 수혈해 유명해졌지만, 그 성공은 독이 되었다.
1668년 어느날, 한 여성이 드니를 찾아와 남편에게 수혈 치료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남편은 매독 말기 환자였다.
그는 매독의 합병증으로 나타난 정신착란으로 매우 폭력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에게 온순한 송아지 피를 수혈해 달라고 했다.
드니는 이때 여인의 의도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혈 효과를 확인하고 싶은 지적 욕구에 드니는 굴복하고 말았다.
드니는 그녀의 남편에게 1차로 송아지 피 280밀리리터를 수혈했다.
다행히 1차 수혈 후 큰 부작용이 없었고 상태가 약간 호전된 것처럼 보여 2차 수혈도 진행했다.
그런데 수혈 거부반응으로 의심되는 증상(발열, 식은땀, 혈뇨)이 나타났다.
환자와 드니는 가까스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드니는 이때 멈췄어야 했다.
몇 주 뒤 남편의 폭력 증상이 다시 악화하자 그녀는 다시 드니를 찾아와 수혈을 요구했다.
자꾸 수혈을 요구하는 여성의 의심스러웠지만 드니는 3차 수혈을 진행했고, 환자는 그날 밤 집에서 사망했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드니를 살인죄로 고소했다.
반면 드니는 수혈 과정에 문제가 없었으며, 그녀가 독을 먹여 남편을 살해하고서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고 주장했다.
몇 개 월 동안 이어진 소송에서 드니가 무죄 선고를 받긴 했지만 수혈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변해 있었다.
환자도 의사도 수혈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수혈을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져 수혈에 대한 시도나 연구가 150년 동안 중단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금지되었던 수혈을 다시 시작한 곳은 영국이었다.
영국 의사 제임스 블런델 James Blundell(1790~1878)은 1818년 위암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꽤 많은 양인 400밀리리터의 사람 혈액을 수혈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블런델은 아이를 낳고 급성출혈로 죽어가는 산모에게 수혈을 다시 시도했다.
인간 대 인간의 수혈이 시작된 것이다.
블런델은 11년 동안 10회의 수혈을 시도해 5명을 살렸고, 1829년 수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수혈이 널리 전파되지 않았다.
성공률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혈 뒤 갑자기 사망하는 원인을 여전히 알기 못했기 때문에 생명이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아무도 수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 뒤 1900년 32세의 오스트리아 연구자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된다.
○혈액에도 종류가 있다
1900년 어느 날, 오스트리아 병리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 Karl Landsteiner(1868~1943)는 환자들의 혈액을 섞다가 궁금증이 생겼다.
잘 섞이는 혈액과 섞이지 않고 뭉치는 혈액이 있었기 때문이다.
혈액이 뭉치는 현상을 '응집 agglutination'이라 한다.
란트슈타이너는 자신을 포함한 실험실 연구원들의 혈액을 뽑아 유리관에 담고 액체 성분과 고체 성분으로 나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 혈액의 고체 부분과 액체 부분을 교차해 섞었다.
란트슈타이너는 아직 몰랐지만, 혈액의 액체 성분인 혈청 serum에 있는 '응집소 agglutinin'와 고체 성분인 적혈구에 있는 '응집원 agglutinogen'이 동일한 형 type인 경우 항원-항체 반응 antgen-antibody reaction에 의해 응집이 생긴다.
같은 사람의 적혈구와 혈청은 서로 잘 섞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적혈구와 혈청을 섞었을 때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잘 섞이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뭉치는 응집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반복한 란트슈타이너는 혈액에 세 가지 형태 즉 혈액형 blood type이 있음을 알아냈다.
바로 A, B, C형이 이었다.
당시 란트슈타이너의 실험대상군에는 다행히 AB형이 없었다.
만약 있었더라면 그의 계산은 좀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하여튼 1901년 이렇게 혈액형의 존재가 알려졌다.
C형 혈액은 나중에 O형으로 바뀌었다.
O형은 없음을 뜻하는 독일어 '오네 Ohne'에서 유래했는데, O형 혈액의 적혈구에는 응집을 일으키는 응집원이 없었다.
혈액형의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란트슈타이너였지만 혈액 응집이 생기는 원인까지는 알아내지 못해 당시 의학계에 큰 충격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연구는 잊혀갔다.
그런데 1930년,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의 연구소로 옮긴 란트슈타이너에게 갑작스럽게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30년 전 그가 했던 혈액형 연구로 노벨생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란트슈타이너의 영광에는 미국 내과의사 루벤 오텐버그 Reuben Ottenberg(1882~1959)의 역할이 컸다.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연구를 알고 있었던 그는 혈액을 제공하는 '주는이(공혈자) donor'와 혈액을 받는 '받는이(수혈자) recipient'의 피를 미리 섞어보고 응집이 생기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를 교차적합검사 crossmatch/cross-matching 또는 혈액적합성검사 hemocompatibility라고 한다.
이 방법을 도입한 이후 그의 병원에서 수혈 사고는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텐버그의 보고 이후 점차적으로 의료기관에서 수혈 전 교차적합검사가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잡아 갔고, 덕분에 란트슈타이너는 노벨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란트슈타이너는 1937년 또 하나의 혈액형인 RH 혈액형도 발견했다.
이런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생일인 6월 14일은 '세계 헌혈자의 날'이 되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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