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지난 세월의 향기 본문

글과 그림

지난 세월의 향기

새샘 2024. 9. 22. 11:36

"향기는 말, 외모, 감정이나 의지의 힘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Patrick Süskind,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중에서-

 

 

인류 최초의 무덤으로 이스라엘 Israel의 샤니다르 동굴 Shanidar Cave에서 발견된 6만 년 전의 사람뼈를 꼽는다.

이것을 무덤으로 간주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시신 주변에서 발견된 다양한 꽃가루 성분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당시 살아있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간 가족을 추모하여 다양한 향기를 풍기는 꽃다발을 놓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향기는 인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몇천 년 동안 땅속에 있는 유물에서 향긋한 냄새를 기대하는 건 대부분의 경우 무리다.

그럼에도 가끔은 예상치도 못한 몇백 년 세월의 무게를 견딘 향기와 만나기도 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일 때 필자는 러시아 Russia 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의 고고민족학박물관(일명 쿤스트카메라 Kunstkamera)에서 조용히 한국의 유물을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그곳에는 러시아가 구한말에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주고받은 선물과 북간도北間島(또는 동간도間島 :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쓰던 유물 2,000여 점이 있었다.

 

보름 남짓한 출장 기간에 수많은 유물을 정리해야 하는 정신없던 상황에서 고고민족학박물관의 관계자가 꼭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무엇인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큰 종이를 풀어 보니 모두 45개의 약재 첩이 나왔다.

또박또박 한문으로 이름이 써 있었고 그 안에는 각각의 한약 재료가 포장이 되어 있었다.

이 한약은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시기에 웨베르(또는 베베르) Waeber(또는 Weber) 공사에게 전달된 것이다.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가 임무를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길에 혹여나 병이 날까 걱정하였고, 응급 한약들을 한 포 한 포 정성스럽게 싸서 웨베르 공사의 주치의인 야쭈트에게 상세한 복용법과 각 한약의 이름을 적어서 준 것이다.

 

각 약봉지에는 한문과 그것을 번역한 이름과 효능이 러시아어로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그 약봉지들이 풀리지 않은 채 100여 년 전 그때 그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중에 한문으로 감초'甘草'라고 쓰인 작은 봉지를 열었다.

봉지 안에는 지난 세월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게 노란 감초가 남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감초 특유의 달큼한 향이 풍겨오는 것이 아닌가.

한약에서 가장 흔하게 쓰는 약초인 감초 냄새였다.

한 입 깨물어 맛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나를 매혹하는 향기였다.

그 순간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유물창고의 분위기가 한번 변하는 느낌이었다.

 

 

○고수풀과 고향의 추억

 

향신료 가운데서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중 하나가 바로 고수풀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에 조사를 갈 때 식당에서 인사말 다음으로 많이 하는 중국어가 "비에팡샹차이(향채 좀 빼주세요)"일 정도다.

하지만 이 고수풀은 중국과 초원 일대에서 유목민들이 널리 사용한다.

 

초원의 사람들은 강한 향기를 풍기는 약초를 썼다.

그들에게 향기라는 것은 바로 각 풀의 약효를 의미했다.

심지어 고고학 유적에서도 이 고수풀은 널리 발견된다.

강한 향기뿐만 아니라 세균의 증식을 막는 등의 약리 효과를 과거의 사람들도 알았던 듯하다.

 

시베리아 Siberia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가장 힘든 것은 바로 모기라는 걸 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웬 모기인가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겨우내 얼어붙은 숲은 봄이 되어 한번에 녹으면서 모기가 살기에 적합한 소택지가 된다.

그러니 숲에 들어가면 모기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필자가 처음 시베리아의 발굴장을 갔을 때에도 제일 힘들었던 건 음식도, 고된 일도 아닌, 바로 모기였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모기는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참기 힘들었다.

모기퇴치약을 몸에 뿌리는 것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필자에게 러시아 동료들은 모기약은 몸에도 안 좋고 실제로도 도움이 안 된다며 대신에 자기들처럼 고수풀을 많이 먹어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필자에겐 너무 역한 맛이어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래도 기분 탓인지 나에게 달려드는 모기가 좀 적어진 것 같았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여러 음식에 고수풀을 넣어 먹고 다양한 잡초를 태우는, 다소 원시적으로 보이는 방법으로 모기를 쫓는 걸 선호했다.

 

 

파지릭 고분 내 매장 유물 복원도(출처-출처자료1)

 

고수풀은 2500년 전 알타이 고원 Altai Plateau에서 번성했던 유목민들의 문화인 파지릭 문화 Pazyryk Culture에서도 발견되었다.

흔히 알타이의 얼음공주라고 불리는 우코크 고원 Ukok Plateau의 아크-알라하 Ak-Alakha 고분에서는 여성 미라의 바로 옆엔 놓인 돌그릇에서 고수 씨앗이 발견되었다.

시신 옆에 향을 피우기 위해 고수 씨앗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고수풀의 원산지가 지중해라는 점이다.

고수풀의 영어 이름인 'coriander'와 비슷한 이름이 이미 3500년 전에 지중해에서 발달한 미케네 문명 Mycenaean Civilization의 선형문자 B(기록되어 전해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리스어인 미케네 그리스어를 기록했던 음절 문자.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 Arthur John Evans가 1900년 크노소스 Knossos에서 이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을 대량 발굴했다)에서 보인다.

(계속)

 

 

 

알타이 지역 카자흐스탄 베렐 고분의 복원된 말 무덤과 그 밑에 깔린 물싸리(출처-출처자료1)

 

 

초원의 풍경(출처-출처자료1)


(계속)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4. 9.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