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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 "홍매 10곡 병풍" "홍매 대련" "분란" "난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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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 "홍매 10곡 병풍" "홍매 대련" "분란" "난초"

새샘 2024. 9. 20. 14:14

<나는 매화를 그리다가 백발이 되었다오>

 

조희룡, 홍매 10곡 연결병풍, 19세기 중엽, 비단에 담채, 128x374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조희룡, 홍매 10곡 연결병풍 부분(사진 출처-출처자료1)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1789~1866) 추사 김정희의 예술적 이상을 가장 훌륭히 구현한 19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다.

추사와 거의 똑같은 글씨를 썼고, 산수와 사군자 모두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특히 매화에서는 우봉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는 명화를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봉은 미술사에서 그가 이룩한 예술적 업적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예술이 항시 추사 김정희의 그늘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추사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봉 조희룡의 예술을 낮추어 보는 말을 했다.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란 뜻으로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

조희룡 배輩(무리)가 나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식 한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문자기文字가 없는 까닭이다."

 

이 글은 추사가 아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한 말이었지만 결국 우봉의 예술을 평할 때면 항상 꼬리표로 따라붙는 직격탄이 되었다.

추사가 여기서 '배'라고 한 것은 중인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우봉은 중인 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조선 시대에,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벼슬을 지냈을 뿐 이렇다 할 이력이 따로 없다.

그는 진실로 추사를 존경하고 따르며 자신의 시서화를 세련했다.

그러나 추사의 제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이 차이도 세 살밖에 나지 않는다.

≪완당전집阮堂全集≫ 어디에도 제자라는 면이 보이지 않으며, 추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봉이 쓴 제문에도 스승이라는 말이 없다.

 

중인 사회에서 우봉은 시서화에 능한 대표적인 명사였다.

1844년(56세)에는 중인 열전인 ≪호산외사壺山外史≫(호산은 조희룡의 또 다른 호이고, 외사는 정사가 아니라는 뜻)를 찬술撰述(책이나 글을 지음)했으며, 1847년(59세)에는 유최진柳最鎭, 나기羅岐 등과 함께 중인 문학동인인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하였다.

우봉의 명성이 높아지자 헌종은 우봉에게 금강산을 탐승探勝(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님)하고 명승지마다 시를 지어오라고 명을 내렸고, '문향실聞香室'이란 현판을 써오라고도 했다.

 

우봉은 추사의 예술론을 열심히 전파하였다.

1849년(61세) 여름, 고람 전기, 북산 김수철, 혜산 유숙 등 젊은 서화가 열네 명이 추사에게 품평을 받는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자리를 마련한 것도 우봉이었다.

그러나 바로 직후 정변이 일어나 영의정 권돈인이 귀양 가게 되자 추사는 배후자로 몰려 북청으로 가고, 우봉의 추사의 복심腹心(심복心腹)이었다는 이유로 전라도 임자도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다.

우봉은 귀양살이 3년 동안 많은 시문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이때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등의 작품을 남겼고, 시문집 ≪해외난묵海外讕墨≫(섬의 곤궁한 환경에서 참고할 자료 없이 쓴 글)도 저술하였다.

 

1853년(65세)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우봉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중인 벗들과 어울리며 세월을 보냈다.

1863년(75세)엔 회고록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을 남기고 1866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봉의 예술 추사의 훈도薰陶(덕으로써 사람의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치고 길러 선으로 나아가게 함)에 따라 글씨에는 금석기金石氣(주조하고 새겨서 나온 글자처럼 꾸민 데 없이 수수하며 예스럽고 소박한 기운)를 담으려고 노력했고, 그림에서는 문기文氣(문장의 기세)를 추구했다.

우봉은 추사가 곧잘 거론하는 소동파, 정판교, 옹방강 등의 글귀를 화제로 옮기곤 했다.

 

난초를 그릴 때면 정판교의 글을 빌려 "내가 난초를 그리는 것은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라고 곧잘 썼다.

추사는 우봉의 이런 면이 오히려 못마땅했던 것 같다.

학문적 천착穿鑿(어떤 원인이나 내용 따위를 따지고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명구名句(뛰어난 글귀)의 표피만 외워서 사용하는 것 같아 깊이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봉의 매화 그림에 이르면 모든 사정이 달라진다.

우봉은 <홍매紅梅> 10곡曲 연결병풍, <홍매> 대련對聯,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등 매화 그림에서 많은 명작을 남겼다.

 

<홍매> 10곡 연결병풍은 우봉 매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작이다.

10곡 병풍을 하나의 화면으로 삼았는데, 폭이 장장 3.8미터에 이르러 서양화 약 500호의 크기와 맞먹는다.

그 넓은 화면에 붉은 꽃이 만발한 노매老梅 두 줄기를 장관으로 펼쳐 그렸다.

이런 대작은 웬만한 기량으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줄기와 가지의 표현에는 서예에 능숙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필력이 완연하고, 붉은 매화의 꽃송이들은 디테일이 섬세하여 갓 피어난 것처럼 홍채紅彩를 발한다.

병풍 마지막 틀에는 추사체를 아름답게 다듬은 듯한 그의 독특한 서체의 화제가 있어 그림에 문기를 더해준다.

 

낙관은 임자도 귀양살이 시절에 많이 사용한 '철적도인鐵笛道人'으로 되어 있다.

우봉은 자신의 잠자리에 매화 병풍을 쳤다고 하는데 혹 이런 병풍이 아니었을까 생각게 한다.

낱폭으로 이루어진 병풍은 이처럼 환상적인 매화경梅花境을 이루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조희룡, 홍매 대련, 19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각 폭 127.5x30.2cm, 삼성미술관 리움(사진 출처-출처자료1)

 

낱폭으로 그려진 매화 그림은 아주 많은데 그중 <홍매> 대련은 대담한 구도와 강렬한 필치로 보는 순간 놀라움까지 일어난다.

기굴奇崛하게(외모가 남다르고 허우대가 크게) 뻗어 오른 노매의 줄기, 분홍빛 꽃송이의 집합적 배치, 추사체의 파편이 튕기는 것 같은 점묘點描(물의 전체를 묘사하지 아니하고 그 작은 부분을 각각 떼어서 따로따로 묘사), 그리고 금석기가 완연한 화제가 어울리면서 하나의 추상 공간을 이룬다.

 

여기에서는 문자향 서권기가 문제가 아니라 근대성의 획득이라는 찬사가 나온다.

우봉은 대나무 그림에 제화題畫(그림에 그 내용과 어울리도록 적어 넣는 시나 글)를 쓸 때면 소동파의 말을 빌려 입버릇처럼 "나에겐 그림 그리는 법이 따로 없다", "아법我法이 죽법竹法이다(내가 그리는 법이 곧 대나무 그리는 법이다)"라고 호언하였다.

그래서 매화에서도 이처럼 파격적인 구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봉이 매화에서 이런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은 단순한 필법이 아니라 그의 매화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다.

말년에는 '매화도인梅畵道人, 매수梅叟(매화늙은이), 단로丹老(붉은노인)'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으며 타계하기 2년 전에 쓴 ≪석우망년록≫에서 자신의 매화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화에 벽癖(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굳어진 성질이나 버릇)이 있다. 나는 큰 매화 병풍을 눕는 자리에 둘렀다. 벼루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매화시가 새겨진 벼루)'을 사용하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煙[주변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서재에 보관하는 송연묵松煙墨(솔먹/숯먹: 소나무를 태울 때 생기는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쓴다. 매화 시 100수를 읊어 시가 이루어지면, 내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매화 시 100수를 읊는 누각)'라고 현판을 달아 매화를 좋아하는 나의 뜻을 보이고자 하는데 아직 이루지 못했다. 읊조리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다梅花片茶(매화 조각을 띄운 차)'를 마셔 목을 적신다. 지금 먼저 완성한 것은 칠언율시 50수다."

 

우봉은 매화를 그리다가 백발이 되고 말았다며 '오위매화吾爲梅花 도백두到白頭'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매화 시 100수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매화광이 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매화와 난초는 사람에게 정이 생겨나게 한다. 정이 생기는 것이 어보다 더한 것은 없다. ··········

 매화와 난초는 초목의 하나에 불과하지만 마주하고 있으면 마치 고상한 사람, 맑은 선비와 같아서 감히 명리名利(명예와 이익)의 일을 말하지 못한다. ··········

 평생토록 가슴을 털어놓을 사람은 한정되어 있어 쉽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지만, 매화와 교분을 맺은 뒤로는 그것이 허락된다. 도리어 매화가 허락해 주지 않을까 두려워 붓을 매개로 삼고 있다."

 

우봉은 이렇게 매화에 정을 붙이고 매화에게 흉금을 털어놓으며 살았다.

필자는 이것이 우봉이 환상적인 매화 그림을 그린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가슴속에 깊은 산골의 매화경梅花景을 만들고, 스스로 그 가운데 숨어 한 송이 꽃이라도 세상에 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술기운을 따라 열 손가락 사이로 나오게 되면 온갖 형상으로 나뉘어 나타나는데, 진짜 매화가 절로 거기에 있었다."

 

 

조희룡, 분란, 19세기 전반, 종이에 수묵, 22.5x27.3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조희룡, 난초, 19세기 전반, 종이에 수묵, 22.5x26.7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우봉은 난초에서도 이런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추사는 조희룡 무리들의 난초에 문기가 없다며 얕잡아 말했지만 우봉의 예술 세계에는 추사 무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매화경이 있었다.

어떤 면으로 따져도 추사 일파 문인화풍의 대표 작가는 우봉 조희룡이고 19세기 문인화가 역시 우봉 조희룡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9.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