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빛바랜 유물에 숨어 있는 화려함 본문
"색은 영혼을 직접 울리는 힘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발굴장의 색은 단조롭다.
모든 것이 흙빛이다.
풀이 우거져 있다 하더라도 땅 속에서 옛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표면을 벗겨내면 또다시 흙빛이다.
그러니 발굴장에서 마치 민둥산처럼 속살을 드러낸 갈색의 땅을 이리저리 긁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모습을 마주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심지어 현장에 오래 있다 보면 발굴 장비뿐만 아니라 사람 얼굴색도 모두 흙과 뒤섞여 어두운 흙빛으로 변한다(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고고학 발굴에서 시간의 무게를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각적인 아름다움, 색채이다.
사진이나 책은 가장 먼저 색부터 바랜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이라고 해도 땅속에 버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색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색이 잘 남아 있는 유물을 발견하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된다.
서부 시베리아 Siberia의 바라바 평원 Baraba steppe에서 800년 전 타타르인 Tatars(서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몽골 계통 원주민. 카잔 Kazan을 수도로 하는 타타르스탄공화국 Republic of Tatarstan이 그들을 대표하는 자치공화국이다)들의 무덤을 발굴할 때의 일이다.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나무는 자작나무이다.
눈발이 날리는 듯 새하얀 빛깔의 껍질이 인상적인데, 겨울은 물론이고 여름에도 시베리아를 온통 하얀빛으로 뒤덮는다.
우리는 자작나무 숲속에 텐트를 치고 호숫가 근처에 위치한 널무덤(움무덤/토광묘土壙墓: 구덩이를 파서 시신을 안치한 무덤)을 발굴했다.
무덤 구덩이를 한 삽씩 파 들어가기 시작해 가장 먼저 해골 부분을 발견했다.
그 주변을 조금씩 파내려가면서 가슴의 갈비뼈 부분에 남아 있는 흙을 제거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몸 주변의 흙에서 하얀 색의 자작나무 껍질이 섞여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흰색 쌀을 뿌려놓은 듯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 흙을 제거하니 흰색의 자작나무 껍질이 시신의 가슴과 배 부분에서 골고루 발견되기 시작했다.
바로 하얀 자작나무 껍질로 시신을 둘둘 말아서 무덤에 넣은 흔적이었다.
자작나무 껍질이 너무 얇아서 입김을 불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래도 몇백 년 동안 흙속에 있었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자작나무의 뽀얗고 하얀 빛이 발굴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였다.
살살 불기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 자작나무 껍질을 어떻게 발굴해야 할지 난감했다.
대기와 접촉하는 순간 자작나무 껍질의 빛이 바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빗발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자작나무 껍질의 상태가 좋은 몇 부분만 보존할 수 있었다.
필자가 그 몇백 년의 세월을 견딘 뽀얀 자작나무의 껍질을 제대로 본 건 고작 1~2시간에 불과했다.
지금도 시베리아를 다니면 여름에도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빛으로 뒤덮인 자작나무 숲은 지천至賤으로 널려 있다.
하지만 갈색의 단조로운 흙속에서 자태를 드러낸 백옥 같은 그 색감의 강렬함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발굴장과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만 보다 보면 과거의 찬란한 빛을 망각할 때가 많다.
실제로 청동기를 주조하고 나면 놋그릇처럼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지만, 시간이 지나면 청동기도 시퍼렇게 녹이 슨 고철덩어리처럼 보인다.
돌로 만든 유물도 과거의 형체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Kazakhstan의 <황금문화전>에서 7~8세기에 고구려와 각축을 벌였던 돌궐제국突厥帝國의 석인상이 전시된 적이 있었다.
현장강의를 하러 몇 차례 방문할 때마다 학생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을 연상시키는 이 돌궐의 석인상들이 대충 만든 것처럼 그 생김새가 거칠어 보였기 때문이다.
돌궐제국보다 1000년이나 빠른 2500년 전의 사카문화 Saka culture 사람(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3000~2000년 전에 살던 유목민족을 통칭함)들은 이미 수천 개의 황금을 이어 붙여 옷을 만들 정도로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및 중국과 문화적으로 자웅을 겨루었던 돌궐 사람들이 이토록 허술한 석상을 남겼다니,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 않나.
사실 석인상이 이렇게 허접해 보이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보는 석인상은 당시 돌궐인들이 보던 석인상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목민인 돌궐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뼈만 추려서 작은 구덩이에 파묻는다.
그리고 무덤 대신에 지름 3미터 정도의 사각형 제단을 만들고 그 앞에 죽은 사람의 영정처럼 석인상을 놓는다.
돌궐인들은 1년에 2번씩 이 무덤 앞에서 모여 제사를 지내고 기념했다.
조상의 무덤이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돌궐인들은 석인상에 옷을 입히고 얼굴에 채색을 해서 조상의 모습을 기렸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원래 입었던 옷과 채색은 사라지고 돌의 거친 모습만 남은 것이다.
지금의 석인상은 마치 옷을 벗겨놓은 진열장의 마네킹과 같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면 그제야 학생들은 이해하기 시작한다.
석인상뿐이겠는가.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의 유물들은 원래의 색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중국의 색을 좇다 멸망한 흉노
초원의 빛깔은 단조롭지만 아름답다.
내몽골(내몽고內蒙古)의 수도 후허하오터(호화호특呼和浩特) 시 Hothot City는 몽골어로 호허호트, 즉 푸른 도시란 뜻이다.
이 푸름은 초원 위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단조로운 색감을 뜻한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는 건 초원의 사람들에게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쉽게 할 수 없었던 호사였다.
2000년 전 흉노匈奴는 중국을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해마다 엄청난 양의 조공품을 받았다.
그중에서 제일 인기 있었던 사치품은 칠기漆器였다.
나무 그릇에 옻칠을 한 칠기는 요즘엔 다소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당대만 해도 신비로운 그 붉은빛은 중국의 귀족은 물론 주변의 다른 민족들까지도 매혹시켰다.
한국에서도 삼한시대에 사용된 중국의 칠기가 발견될 정도였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Ulaanbaatar/Ulan Bator(고륜庫倫)의 북쪽에 위치한 흉노匈奴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노인-울라 Noin-Ula는 귀족의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다.
깊이가 15미터 가까이 되는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무덤을 만들었다.
바닥이 진흙으로 뒤덮여서 발굴 자체는 고역이었지만, 진흙이라는 천혜의 조건 때문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칠기들이 발견되었다.
2012년 필자는 몽골국립박물관에서 이 칠기를 조사했다.
현지 몽골 연구원의 도움으로 진열장의 유리를 열고 직접 조사를 했는데, 살펴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왔다.
2000년 동안 흙속에 묻혀 있어서 붉은빛이 조금 어두워지긴 했지만, 그 은은한 빛깔만은 변함이 없었다.
단조로운 초원 생활에서 이 붉은빛이 흉노의 선우單于(흉노의 군주)와 귀족들을 얼마나 매혹시켰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이런 신비로운 색깔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칠기의 바닥 면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전체 감독, 그릇의 모형을 뜨는 사람, 옻칠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다.
이는 이 칠기의 깐깐한 탄생 과정을 알려준다.
왕실 납품이라 만약 불량품이 있을 경우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로 적힌 것이었다.
그만큼 품질은 신뢰할 만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흉노의 고분에서는 중국의 비단옷들과 페르시아 Persia에서 건너온 양탄자들이 출토되었다.
흉노인들은 페르시아의 양탄자로 유르트 yurt( 키르기스족이나 시베리아의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이동식 둥근 천막)를 장식했고, 중국에서 받은 화려한 비단옷과 마차를 쓰며 살았다.
하지만 이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색깔이 결국 자신들을 멸망하게 만들었다는 걸, 그때 흉노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흉노의 기동력 있는 기마술과 가공할 철제무기의 위력은 유라시아 최강이었다.
서기전 3세기에 흉노에 맞서 만리장성을 쌓다 국력을 소진한 진秦나라는 멸망했고, 그 다음에 등장한 한漢나라 또한 흉노의 존재 때문에 골치 아파했다.
흉노를 계승한 훈족族 Huns은 유럽사를 바꿀 정도였다.
한나라도 처음에는 진시황처럼 무력으로 흉노를 꺾으려 했다.
한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서기전 200년, 흉노 토벌에 나섰지만, 오히려 백등산白登山[현재 중국 산시성(산서성山西省) 다통(대동大同)시 부근] 지역에서 포위되어 죽을 처지에 놓였다.
유방은 흉노 선우의 왕비에게 뇌물을 바쳐 가까스로 살아남았는데, 중국 군대를 다 무찔러 버리면 앞으로 조공을 받을 수 없다는 왕비의 얄팍한 생각 덕분이었다.
백등산 전투 이후 한나라의 정책은 바뀌었다.
한나라는 무력으로 흉노에 대응하기보다는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의 선물로 흉노의 마음을 홀리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해마다 정월에 엄청난 양의 비단, 칠기 등의 사치품은 물론이고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을 비롯한 공녀貢女(조공으로 바치는 여자)들을 바쳤다.
한나라 조정이 받은 경제적 타격은 컸다.
하지만 조공품의 공세를 통해 흉노의 풍습을 바꿀 수 있었다.
원래 봄과 가을에만 모이던 흉노의 부족장들은 중국에게서 받은 공물을 나누기 위해 한겨울인 정월에도 모였다.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땅이나 곡식이 아니라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중요한 통치수단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조공품이 해마다 들어오게 되니 흉노로서도 굳이 주변 지역을 정복할 동기가 사라졌고,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조사했던 노인-울라의 고분은 흉노가 망하기 직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 대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많은 중국제 비단, 칠기, 마차들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겉으로는 유목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중국이 보내온 형형색색의 사치품에 빠져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흉노가 중국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에 중국은 물밑작업을 계속했다.
조공을 바치며 흉노를 안심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흉노를 이간시켜 남흉노를 중국으로 귀의시켰다.
동시에 서역의 나라들과 연합하여 흉노의 경제적 기반을 차단했다.
이른바 실크로드가 등장한 것이다.
결국 1세기 무렵에 흉노는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 일파는 유라시아 서쪽으로 사라졌다.
2000년 전 유라시아의 최대 군사강국이었던 흉노를 무너뜨린 것은 강력한 군사력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흔들던 중국의 화려한 사치품들이었던 것이다.
단조로운 초원의 빛깔에 싫증을 내어 아름다운 빛깔을 탐한 결과가 나라의 멸망이라니, 진정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은 이런 것이 아닐까.
○벽화, 역설적인 과거의 색깔
고고학은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색을 잃어버린 유물을 만나야 한다.
하지만 운좋게 과거의 색이 완벽히 보존된 경우도 있다.
고분이나 동굴에서 발견되는 벽화가 그렇다.
고고학의 원칙 중 하나가 발굴하지 않고 땅속에 두는 것이 가장 큰 보존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최신 기술로 유물을 발굴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과학과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떤 유물이든 지금보다 먼 훗날에 발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고고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바로 고분벽화이다.
벽화는 과거의 봉인을 해제하고 현재의 공기가 들어가는 순간 급격하게 그 색깔을 잃어버린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고구려 무용총에서 발견된 <수렵도>는 이미 실물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다.
2012년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중국 지안시(집안시集安市/輯安市)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일반인에게 공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벽화의 상태를 보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실물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관람객들은 주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떠들며 입김을 내뿜고 있었고, 벽에는 응결이 된 물방울이 계속 맺혀 있었다.
이 물방울이 떨어지면 벽화 표면의 색소도 같이 씻겨 내려간다.
이런 상황에서 원형이 과연 유지가 될 수 있을까?
100년 전에 일본인들이 처음 고분을 열고 조사했을 때의 기록이 가장 생생한 색감을 묘사하고 있는 건 그런 연유에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프랑스는 일찍이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Lascaux Caves과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Cueva de Altamira(영어 Cave of Altamira)의 옆에 똑같은 규모로 모사模寫한(원본을 그대로 베끼어 만든) 굴을 파고 원래 동굴은 영구히 폐쇄했다.
심지어 모사한 동굴의 벽화도 색감이 사라질까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문화재를 무기한으로 폐쇄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개방으로 인한 문화재의 훼손을 막아내기 위한 묘책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경주 석굴암石窟庵의 경우가 그러한 보존과 관련되어서 많은 문제가 있다.
석굴암은 폐허 상태로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어서 부실하게 보수가 되었다.
이후 벽에 이슬이 맺히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그래서 유리로 막아 관람객으로부터의 호흡을 차단시키고 제습기를 가동했다.
하지만 제습기의 미세한 진동이 궁극적으로 석굴암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석굴암을 잠정적으로 폐쇄하여 원형으로 복원하고 완벽한 보존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석굴암에는 현재도 사람들의 참배와 예배가 이어지고 있으니, 무작정 이런 방법을 동원하기가 쉽지가 않다.
한국의 문화재 보존 방식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이 필요할 때다.
○세월을 담은 색
박물관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잘 눈치 채지 못하는 중요한 장치 중에 하나가 바로 조명이다.
같은 유물도 조명의 색깔, 강도 그리고 방향에 따라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현장에서 발굴했던 그 어두운 유물이 다시 복원되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spotlight를 받을 때에 고고학자가 받는 감동은 남다르다.
2018년 5월에 대학원생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Vladivostok의 자료를 조사하러 갔다.
연해주 주립박물관의 전시가 개편되었음을 알고 틈을 내서 조사하러 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필자가 2010년에 크라스키노 Kraskino 발해 성터에서 발굴했던 발해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진흙 속에서 파냈던 보잘 것 없었던 토기였다.
하지만 그 토기를 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발해 토기는 어두운 회색 계열이지만, 그 작은 단지만은 주황색에 가까운 갈색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토기의 고유한 색인 갈색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었다.
이 토기가 놓인 블라디보스토크의 연해주 주립박물관은 독특한 채광방법을 채택했다.
약 120년 전에 상가로 쓰이던 건물 1층의 탁 트인 쇼윈도 show window를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햇빛이 유물을 비추게 했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와 자동차를 배경으로 펼쳐진 진열장 사이에 무심한 듯, 수줍은 듯 진열되어 있던 이 토기는 강렬하게 내 마음을 이끌었다.
발굴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처럼 독특한 색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유물이 지녔던 과거의 색을 제대로 떠올리면서, 진정으로 과거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우리 고고학자들은 빛바랜 유물을 끄집어냈을 때,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을 순간을 떠올린다.
모든 것은 시간이라는 파도를 넘어오면서 제 색을 잃는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눈부신 순간을 살아가려고 늘 애쓰지만 정작 그 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눈부신 순간은 항상 뒤늦게, 그것도 지나가버린 옛날을 생각했을 때 문득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미 빛바랜 오래 전 유물들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지금을 눈부시게, 지금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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