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수월헌 임희지 "묵란도" "묵죽도" 본문
<난엽에 춤사위를 넣으면 이렇게 된다오>
조선 후기는 중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이 향상된 시기였다.
사실 신분만 양반이 되지 못했지, 교양과 지식으로 치면 웬만한 양반을 훨씬 뛰어넘는 중인이 많았다.
중인이 담당한 서리書吏(서제書題: 조선 시대 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 구실아치), 역관譯官(통역관), 의관醫官(의사), 관상관觀象官(천문 관측), 산관算官(수학 및 계산) 등은 지식인이 아니면 담당할 수 없는 직책이었다.
서출도 중인인데 이들도 실상은 양반집 자제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사회가 변하면서 이 기술직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송석도인松石道人 천수경千壽慶의 집에서 모인 중인문학 모임인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이다.
이들이 이룩한 문학적 업적은 조선 문학사에서 여항閭巷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여항이란 '여염閭閻(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의 사람들'이란 뜻으로, 벼슬을 하지 않는 일반 백성들을 이르는 말이다.
화가들도 중인문화에 동참하였다.
순조 연간으로 넘어가면 추사 김정희의 제자 중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우선 이상적, 소치 허련 등이 모두 중인 출신이었고 훗날에는 역매 오경석, 몽인 정학교, 소당 김석준 등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중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자 우봉 조희룡은 ≪호산외사壺山外史≫라는 '중인 명사 열전'을 지었다.
호산은 조희룡의 또 다른 호이고, 외사는 정사正史가 아니라는 뜻이다.
≪호산외사≫에는 문장으로, 기술로, 그림과 글씨로, 음악으로 이름을 날렸던 중인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기발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기인도 열전에 올려놓았다.
이 책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역시 화가들에 대한 증언이다.
호생관 최북을 비롯하여 많은 중인 화가의 삶을 이 책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중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1765~?)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일화들로 가득하다.
수월헌은 난초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특히 그의 난초 그림은 부드럽고 유연한 춘란春蘭(보춘화報春花: 봄에 꽃 피는 난초)으로 어찌 보면 춤을 추는 듯하고, 어찌 보면 요염하기도 하다.
그 내력을 ≪호산외사≫는 이렇게 전한다.
"임희지는 스스로 호를 수월도인水月道人이라 하였는데, 중국어 역관이다. 사람됨이 강개慷慨(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하고 슬픔)하고 기절氣節(굽힐 줄 모르는 기개와 절조)이 있었다. 둥근 얼굴에 뾰족한 구렛나루, 키는 팔 척으로 특출한 모습이 도인이나 신선 같았다. 술을 좋아하여 간혹 밥 먹는 것을 폐하고 며칠씩 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대와 난을 잘 그렸는데, 대 그림은 표암 강세황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난에 있어서는 표암보다 더 뛰어났다.
그림을 그리면 문득 수월水月이라는 두 글자를 반드시 이어 붙여 썼으며, 혹 제시題詩를 쓰게 되면 부적 같아 알아보기 어려웠고, 글자의 획이 기이하고 예스러워 인간의 글씨 같지 않았다."
실제로 수월헌의 낙관은 초서로 물 수水와 달 월月 자를 이어 붙여 써서 얼핏 알아보기 힘든데 그게 여간 멋있는 게 아니다.
도장도 초승달 모양으로 생겼는데 그 안에는 水 자를 전서체로 새겨놓았다.
멋쟁이 글씨에 멋쟁이 도장이다.
화제로 쓴 글은 글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어 조희룡은 부적 같다고 했지만 그의 난초 그림과는 조형적으로 잘 어울리는 추상성이 있다.
"그는 생황을 잘 불어 그에게 배우는 사람이 많았다. 집이 가난하여 특별한 보물이라고는 없었으나 거문고, 칼, 거울, 벼루 등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물건 중에 옛 옥玉으로 된 필가筆架(붓걸이: 붓을 걸어 놓는 기구)의 가격은 칠천 전錢이나 되어 집값의 두 배에 해당하였다."
이처럼 수월헌은 취향이 호화롭과 사치스러웠던 모양인데, 거의 몸에 배어 있었던 듯하다.
"수월헌은 첩을 한 명 데리고 살았는데 말하기를 '내 집에는 꽃을 기를 만한 정원이 없는데, 나의 첩은 좋은 꽃 한 송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거처하는 집은 몇 개의 서까래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고 빈 땅이라고는 반 이랑도 안 되었지만 반드시 사방 몇 자 되는 못을 팠는데, 샘을 얻지 못하여 쌀뜨물을 모아 부어 물이 뿌옇게 탁했다. 매 때마다 못가에서 휘파람을 불고 노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 수월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리니, 달이 어찌 물을 가려서 비추리오.'"
기발한 행동도 많이 하였던 모양이다.
≪호산외사≫에는 두 가지 기행을 소개하고 있다.
"한번은 배를 타고 교동을 향해 가는데 바다 가운데 이르러 큰 비바람 때문에 거의 건너갈 수 없게 되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정신없이 엎드려 '나무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울부짓었다. 그러나 수월헌은 갑자기 크게 웃으며 일어나 검은 구름 흰 파도의 격랑 속에서 춤을 추었다. 바람이 멎고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죽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 가운데서 비바람 치는 기이한 장관은 만나기 어려운 것이니 어찌 춤추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한번은 이웃집 아이에게서 거위 털을 얻어 이를 엮어서 옷을 만들었다. 달 밝은 밤에 두 개의 상투를 틀고 맨발에 거위 털옷을 입고 생황을 비껴 불면서 십자로十字路를 다니니, 순라군이 이를 보고 귀신이라 생각하고 모두 달아났다. 그의 미치광이 같은 행동이 이와 같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중인이라는 신분에 대한 억울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을 것이다.
낭만을 발하면서 살려고 해도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수월헌이 그런 기행을 해도 세상은 그를 벌주지 못하고 그러려니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 있었다.
중인들의 사회적 위상이 그만큼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희룡은 이렇게 말했다.
"수월헌은 태평 시대에 있을 만한 사람이다. 어떤 도도한 세상인들 이와 같은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는지 의문이다. 수월헌이 바다 위에서 일어나 춤을 춘 것은 기백의 힘이 굳센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수월헌이었으니 그의 기질이 그림으로 나타날 때면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희룡은 그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나를 위하여 돌 하나를 그려주었는데, 붓을 몇 번 움직이지 않고도 돌에 주름이 잡히고 틈이 생겼으며 영롱한 정취가 갖추어졌으니 참으로 기이한 솜씨다."
조희룡이 받았다는 수월헌의 이 <괴석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초를 그리면서 곁들인 돌을 보면 조희룡의 감탄을 이해할 만하다.
그가 붓을 몇 번 움직여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난초 그림에서 더욱 잘 보인다.
수월헌의 난초는 모두 춤을 춘다.
흐드러진 멋을 보여주는 긴 난초를 중심으로 작은 난초 잎이 배치되는 것을 보면 프리마돈나를 중심으로 짜인 군무룰 보는 듯하다.
이런 난초가 갖는 멋은 회화적 분석보다도 풍랑 속에서 춤을 추고, 집이 가난해도 달그림자를 보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는 그의 일대기가 더 잘 해설해준다.
심지어는 그의 대나무 그림에서도 춤사위를 느끼게 된다.
우봉 조희룡이 전해주는 일화들이 있기에 우리는 수월헌 임희지의 그림을 더욱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봉의 ≪호산외사≫를 값진 미술사적 증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9. 1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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