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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2: 이탈리아 르네상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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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2: 이탈리아 르네상스

새샘 2024. 8. 31. 10:23

이탈이아 르네상스 중심지였던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초 데 메디치(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B%A1%9C%EB%A0%8C%EC%B4%88%20%EB%94%94%20%ED%94%BC%EC%97%90%EB%A1%9C%20%EB%8D%B0%20%EB%A9%94%EB%94%94%EC%B9%98)

 
르네상스는 궁극적으로 전 유럽의 지적·예술적 운동이 되었지만, 14·15세기 이탈리아 Italia에서 가장 먼저 독특하게 발달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르네상스 운동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운동의 근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원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중세 말기 유럽에서 이탈리아가 가장 도시화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알프스 이북의 귀족과는 달리 이탈리아의 귀족은 통상 시골의 성보다는 도시 중심지에 거주했으며, 따라서 도시의 공적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탈리아의 귀족계급은 도시에 궁을 짓고 살았기에 알프스 이북과는 달리 부유한 상인들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프랑스 France나 독일 Germany의 경우 귀족은 영지의 수입으로 생활했고, 부유한 도시 거주자(부르주아 bourgeois 즉 유산有계급)는 상업을 통해 소득을 얻었다.
반면 이탈리아의 도시 거주 귀족은 금융업이나 상업에 종사했고, 부유한 상인 가문은 귀족계급의 예법을 모방했으므로, 14·15세기에 이르면 귀족계급과 상층 부르주아계급을 구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예를 들면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의 유명한 메디치 가문(Medici family)은 (그 이름이 보여주듯이) 원래 의사 집안으로 시작해 금융업과 상업으로 재력을 쌓고 15세기에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이와 같은 발전이 교육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분명했다.
상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읽고 셈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부유한 명문가에서는 공공 영역에서 논쟁을 잘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법을 자세하게 가르쳐줄 교사를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 수많은 세속 교육자가 등장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학생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윤리적 논고 및 문학작품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과시했다.
이탈리아의 학교들은 전 유럽에서 가장 교육이 잘된 대중을 길렀고, 문학 및 예술 표현의 새로운 이념과 형식을 개발하는데 기꺼이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수많은 부유한 후원자를 등장하게 했다.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가 지적·예술적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고전 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에는 고대 로마의 기념물이 산재해 있었고, 고전 라틴 문헌에는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인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간주하던 익숙한 도시와 지역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탈리아인은 14·15세기에 자신들의 고전 유산을 재평가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인은 스콜라철학 scholasticism―프랑스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에 반발해 독자적인 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교황이 14세기의 대부분을 아비뇽 Avignon에 옮겨가 있었던 사건, 그리고 1378년에서 1415년까지의 장기간에 걸친 대분열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14세기 전 기간에 걸쳐 모든 부문에서 스콜라철학에 대한 지적 반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이탈리아인은 고전 문헌이 제공한 지적 대안을 선호하게 되었다.
일단 이탈리아에서 로마 문학과 학문이 뿌리를 내리자, 로마의 예술과 건축이 그 뒤를 이었다.
로마 학문이 프랑스의 스콜라철학에 대한 지적 대안을 제공했듯이, 로마의 예술과 건축 또한 이탈리아인에게 프랑스 고딕 양식을 대신할 화려한 예술 양식을 창조하도록 고무했다.
 

끝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부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탈리아의 경제는 14·15세기보다 13세기에 더 큰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저술가와 예술가가 외국에 나가 일자리를 구하기보다 고국에 머물기를 더 선호했음을 뜻한다.
더욱이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도시민의 자부심이 커지고 1인당 소득의 증가로 문화에 대한 투자가 늘어났다.
14세기에는 도시들이 예술과 학문의 일차적 후원자였다.
그러나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이탈리아 도시가 귀족 가문의 세습 지배에 압도되었고 후원활동도 군주나 귀족이 독점하게 되었다.
군주 가운데는 로마의 교황도 있었는데, 교황의 권력은 교황령 국가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에 기반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교황 가운데 가장 세속적인 교황들―알렉산데르 6세 Alexander PP. VI(재위 1492~1503), 율리우스 2세 Iulius PP. II(재위 1503~1513),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1449~1492)의 아들 레오 10세 Leo PP. X(재위 1513~1521)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거느렸으며, 그 결과 수십 년 동안 로마는 서유럽 예술의 수도가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학과 사상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D%94%84%EB%9E%80%EC%B2%B4%EC%8A%A4%EC%BD%94%20%ED%8E%98%ED%8A%B8%EB%9D%BC%EB%A5%B4%EC%B9%B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학자와 저술가들의 업적을 살피려 한다면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1304~1374)의 저작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페트라르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스콜라 철학이 사람들에게 유덕한 삶을 사는 방법과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추상적 사고에 치중함으로써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다.
페트라르카는 그리스도교 저술가는 무엇보다도 문학적 수사법을 배양해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고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페트라르카에 따르면 최고의 수사법은 고전 라틴문학 작품에서 찾을 수 있고, 고전 라틴문학은 윤리적 지혜로 가득차 있기에 두 배의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페트라르카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고전 라틴문학을 찾아내는데, 그리고 고전작가를 본받아 라틴어 문체로 시를 쓰고 도덕적 논고를 집필하는데 헌신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탁월한 속어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사랑한 여인 라우라 Laura를 위해 서정시인 트루바두르 Troubadour의 기사도적 문체로 쓴 이탈리아어 소네트―나중에 페트라르카풍의 소네트로 불렸다―는 르네상스 시기 전반에 걸쳐 그 형식과 내용이 널리 모방되었고 르네상스 전 기간에 걸쳐 찬양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페트라르카는 매우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도였기 때문에 그가 생각한 인간의 궁극적 이상은 명상과 금욕의 고독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에 뒤이어 1400~1450년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한 이탈리아의 사상가와 학자들은 '시민적 휴머니즘'이란 새로운 사조를 발전시켰다.
피렌체 사람 레오나르도 브루니 Leonardo Bruni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Leon Battista Alberti 같은 시민적 휴머니스트는 수사학과 고전 문학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 페트라르카의 견해에 공감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인간이 가족과 사회에 쓸모 있게 되기 위한, 행동을 하기 위한, 그리고 국가―여기서의 국가란 고전 모델 또는 동시대 피렌체를 모델로 한 공화적인 도시국가이다―에 봉사하기 위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야심을 품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고상한 충동이기에 마땅히 격려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물질적 소유를 위한 노력을 비난하지 않았는데, 인간 진보의 역사는 땅과 그 자원에 대한 성공적인 지배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시민적 휴머니스트들의 저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베르티의 ≪가족론≫(1443)이다.
이 책에서 알베르티는 핵가족이야말로 인간의 복리를 위해 자연이 제정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베르티는 이 제도 속에서 가사를 여성에게만 전담시켰다.
그는 "남성은 본시 정력적이고 근면"하며 여성은 "자손을 번성시키고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지적 능력에 대한 이런 폄하는 일부 저명한 여성 휴머니스트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대부분 여성에 대한 모욕적 태도로 일관했다.
이러한 모욕은 휴머니스트들이 그토록 찬양한 고전 문학에서도 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헌 연구의 등장

 
시민적 휴머니스트들은 고전 문학과 철학―특히 그리스 문학과 철학― 연구에서 페트라르카를 훨씬 능가했다.
이런 작업을 수행하면서 그들은 15세기 전반에 이탈리아로 이주해온 수많은 비잔티움 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이탈리아 학자들은 서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어 필사본을 찾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을 비롯한 동방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기도 했다.
1423년 이탈리아 휴머니스트 조반니 아우리스파 Giovanni Aurispa는 혼자서 238권이나 되는 필사본을 갖고 돌아왔는데, 그중에는 소포클레스 Sophoc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 투키디데스 Thucydides등의 저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저작들은 신속히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원작의 문학적 힘을 고스란히 유지하기 위해 직역이 아닌 의역으로 번역되었다.
1500년에 이르면 플라톤 Platon을 비롯한 수많은 극작가와 역사가들이 쓴 그리스 고전의 대부분을 서유럽에서 구해볼 수 있었다.
 
시민적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고전 문헌에 대한 관심은 갖고 있되 결코 그들의 운동―시민적 휴머니즘―에는 전폭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던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1407~1457)는, 이례적인 인물이었지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한 르네상스 사상가였다.
로마 태생으로서 주로 나폴리 Nopoli 왕 밑에서 비서로 일했던 발라는 피렌체의 시민적 휴머니스트들과는 달리 공화정 이념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발라는 문법, 수사학의 기량과 그리스어, 라틴어 문헌에 대한 성실한 분석을 수행함으로써, 철저한 언어 연구를 통해 과거 한때 진실로 여겨졌던 문헌의 허위성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발라가 이룩한 탁월한 업적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 Donation of Constantine'이 중세의 위조문서임을 폭로한 일이다.
교황청은 교황이 서유럽에서 행사하는 세속 지배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세기에 증여했다고 하는 문서에 입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발라는 그 문서에 기록된 언어는 고전 라틴어가 아니며 시대착오적인 용어로 가득 차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기증장'이 중세의 한 위조자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그 위조자의 '가공할 뻔뻔스러움'은 '언어적 우매함' 때문에 드러났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연구 성과는 비단 '중세의 무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발라의 연구로 인해 앞으로 모든 고전 문헌 연구에 시대착오의 개념이 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약성서 강해≫에서 그리스어에 대한 전문지식을 활용해 성 바울 Sanctus Paulus(영어 Saint Paul)의 서한이 지닌 진정한 의미―그는 그것이 라틴어 불가타 Vulgata(불가타 에디티오 Vulgata Editio의 약어로서 '일반의' 또는 '공통의'란 뜻) 번역에 의해 의미가 불투명해졌다고 믿었다―를 밝혔다.
이 저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학문과 그 후의 북유럽의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 사이에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1450년 무렵부터 1600년 무렵까지 이탈리아 사상계를 압도한 것은 신플라톤주의학파 Neoplatonism였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Plotinus의 사상, 그리고 다양한 고대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와 혼합하고자 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마르실리오 피치노 Marsilio Ficino(1433~1499)와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1463~1494)였다.
두 사람은 모두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1389~1464, 로렌초 데 메디치의 할아버지)가 설립한 피렌체 플라톤 학회의 회원이었다.
이 학회는 느슨하게 조직된 학자들의 모임으로 강독과 강의를 위해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영웅은 플라톤이었다.
그들의 플라톤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개최했고, 연회가 끝나면 모든 참석자는 마치 자신이 플라톤의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것처럼 연설을 했다.
후대의 관점에서 돌이켜볼 때 피치노의 최대 업적은 플라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서유럽인이 처음으로 플라톤의 저작을 널리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치노는 ≪헤르메스 전서 Hermetic Corpus≫―히브리 카발라 Hebrew Kabbalah(유대교 신비주의)를 포함한 수많은 고대 신비 문서에서 따온 인용문 선집―를 자신의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피치노의 철학이 과연 휴머니즘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사는 윤리학이 아닌 형이상학이었고, 개인은 마땅히 내세를 앙망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피치노의 견해에 따르면, '불멸의 영혼은 유한한 육체 안에서는 항상 비참'하다.
그의 제자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게도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피코는 분명 시민적 휴머니스트는 아니었다.
그는 세속의 공적 문제에서 아무런 가치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스승과 똑같이 고대의 신비 문헌에서 뽑아낸 인용문을 맥락을 무시한 채 결합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 Oration on the Dignity of Man≫에서 주장했듯이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는 없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이 원하기만 한다면 신과 합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마키아벨리

 
페트라르카로부터 피코에 이르는 이탈리아 사상가 가운데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창성을 지닌 사상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위대성은 다만 표현방식과 학식에, 그리고 고대 사상의 여러 주제를 대중화시켰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르네상스 이탈리아 최고의 정치철학자였던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의 저술은 그 시대 이탈리아의 불안정한 여건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15세기 말의 이탈리아는 국제적 분쟁의 격전장이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이탈리아 반도를 침입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부터 충성을 얻어내기 위한 경쟁을 벌였는데,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내부갈등으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다.
1498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 Repubblica Fiorentina―피렌체 공화국은 그보다 4년 전 프랑스의 침공으로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면서 수립되었다 정부의 고관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다른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로마에 있을 때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인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가 중부 이탈리아에 자신의 공국을 창설하는 것을 보고 매료되었다.
그는 체사레의 잔인성과 교활함, 그리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도덕성을 철저히 포기한 그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복귀해 피렌체 공화국을 전복하자 마키아벨리는 지위를 잃고 말았다.
좌절과 쓰라린 상처를 간직한 채 그는 남은 생애를 시골 영지에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활동에 바쳤다.
 
마키아벨리는 오늘날에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현대의 일부 학자에 따르면, 그는 도덕성과 그리스도교적 경건을 경멸하고 정치활동의 정당한 목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권력의 획득과 행사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았던 현실 정치 realpolitik의 비도덕적 이론가였다.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군주 독재를 외국 정복자들에게서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한 이탈리아의 애국자였다.
또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Hipponensis(영어 Augustine of Hippo)의 추종자로서, 죄인들의 타락한 세계에서 한 지배자의 선량한 의도가 그의 정책이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는 보증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한 사상가였다.
마키아벨리는 오히려 군주의 행동은 내면적 도덕성이 아닌 결과로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 존재는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기만적이고,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며,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국가를 유지할 필요성 때문에 빈번히 충절, 자비, 자애, 종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군주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선한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그는 악을 따를 줄도 알아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대표적인 정치 분석 저술 두 권이 표면상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에 수수께끼를 풀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리비우스 논고 Discourse on Livy≫에서 그는 입헌 정부, 공화국 시민 사이의 평등, 도시국가의 정치적 독립, 종교의 국가에 대한 종속 등을 찬미하면서, 고대 로마 공화정을 자기 시대의 전범典範(본보기가 될 만한 모범)으로 칭송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헌신적인 공화주의자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유로운 도시국가를 이상적 형태의 정부로 믿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비판자들이 '독재자의 핸드북'이라고 부르는 책인 ≪군주론 The Prince≫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을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 Piero di Cosimo de' Medici(1416~1469)의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1449~1492)에게 바쳤는데, 로렌초 가문은 마키아벨리가 섬긴 피렌체 공화국을 전복한 바로 그 집안이었다.
 
≪군주론≫이 ≪리비우스 논고≫에 비해 훨씬 더 널리 읽혔던 까닭에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 연구자들은 그가 ≪군주론≫에서 언급한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찬양을 군주 독재 자체에 대한 승인으로 오해하곤 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실질적 입장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16세기 초의 정치적 혼돈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 같은 무자비한 군주야말로 동시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이탈리아인을 다시 한 번 공화주의적 자치정부에 합당한 인간으로 만들어줄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관이 몹시 음울하긴 했지만, 마키아벨리는 동시대 이탈리아인이 궐기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정복자를 추방하고 공화주의적 자유와 평등의 오랜 전통을 회복시켜주기를 갈망했다.
보르자 같은 군주는 그런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키아벨리가 그런 군주의 지배를 인간을 위한 이상적 지배 형태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몰락한 정치 상황에서 군주국가는 마키아벨리 시대의 짓밟힌 이탈리아인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정부 형태였다.
 
 

궁정인의 이상

 
마키아벨리의 충격적인 정치이론보다 동시대인의 취향에 더 잘 어울린 것은, 외교관이자 백작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 Baldassare Castiglione(1478~1529)가 ≪궁정인 The Book of the Courtier≫(1528)에서 묘사한 귀족의 올바른 행동지침이었다.
현대 에티켓 안내서의 선구 격으로 재치 있게 서술된 이 책은, 브루니와 알베르티가 쓴 종전의 시민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논고들과 현저한 대조를 보였다.
브루니와 알베르티가 도시국가와 가정을 위한 근면한 봉사라는 건전한 공화주의적 미덕을 가르친 반면, 막강한 군주의 궁정이 지배한 이탈리아에서 저술활동을 한 카스틸리오네는, 진정한 신사로서 행동하는데 필요한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자질을 어떻게 함양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카스틸리오네는 어느 누구보다도 '르네상스적 인간'의 이상을 대중화시켰다.

르네상스적 인간은 다양한 분야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멋지고 유머 감각이 있으며, '예의 바른', 즉 교양 있고 학식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알베르티와는 달리 카스틸리오네는 '가정과 가사'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궁정의 숙녀가 '우아한 접대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로써 그는 유럽의 남성 저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가사 이외의 독립적인 역할을 인정한 인물이 되었다.
출간 후 장장 한 세기가 넘도록 전 유럽에서 널리 읽힌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은 '세련'이라는 이탈리아의 이상을 알프스 이북의 궁정으로 확산시켰다.
그 결과 유럽 귀족계급은 예술과 문학을 한층 열렬하게 후원했다.
 
16세기의 이탈리아인은 상상력이 넘치는 산문과 운문을 창작했다.
마키아벨리는 경쾌한 단편 <벨라고르>를 썼으며, ≪만드라골라≫라는 음란한 희곡도 썼다.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Michelangelo는 여러 편의 감동적인 소네트를 썼고, 16세기 이탈리아 서사시인 중 가장 뛰어난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Ludovico Ariosto(1474~1533)는 장편 이야기 시 ≪광란의 오를란도≫를 썼다.
중세 샤를마뉴 Charlemagne 전설에서 소재를 취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은 중세의 어떤 서사시와도 현격하게 달랐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서정적 판타지 fantasy(환상)의 요소를 도입했고, 무엇보다도 영웅적 이상주의를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오스토가 글을 쓴 것은 독자를 웃기기 위해, 그리고 자연의 고요한 영광과 사랑의 열정을 멋들어지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 말기의 환멸과 희망 그리고 신앙의 상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쾌락과 심미적 기쁨의 추구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던 당시의 경향을 잘 드러내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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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8.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