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신숙주의 <화기>와 유한준의 ≪석농화원≫ 발문 본문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모으게 되나니>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서예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회화 수장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수장품은 송나라 곽희의 산수화를 비롯하여 5대 왕조에 걸친 서화가 35인의 작품으로 모두 222축이었다.
우리나라 화가로는 유일하게 안견의 그림만 들어 있었다.
1445년 초가을, 28세의 안평대군은 그동안 수집한 소장품을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천성이 그림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넓고 깊게 찾은 지 10여 년이 지나 이렇게 모았으니 놀랍다.
물物의 이룸과 무너짐에는 때(시時)가 있고, 모임과 흩어짐에는 수數가 있으니 오늘의 이룸은 다시 훗날의 무너짐이 되어 그 모임과 흩어짐이 필연이 아님을 어찌 알리오....
그대는 나를 위해 이를 기록해주시오."
이때 신숙주가 쓴 글은 그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화기畵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신숙주는 222점의 화가와 제목을 일일이 나열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그림이란 반드시 천지의 조화를 자세히 살피고 음양의 운행을 파악하여 만물의 성정性情(타고난 본성)과 사리의 변화를 가슴속에 새긴 연후에 붓을 잡고 화폭에 임하면 신명神明(천지天地의 신령)과 만나게 되어,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이며 무엇이든 붓으로 그대로 나타내니 가상假像(거짓 형상)에서 참모습을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화가의 법이다.
············
이 수장품을 보면 진실로 저 맑고 깨끗하고 고아함이 우리의 성정을 즐겁게 하고, 저 호방하고 웅장함은 우리의 기상을 길러줄 것이니 어찌 그 도움이 적다 하리오.
나아가서 물리物理(모든 사물의 이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널리 살피고 많이 익힘에 이른다면 시詩 못지않은 공功( 결과로서의 공적)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과연 여기에 이를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겠노라."
조선시대는 회화의 발전과 함께 많은 수장가, 훌륭한 감식가를 낳았다.
중기에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의 소장품에 미수 허목이 평을 쓴 것이 유명하다.
낭선군 소장품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화원별집≫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안평대군과 중기의 낭선군은 왕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컬렉션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들어오면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제력을 갖고 있는 수장가가 등장한다.
상고당尙古堂 김광수尙古堂(1699~1770)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이 대표적인데 모두 양반이 아니라 중인이었다.
석농은 나중에 선배인 상고당의 소장품까지 인수받음으로써 조선시대 회화사상 불후의 명화첩인 ≪석농화원石農畵苑≫을 남기게 되었다.
석농 김광국은 7대에 걸쳐 의관을 지낸 부유한 중인 출신으로 그 역시 수의首醫(조선 시대에, 내의원에 속한 내의內醫의 우두머리 의원)를 지냈다.
1776년에는 사신을 따라 중국에도 다녀왔는데 우황牛黃(소의 쓸개 속에 병으로 생긴 덩어리로서 열을 없애고 독을 푸는 작용을 하여, 중풍·열병·간질 따위에 쓴다)을 비롯한 중국 의약품의 사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광국은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감식안을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림을 소중히 다룰 줄 알았다.
석농은 자신의 수집품 중 뛰어난 작품에는 별지로 화가의 이름과 평을 써넣은 제첨題簽(표지에 직접 쓰지 아니하고 다른 종이 쪽지에 써서 앞표지에 붙인 외제外題)을 붙였다.
이는 조선시대 회화 감정에서 절대적 기준이 되었다.
이 책에 실린 충암 김정의 <숙조도>, 공재 윤두서의 <석공공석도>가 그 예이다.
석농은 자신이 쓴 화평을 강세황, 이광사, 황기천, 유한지, 김이도 등 당대의 안목 있는 명사의 글씨로 받아 붙이기도 했다.
두 아들이 대필代筆한 것도 있다.
그래서 신사임당의 <포도도>에는 '김광국 발跋, 김이도 서書'라는 제첨이 붙어 있다.
이렇게 모아 정리한 화첩이 ≪석농화원≫이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말대로 '물의 이룸과 흩어짐'은 세월의 필연이어서 현재 ≪석농화원≫은 석농이 성첩한 상태로 전하지 않는다.
이동주의 증언에 따르면 다섯 권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해동명화첩≫이라는 이름으로 28점이 전하고, 홍성하의 소장이었다가 지금은 선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32점이며 그 밖에 낱폭으로 흩어진 것 7점 등 모두 67점이 확인된다.
≪석농화원≫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대개는 석농의 시대와 가까운 공재 윤두서 이래의 후기 작가들 작품이며, 조선 초기·중기 화가는 11명이 있다.
그중에는 중국 그림, 일본 우키요예 그리고 네델란드 동판화까지 들어 있어 그의 견문이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다.
북경에도 다녀온 적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석농은 ≪석농화원≫의 장황粧䌙/裝潢(표장表裝 :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이 이루어진 뒤 유한준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안평대군이 신숙주에게 청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한준의 ≪저암집著菴集≫에는 그 발문이 이렇게 실려 있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가 있다.
한갓 쌓아두는 것뿐이면 잘 본다고 할 수는 없다.
본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보듯 하고 벙어리가 웃는 듯하다면 칠해진 것 이외는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아직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해도 오직 붓, 채색, 종이만을 취하거나 형상의 위치만을 구한다면 아직 아는 것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형태와 법도는 물론이고 깊은 이치와 조화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는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의 겉껍질 같은 태도가 아니라 잘 안다는 데 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
석농이 젊어서는 당대의 명사인 김광수, 이인상과 교우했는데, 이제 늙어 머리가 희고 옛 친구는 세상을 떠나 지금은 내가 그의 벗이 되어 가까이 지내고 있다."
유한준이 이 글을 쓴 것은 1795년이었다.
그때 석농은 69세였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97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능력이면서도 운세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자신의 선택이다.
≪석농화원≫이 없었다면 석농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풍요롭고 이롭게 하는데 이바지한 석농은 한국문화사의 위인으로 기려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오래전에 필자는 인사동 고미술상에서 다 떨어진 ≪석농화원≫의 비단 표지를 만나게 되었다.
상인 이야기로는 홍성하의 집에서 잡동사니와 함께 나온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를 헐값으로 구입해 낙원표구사에서 깔끔히 장황하여 석농을 기렸다.
그러다 2003년 이태호 교수와 함께 학고재에서 <유희삼매遊戱三昧>전을 기획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청관재 조재진에게 ≪석농화원≫ 중 중국, 일본, 네덜란드 동판화 세 점을 빌려 함께 전시한 후 이 표지를 선물로 드렸다.
우리 것이 아니라고 대접받지 못하던 그림이지만 석농을 기리는 마음으로 소장해온 청관재의 마음이 아름다워서였다.
그리고 필자는 석농을 연구하다가 유한준의 발문을 읽게 되었고 가슴속에 오래 남은 그 글을 나중엔 내 식으로 번안하여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하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썼다.
이래저래 석농은 나에겐 잊을 수 없는 선현先賢(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다.
나는 지금 조선시대 뛰어나 수장가의 얘기를 전하고 있지만 서화 감상과 수장이란 꼭 재력가의 몫만은 아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부유하지 않은 선비들은 어떻게 서화를 즐겼는가를 말해주는 <현화법懸畵法>이라는 글이 있다.
'벽에 그림을 거는 법'을 말한 것이다.
"서재에는 축 하나 정도만 거는 것으로 족하다. 때때로 바꾸어 걸어 여름 봄에는 추경·동경, 가을 겨울에는 하경·춘경을 택하고, 산에 살고 있으면 수경水景을, 물가에 살고 있으면 산경山景을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기분이 좋다.
축 아래로는 작은 탁자를 놓고 작은 괴석이나 작은 화분을 하나 놓으면 된다. 향로나 화로를 서화 가까이에 놓으면 안 된다. 그을리거나 불에 탈 위험이 있다.
그림을 양쪽 벽에 마주 거는 것은 심히 속된 것이다. 벽에는 여백을 두어야 한다. 서화를 오려서 너절하게 붙여놓으면 눈이 어지럽다.
성현의 교훈을 담은 글귀나 아름다운 문장을 해서로 좌우에 붙이는 것도 좋다."
그러면 그림을 전 점도 소장할 수 없는 궁핍한 처지의 사람은 어쩌란 말ㅇ니가.
연암 박지원은 <필세설筆洗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감상은 잘하되 수장을 못하는 이는 가난하되 자신의 눈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전시회를 찾아 열심히 관람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자신의 서정을 간직하면서 미술문화에 동참하는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8. 2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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