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마음을 울리는 소리 없는 음악 본문
"말이 사라지고 나면, 음악이 시작된다."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샤먼과 뮤즈
2015년 카자흐스탄 Kazakhstan의 세계문화유산인 탐갈리 Tamgaly 암각화를 조사했을 때였다.
알마티 Almaty에서 차로 다섯 시간을 달리면 병풍처럼 늘어진 바위산이 나온다.
그 바위산 곳곳에는 3000년 전에 그려진 암각화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유라시아 곳곳에 암각화 유적이 있지만, 특히 탐갈리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샤먼을 둘러싸고 춤을 추는 그림은 생동감이 넘쳐 마치 차가운 돌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탐갈리 암각화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유라시아의 어느 유적에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사실 암각화에서 음악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시베리아를 조사하러 다니면서 수많은 무당의 의식을 직접 보고 그들의 음악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대에는 신에게 이르는 특권을 보장받은 샤먼 shaman들만이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다.
한국의 무당들이 굿을 할 때 반드시 다양한 음악과 춤이 동반되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시베리아의 샤먼들도 하늘에 이르는 방법으로 음악을 사용했다.
선사시대 이래로 샤먼들이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의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암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악의 위력을 바이칼 Baikal의 무당들이 하는 의식을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암각화에 새겨진 샤먼이나 지난 세기의 흑백사진 속에 남겨진 샤먼들의 모습은 얼핏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20세기 초 소련이 들어선 이후 정부는 샤먼의 의식을 엄격히 금지했고, 이로 인해 샤먼들은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샤먼이 부활한 것은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된 직후였다.
하지만 한동안 끊겼던 전통 때문이었는지, 1990년대 필자가 유학 시절에 본 샤먼의 모습은 어딘지 어설프기만 했다.
진짜 초원의 샤먼이 가진 위력을 느낀 것은 2014년에 바이칼에 위치한 부리야트 공화국 Republic of Buryatia(몽골계인 부리야트인 Buryats들이 사는 러시아의 자치공화국)에서 해마다 열리는 샤먼 축제에 참석했을 때였다.
부리야트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 샤먼의 의식이 있었다.
샤먼 축제가 열린 곳은 툰카 Tunka라는 지역으로,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이었다.
툰카는 바이칼 호수 Lake Baikal 안의 올혼섬(알혼섬) Olkhon Island과 함께 바이칼 근처에서 가장 영기가 세다고 여겨지는 곳이었다.
필자는 초원에 구름같이 모여든 사람들을 비집고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샤먼의 의식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샤먼은 성스러운 나무에 천조각을 달아 신의 강림을 빌었다.
그 옆에는 제물로 바쳐진 양을 삶은 솥이 보였다.
물이 기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샤먼은 나무 근처에 마치 병풍처럼 그들의 세계관을 묘사한 신화를 표현한 가죽그림을 걸었다.
이로써 샤먼 의식의 준비는 마친 셈이다.
분위기가 고조된 순간 치장을 마친 샤먼이 다시 등장했다.
황금빛의 청동 방울과 거울을 몸에 주렁주렁 걸친 샤먼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롱한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샤먼의 가슴에 건 거울은 햇빛을 반사해 마치 가슴에 태양을 품고 있는 듯했다.
샤먼은 천천히 북을 치면서 낮은 목소리로 구결을 읊었다.
옆에서 악사들은 북과 징을 치면서 샤먼의 의식을 도와주고 있었다.
특히 심벌즈 cymbals 같이 생긴 징에서 울펴 퍼지는 그 영롱한 울림은 나를 홀렸다.
샤먼의 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제 의식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세형동검문화 시기인 2400년 전에 등장하는 동검과 청동방울, 거울도 바로 샤먼의 도구였다.
우리나라 세형동검문화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비슷하게 생긴 청동방울과 거울은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샤먼들이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국보로 지정된 팔주령八珠鈴(가지 방울 또는 쌍두령雙頭鈴: 여덟 개의 방울이 달리 도구)과 장대에 다는 방울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처럼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도 있었다.
둥근 거울처럼 생긴 청동기로, 이름은 원개형동기圓蓋形銅器(뚜껑모양 동기: 둥근 뚜껑 모양의 청동기)라고 한다.
이 청동기는 얼핏 보면 거울처럼 생겼지만 더 얇고 가운데가 깨져서 처음에는 그 용도를 알 수 없었다.
거울로 쓰기엔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고, 뒷면에는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만든 손잡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시베리아 샤먼의 의식에 쓰이는 도구와 비교한 결과, 이 청동기 즉 원개형동기도 두드리는 악기의 일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제정일치의 사회였던 청동기시대, 지도자는 칼을 찬 무력의 상징인 동시에 하늘을 뜻을 전할 수 있는 샤먼이기도 했다.
한손으로는 칼을 휘두르고 또 다른 손으로는 방울이나 북을 쳤던 것이다.
신에게 닿을 수 있는 음악이 통치를 위한 필수 요소였던 셈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즐겼던 예술 중에서 고고학이 주로 밝힐 수 있는 분야는 형상이나 형태로 남아 있는 것들이다.
고고미술사학처럼 고고학과 미술사를 같이 공부하는 분야가 많은 것이 그런 이치다.
음악은 고고학이 밝히기 가장 어려운 분야이다.
미술품과 달리 소리는 사라지기 때문이다(물론 미술품도 영원히 지속된다고 보장하기는 어렵지만).
과거의 음악은 녹음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음악이 없는 과거는 상상하기 힘들다.
과거의 예술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물관'이다.
원래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은 음악의 여신 '뮤즈 Muse'를 모시는 신전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뮤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서기전 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Greece의 시인 에시오도스 Hēsíodos(영어 Hesiod)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뿐 아니라 문예, 미술, 철학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 뮤즈를 위한 신전은 음악을 비롯하여 당시의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공간이었다.
즉, 뮤즈를 위한 의식에는 음악과 함께 당시에 제작된 최고의 예술품인 회화, 조각 등이 선보여지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가 봉헌되었다.
이 뮤즈의 신전은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뮤즈를 위한 신전이 지금의 대학이나 박물관과 비슷한 기능을 하게 된 것은 서기전 3세기였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ios(영어 Ptolemy)는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의 장관으로 지내다가 왕의 죽음과 함께 이집트 Egypt에 자신의 왕조를 개창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뮤제이온 museion'이라는 예술의 공간을 마련해 이곳에서 예술과 학문, 음악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 뮤제이온이 바로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졌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Library of Alexandria'도 프톨레마이오스가 건립한 뮤제이온의 일부였다.
이렇듯 고대의 예술과 역사, 나아가 박물관도 음악을 매개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주에서 시작된 고대의 실로폰
2006년 6월, 중국 랴오닝성(요령성辽宁省/遼寧省)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의 목적은 만주 일대를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기 위해 제시한 '요하문명론'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요하문명론이란 만주 서부를 흐르는 요하遼河(랴오허) 일대의 고대 문명이 이후 중원 문명의 일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때는 동북공정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역사 갈등이 정점을 찍던 무렵이었다.
동북공정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 정부가 발주한 역사 프로젝트로, 만주와 한반도 역사의 왜곡에 대해 남북한은 크게 반발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현재 중국 땅에 속했던 역사 속의 모든 나라들이 중국사의 일부라는 억지 주장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논리대로 고구려가 당나라의 속국이라면 당나라와 고구려의 그 치열한 전쟁이 한낱 내전에 불과하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사실에 주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당시 중국은 신석기시대에 거대한 제사터를 만든 요서遼西 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훙산문화)에 더 주목했다.
홍산문화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용 모양의 옥그릇(옥기玉器)가 발견되었다.
또한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 대신에 중원中原(중국의 중심부. 황하 유역이 넓은 평원이기 때문에 흔히 중국의 중심부를 지칭할 때 벌판이라는 뜻의 '중원'이라고 한다)에서 널리 쓰이는 칠무늬토기(채도彩陶: 그릇의 겉에 물감으로 무늬를 칠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홍산문화가 만주 지역이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전시회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실제 <요하문명전>에서는 홍산문화의 용 모양 옥그릇과 채도를 전시했고, 의도한 바대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정작 필자에게 큰 충격을 준 유물은 족히 1미터도 넘을 법한 구들장처럼 생긴 커다란 돌, 바로 석경石磬(돌경: 돌로 만든 일종의 실로폰과 같은 타악기. 일렬로 세워놓고 작은 망치로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이었다.
거대한 실로폰처럼 생긴 그 석경은 서기전 2000년에 랴오닝성 서부 일대에서 도시를 만들어 청동기시대를 열었던 샤자덴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의 집터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샤자덴문화란 서기전 2400~1700년 무렵 중국 요서 지역과 내몽골 동남부에 존재했던 수백 개의 도시들로 이루어진 문화로서 흔히 초기의 국가라고 간주한다.
이 문화의 이름은 처음 발견된 유적의 이름으로 문화를 명명한다는 고고학계의 통례를 따른 것으로, 적봉시赤峰市 근처 샤자덴이라는 유적에서 발견된 문화이기 때문에 이름 붙었다.
지층을 달리해서 밑의 층과 위의 층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발견되어, 밑의 층은 하층문화로 위의 층은 상층문화로 각각 이름 지어진 것이다.
얼핏 지나치기 쉬운 이 거대한 돌을 보고 놀란 이유는 세종의 일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인 1525년에 성현成俔이 지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화 전반에 대한 책인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절대음감을 지닌 세종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세종이 직접 명령하여 제작한 석경을 시범적으로 연주했고, 연주를 듣자마자 세종이 음률이 1분씩 높고 낮은 게 있다고 지적을 하여서 확인해보니 실제로 석경이 덜 깎였다고 적혀 있다.
세종의 이야기는 단순한 에피소드 episode가 아니었다.
실제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7년과 9년에는 경기도 남양에서 직접 석경의 석재를 구하여 시험했다고 한다.
또한 세종은 중국을 능가하는 질 좋은 돌을 얻기 위하여 사방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았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음률을 바로 안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고 조율하는 능력을 상징했다.
만약 세종이 샤자덴하층문화 시대부터 석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신하를 부지기수로 보내서 랴오닝성 일대에 석경의 재료가 있는지 살펴보았을 것이다.
실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성삼문을 요동에 살던 명나라의 음운학자 황찬에게 13차례나 보내어 조언을 구했을 정도로 철저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샤자덴하층문화에 남아 있는 석경은 한 점뿐이다.
그러니 그 석경은 궁중악기로 사용되는 석경처럼 여러 개의 돌을 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축제의 시작이나 끝을 알리는 일종의 종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망치로 치는 부분을 서로 달리하는 것만으로 다양한 음색과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테니, 당시 축제에서 이 석경의 역할은 꽤 컸을 것이다.
그날 저녁 생각 외의 소득을 자축했다.
랴오닝성 박물관이 있던 선양시(심양시沈阳市/瀋陽市)의 어느 골목에서 양꼬치에 술 한 잔을 기분 좋게 하면서 낮에 찍은 석경의 사진을 다시 보니 은은한 그 음악소리에 맞춰 제사를 지내던 옛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지금도 이 석경은 어떤 소리일까 궁금하다.
하지만 중국 학계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다.
○천상에 이르는 음악을 연주하다
차임벨 chime bell은 각각의 음색을 가진 여러 개의 종으로 이루어진, 영롱한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다.
원래 차임벨은 여러 개의 종을 줄로 당겨서 연주했다.
그런데 이렇게 종을 이용해서 음악에 사용한 건 서기전 2000년 유라시아에서 전차부대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빠르게 달리는 전차의 네 모서리에 달린 종이 긴장감 넘치는 소리로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처음 전차가 등장했을 당시에 그 공포와 위력은 매우 컸다.
빠른 속도로 공격을 하는 전차에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쟁에서 빠르게 울리는 방울소리만 들어도 적들은 겁에 질렸다.
약 3000년 전을 전후하여 전차로 전쟁을 하던 시대가 끝나게 되면서 전차는 전쟁무기가 아닌 하늘의 전령사나 지혜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전차를 타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나 고대 인도에서 지혜로 세계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전차의 바퀴로 표현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렇게 전차가 하늘과 땅을 잇는 소통의 도구로 바뀌면서 전차에 달린 방울도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일대에서는 샤먼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샤먼의 도구로서 청동방울을 본격적인 악기로 발달시킨 나라는 중국이었다.
1977~1978년에 발굴된 전국시대의 증후을묘曾侯乙墓[중국 후베이성(호북성湖北省)에서 발굴된 전국시대 증曾나라 '을乙'(서기전 477~433년)이라는 이름의 군주의 무덤]에서는 65개의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편종編鐘 serial bells이 발견되었다.
이 편종이라는 악기는 작은 망치로 때려서 소리를 내는데, 각각의 종에서도 때리는 위치에 따라서 조금씩 음색이 변한다.
서양에서 피아노가 사용되기 시작한 건 12세기가 지나서부터였다.
그런데 피아노와 음역이 비슷한 악기인 편종이 중국에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증후을묘의 무덤 안쪽 벽에 설치된 이 편종은, 요즘으로 말하면 무덤 속에 그랜드피아노 grand piano가 들어간 셈이다.
그런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은 건, 음악이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 영롱한 종소리가 천상으로 인도하는 신의 부름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입으로 타는 하프
2018년 <브리튼즈 갓 탤런트 Britain's Got Talent(BGT)>라는 프로그램에 시베리아 출신의 올레나 우우타이 Olena Uutai가 손바닥보다 작은 악기를 들고 등장했다.
심사위원과 청중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악기에 시큰둥했지만, 막상 올레나가 그 악기로 시베리아의 웅대한 자연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모두들 압도되었다.
러시아에서는 바르간 Vargan이라고 부르는 악기이다.
한국에서는 입으로 부는 하프라는 뜻으로, 구금口琴이라고 부른다.
바르간의 원리는 악기를 이빨 사이에 끼우고 철판을 튕기는 것이다.
입은 공명통 역할을 하니 입 모양을 다양하게 해서 그 소리의 울림을 조절한다.
한국에서는 이 악기를 본 사람은 물론이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유목민들에게서만 널리 유행했기 때문이다.
유럽으로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전래가 되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3500년 전의 무덤에서 구금이 출토되었다.'
201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 Vladivostok에 있는 고고민족학연구소에 자료를 조사하러 갔다.
친한 고고학자 니나 레센코 Nina Resenko[그녀는 나와 몇 해 동안 크라스키노 Kraskino(한러 국경 지역에 있는 마을. 19세기 말에는 고려인의 마을인 연추리가 있었다. 한중근 의사가 손가락을 잘라 피의 맹세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크라스키노 마을 근처에는 발해 시기의 성터가 있다)의 발해 유적을 발굴했다]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나를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머리핀처럼 생긴 손가락 크기의 철기 유물을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바로 바르간이예요. 발해 유적에서는 처음 나왔답니다."
내 첫마디는 "설마요. 잘못 보신 거 아니예요? 발해에서 바르간이 왜 나옵니까?"였다.
유라시아의 유목민을 대표하는 악기가 발해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선뜻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가운데 손으로 튕기는 철판은 부러져서 없어지만, 전체 형태로 볼 때 구금이 틀림없었다.
내 머릿속에 '투웅'하는 구금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새로운 연구의 시작이었다.
때마침 연해주의 발해 유적을 찾아보니 구금 외에도 초원 지역과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많은 자료가 있었다.
필자는 3년여에 걸쳐 연구했고 그 결과를 2017년에 발표했다.
그런데 구금은 유목문화를 대표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기원도 흉노와 같은 초원의 제국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2년도 안 되어서 내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음악고고학자 타다가와 레오와 정보를 교환하던 중 구금이 약 4000년 전 중국 북방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면 가장 이른 구금은 서기전 2000년의 샤자덴하층문화에서 이미 나왔다.
중국에서 가장 이른 석경이 나온 바로 그 유적이다.
샤자덴하층문화의 사람들은 거대한 성을 곳곳에 만들어 살면서 강을 따라 교역을 했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그들을 통합하는 다양한 제사와 의식이 발달했고, 그 과정에서 구금이 쓰인 것이다.
필자는 타다가와의 자료를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 주요 분야이기도 했고, 수시로 드나들며 자료를 조사했는데도 정작 구금이 있었다는 걸 놓쳤기 때문이다.
이 구금이 허리춤에 달린 수십 개의 유물 중에 소박하게 놓여 있었기 때문에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는 건 핑계일 수 있다.
어쩌면 여기에서는 구금이 나올 리 없다는 필자의 선입견이 더 큰 문제였을지 모른다.
구금이 초원의 악기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초원의 전사들 사이에서 구금이 퍼져 나가면서 무덤에 가져갈 정도로 널리 유행한 곳은 청동기시대의 만주 그리고 중국 북방 지역이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에서도 구금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한다.
샤자덴하층문화에서 석경과 함께 구금이 발견된 것은 초원과 농경의 접변 지대에 있었던 만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농경민과 초원의 음악을 잘 조화시켜서 그들만의 음악을 발달시켰다.
구금은 2000년 전의 흉노 제국 무덤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원 지역을 대표하는 악기로 자리매김했다.
초원의 악기가 된 구금이 이후 발해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그 의의는 크다.
발해의 음악이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서 유행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발해의 음악은 당시 일본과 중국에도 널리 퍼졌다.
발해의 사신이 전한 음악은 일본 도다이지(동대사東大寺: 일본 나라현奈良県에 있는 대표적인 일본의 절)에서 공연할 정도이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중국 송나라에서는 발해의 음악이 너무 유행해 이를 강제로 금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도대체 발해의 음악에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이렇게 주변 나라의 사람들을 매혹시켰을까 궁금하다.
구금이 등장한 것을 보니 발해는 초원, 중국 그리고 고구려의 여러 음악을 조화시켰던 건 아니었을까.
비록 과거의 음악은 복원하여 듣기 어렵지만, 그들이 이루었던 문화의 힘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고조선의 <공무도하가>와 하프의 기원
동양을 대표하는 발현악기撥絃樂器(현을 손가락이나 픽으로 뜯거나 방망이로 두들겨 연주하는 악기. 가야금, 거문고, 기타, 만돌린 따위)는 '금琴'의 일종인 가야금이다.
물론 역사에는 6세기 무렵에 대가야의 악사였던 우륵于勒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가야금과 같은 금은 훨씬 이전부터 쓰였다.
신라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나 고구려 벽화 등에서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우륵보다 약 600~700년이나 이른 시기인 삼한시대에 이미 가야금의 원형이 확인되었다.
가야금이 발견된 유적은 광주광역시 신창동 유적이다.
이 유적은 삼한시대의 거대한 마을과 그 주변 공동묘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마을 유적 근처에서 소택지沼澤地(늪과 연못으로 둘러싸인 습한 땅)가 발견되었다.
소택지의 경우 탄닌 tannin 성분 때문에 평소에는 잘 발견되지 않는 목제 유물도 잘 남아 있다.
그 덕택에 신창동에서는 수많은 목제 농기구와 생활도구가 발견되었다.
그중에는 반쪽만 남은 가야금도 있었다.
길이는 77.2센티미터로 요즘 쓰는 가야금보다는 많이 작은 편이고, 현은 6개만 남아 있지만 실제로는 12개 정도였을 것르오 추정된다.
이렇듯 가야금은 적어도 2000년의 역사를 두고 발달되어 온 한국을 대표하는 악기이다.
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 harp의 일종인 공후箜篌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藿里子高 ,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麗玉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는 1세기 때 채옹蔡邕의 ≪금조琴操≫에, 4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공무도하가>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건 역설적이게도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의 역할이 컸다.
한무제는 음악을 관장하는 악부를 설치해 사방의 노래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당시 악부의 노래 채록은 다양한 노래를 통해 군가를 제정하여 각지로 파견되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무도하가>는 서글픈 사랑의 노래로, 가족들을 고향에 두고 떠난 군인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공무도하가>의 또 다른 이름인 '공후인箜篌引', 즉 '공후로 타는 가락'이라는 뜻이다.
공후는 서역을 통해 들어온 하프를 의미한다.
한반도 최초의 노래인 <공무도하가>는 바로 하프로 연주되던 노래였다.
고구려에서도 이 공후가 유행했다는 정사기록이 있으니, 이미 고조선 시대에 서역을 통해서 악기가 들어왔다는 점은 너무나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중원에서 공후가 본격적으로 연주되기 시작한 건 후한대 때이다.
물론 변방에서는 더욱 일찍 쓰였겠지만 적어도 금琴이 유행했기 때문에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하프인 공후는 어디에서 온 것이기에 중원보다 빠른 걸까.
사실 너무 이른 시기에 공후가 등장했기 때문에 음악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세워서 타는 공후가 아니라 가야금처럼 무릎 위에 놓고 줄을 뜯는 일종의 치터(지터) zither(평평한 공명 상자 위에 30~45개의 현이 달려 있는 현악기로서,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에 낀 픽과 다른 손가락으로 현을 튕겨 연주)와 같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치터처럼 눕혀 놓고 연주하는 와공후臥箜篌는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7세기 때의 역사서 ≪수서隋書≫에 처음 등장하고 당나라 때에 널리 유행한다.
즉, <공무도하가>가 등장하고 적어도 700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것이다.
<공무도하가>가 등장했던 시기인 한나라 때에는 세워서 타는 하프와 같은 형태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당나라 때에 쓰인 ≪통전通典≫에 한나라 영제가 공후를 좋아했는데, 세워서 타는 하프와 같은 형태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공무도하가>의 공후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프와 같은 형태의 악기를 말하는 것이다.
<공무도하가>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공후인'이라는 이름도 같이 나오는 것은, 바로 공후라고 하는 서역의 악기로 연주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후는 어떤 경로로 고조선에 유입되었을까?
고고학 자료를 보면 이미 3000~2500년 전에 알타이 파지릭 Pazyryk 지역과 중국 신장 지역의 실크로드 일대에서 공후의 원형인 하프가 널리 유행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하프(공후)는 알타이를 대표하는 유목문화인 파지릭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실제로 실크로드의 건조한 기후 덕에 이 지역의 3000~2000년 전 무덤에서는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 하프가 종종 발견된다.
중국 신장 지역에서 필자가 직접 확인한 하프는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Taklamakan Desert의 북쪽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인 선선양하이(손손양해孫孫楊海)와 수바시(소파사蘇巴斯)에서 각각 출토된 것이 있다.
알타이 파지릭 지역에서는 5개의 왕족급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그중 세 개의 무덤에서 하프 형태의 현악기가 발견되었다.
이 악기는 무덤 주인의 시신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이 파지릭과 서역의 하프는 모두 L자형이며, 페르시아 Persia에서 유행했던 손 위에 얹고 타는 일종의 소공후에 해당한다.
L자의 밑부분에는 공명통이 달려 있다.
이 하프의 발견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바로 왕이 직접 연주하며 즐길 정도로 하프의 연주가 널리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왕족뿐 아니라 일반인도 널리 사용했다.
이 하프들은 손에 들고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고, 나무를 조합해서 만든 것이라 제작과 수리가 쉬웠다.
이 하프가 발견된 무덤들은 다른 일반 무덤과 큰 차이가 없는 것들이었다.
요즘에도 취미로 악기 연주하는 사람이 있듯이 그들도 취미로 하프를 즐기지 않았을까.
예로부터 사막의 오아시스에 만들어진 도시들에는 여행에 지친 카라반 caravane(대상隊商)들을 위한 다양한 노래와 춤이 발달했다고 했으니까.
알타이와 실크로드 하프들의 형태는 근동의 아시리아 제국 Assyrian Empire에서 연주했던 것과 거의 비슷하며, 근동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아시리아는 물론 이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Achaemenid Dynasty에도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유목민인 스키타이인 Scythians와 사카인 Sakas들이 왕래했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고대 근동의 여러 악기 중에서 유독 하프가 실크로드를 통해 동쪽으로 전파된 이유는 바로 기마생활을 하는 유목민들도 쉽게 휴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활과 화살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기마인들에게 하프는 다른 악기에 비해 친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프는 언제 동아시아로 유입되었을까?
서기전 4세기 무렵 당시 실크로드 및 알타이 지역과 중국의 교류관계는 꽤 활발했다.
파지릭 고분에서는 중국제 거울과 칠기가 나왔으며, 그들이 사용한 마구에도 중국에서 들여온 옻칠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진시황이 무서워하던 바로 그 흉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 북방으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중국이 공후를 도입하던 시기 바로 직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다.
당시 밀려오는 문화의 파도에서 음악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서역의 하프는 아름다운 음색과 휴대하기도 간편했으니 사방으로 퍼졌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왜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아시아 각지로 퍼진 공후가 중국이 아니라 고조선에서 가장 먼저 노래로 등장했는가이다.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중앙아시아와 달리 유기물질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 공후의 실물자료는 전혀 없다.
다만 고조선을 둘러싼 다른 지역과의 관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은 앉아서 타는 금琴이 발달했고, 공후는 기마생활에 익숙한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러니 고조선에서 유독 공후가 발달했다면 중국보다는 초원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서 직접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유목민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중국의 만리장성 지대에서 널리 흥했던 흉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쪽 어깨라고 할 정도로 흉노와 고조선은 서로 통했다.
또한 서기전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했던 유목민족들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만리장성을 따라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고조선과 맞닿았다.
이러한 고조선과 초원 지역과의 연관성은 황금, 철제 무기와 마구에 잘 남아 있다.
중원을 거치지 않고 고조선이 직접 중앙아시아 초원 지역의 유목문화로부터 공후를 수입했을 가능성이 더 큰 건 이 때문이다.
초원 지역과 많은 교류를 했던 발해 정효공주의 무덤 벽화에도 휴대용 공후가 그려져 있다.
이렇듯 고조선 이후에도 우리의 고대사에는 공후로 대표되는 초원의 음악은 계속 연주되었던 것 같다.
<공무도하가>는 이처럼 서역의 음악과 이어졌던 2000년 전의 교류를 반증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음악은 너무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도시에서는 음악이 끊기는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의 소중함에 대해 잘 깨닫고 있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오래 전, 지금 같은 플레이어가 없는 과거인들에게 음악은 오로지 생음악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값비싼 경험이었고, 평생을 두고 간직할 소리의 향연이었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강렬히 울리는 만큼이나 순간으로 사라져버린다.
과거 사람들의 음악을 지금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귓전에 울리는 지금의 음악이 영원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어느 누가 그걸 확신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 귓가에 어떤 음악이 들려오고 있다면,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음악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어떤 음악인지 필자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답고 소중한 음악일 게 틀림없으니까.
이 세계에서 단 하나뿐이며,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4. 9. 8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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