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조각, 건축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조각, 건축

새샘 2024. 9. 11. 16:46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학자와 예술가
페트라르카 Petrarca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Leon Battista Alberti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니콜로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티치아노 Tiziano
라파엘로 Raffaello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304~1374년
         1404~1472년
         1463~1494년
         1469~1527년
         1452~1519
         1490무렵~1576년
         1483~1520년
         1475~1564년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수많은 지적·문화적 진보를 이룩했지만, 가장 영속적인 업적으로 남은 것은 단연 예술 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회화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우리는 이미 1300년 무렵의 천재 화가 조토 Giotto di Bondone(1267~1337)의 예술적 천재성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미술이 활짝 꽃을 피운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이유는 15세기 초 선원근법線遠近法이 발견되어 온전한 삼차원 화상을 표현하는데 처음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5세기의 미술가들은 명암법을 시도했고 최초로 인체 해부학과 신체 비례를 면밀하게 연구했다.

15세기에 사유재산이 늘어나고 평신도의 후원이 늘어나면서 예술은 비종교적인 다양한 주제들을 대폭 수용했다.

이제는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 경우에도 비종교적인 주제가 뒤섞이는 경우가 빈번했다.

화가들은 영혼의 감추어진 신비를 드러내는 초상화를 그리고자 했다.

지성에 호소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와 더불어 현란한 색채와 아름다운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그림이 나란히 등장했다.

플랑드르 Flanders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유화油畵 oil painting는 15세기를 특징짓는 기법이었다.
이 새로운 기법의 사용은 의심한 나위 없이 그 시대의 예술적 진보와 관련이 있었다.

유화 물감은 프레스코 fresco 안료인 수용성 그림 물감과는 달리 쉽게 마르지 않았으므로 화가들은 천천히 작업할 수 있었고, 시간 여유를 갖고 그림의 어려운 부분을 완성할 수 있었으며, 작업 도중 필요하다면 그림을 수정할 수도 있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미술

 

15세기의 위대한 화가들은 대부분 피렌체인 Florentine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인물은 동시대인에게 '조토의 환생'으로 알려졌던 조숙한 천재 마사초 Masaccio(1401~1428)였다.

비록 27세에 죽고 말았지만 마사초는 사후 100년 동안이나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마사초가 지닌 화가로서의 위대성은 그가 르네상스 미술의 으뜸가는 특징이었던 '자연의 모방'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자연을 모방하기 위해 원근법을 채택했는데, 그 기법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작품은 프레스코화 <삼위 일체>였다.

또한 그는 독창적인 명암법을 사용해 놀랍도록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동방박사의 경배'(1475)에 그려진 자화상(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B%93%9C%EB%A1%9C_%EB%B3%B4%ED%8B%B0%EC%B2%BC%EB%A6%AC)


마사초의 가장 잘 알려진 계승자는 피렌체인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1445~1510)로서, 그는 고전적 주제와 그리스도교적 주제를 표현했다.

보티첼리의 작품은 자연의 세부에 대한 선적線的인 리듬과 감각적 묘사에서 탁월하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고전 신화의 등장인물을 그린 그림들로 유명하다.

그가 <봄의 우화>와 <비너스의 탄생>에서 채택한 기법은, 자연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움직이는 선들, 여신들, 산들바람, 뮤즈 Muse(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예술을 관장하는 9명의 여신) 등에 대한 로마식 묘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한때 이 작품들은 르네상스 이교주의의 표현이자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에 단호히 등을 돌린 세속적 쾌락의 찬미로 이해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작품들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는 알레고리 allegory(풍유諷喩: 은유적으로 총체적인 의미를 전하는 예술 표현 방식)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피치노 Ficino의 신플라톤주의 이론―고대의 신과 여신들이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미덕을 표현한다고 간주했다―에 정통한 학식 있는 귀족 관객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너스 Venus는 순결한 사랑을 의미했다.

보티첼리의 위대한 '고전적' 작품들이 난해하긴 하지만,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첫째, 모든 관객이 그의 작품들을 자연스런 감각적 차원에서 즐길 수 있었다.

둘째, 보티첼리는 그리스도교와 결별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로마에서 교황을 위해 프레스코화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초상(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B%A0%88%EC%98%A4%EB%82%98%EB%A5%B4%EB%8F%84%20%EB%8B%A4%20%EB%B9%88%EC%B9%98)

 

피렌체의 예술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일 것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천재 중 한사람이다.

레오나르도는 말 그대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그는 화가이자 건축가였으며 음악가이자 수학자였고 공학자이자 발명가였다.

공증인과 처녀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는 25세 되던 해 피렌체에 공방을 차리고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 Lorenzo il Magnifico(il Magnifico는 '위대한 자'라는 뜻)라고 불리던 피렌체의 지배자 로렌초 데 메디치 Lorenzo de' Medici의 후원을 얻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에게도 인간적 약점이 있었으니 그는 작업속도가 느리고 무슨 작업이든 쉽게 끝맺질 못했다.

이런 점은 로렌초를 비롯한 피렌체 후원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술가란 기술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여서 일정한 크기의 작품을 일정한 가격에 주문받아 정해진 기간 안에 납품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러한 통념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자신을 미천한 수공업자가 아니라 영감을 받은 창조적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1482년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 Milano의 스포르차 가문 Sforza family 궁정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한층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하면서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499년 프랑스가 밀라노를 침입하던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 후 그는 이탈리아를 방랑하다가 마침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François I의 후원을 받았고 그의 후원 아래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으로 이탈리아에는 이른바 '르네상스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화법은 자연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모방하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마치 자연주의자처럼 풀잎, 새의 날개, 폭포수 물줄기 등을 세심하게 관찰해서 그렸다.

그는 인체 해부를 위해 사람의 시체를 입수해 지극히 세밀한 해부도를 그렸고, 이렇게 해서 얻은 해부학 지식을 그림에 응용했다.

레오나르도는 자연을 숭배했으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신성이 깃들어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가 채식주의자인데다, 시장에서 새장에 갇힌 새를 사서 풀어주곤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오나르도의 걸작으로 <암굴의 성모>(같은 주제로 그린 두 개의 작품이 있다)와 <최후의 만찬>, 그리고 <모나리자 Mona Lisa>와 <지네브라 데 벤치 Ginevra de' Bench> 등의 초상화를 꼽는다.

<암굴의 성모>는 그의 놀라운 회화 기법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정열, 그리고 우주가 잘 질서 잡힌 곳이라는 그의 믿음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인물은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그려졌고 모든 바위와 식물은 대단히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lle Grazie의 식당 벽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심리적 반응에 대한 연구이다.

자신에게 닥칠 참혹한 운명에 순종하며 평정을 견지하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화가인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예수가 한 말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제자들의 얼굴에 감도는 놀라움, 두려움, 죄의식 등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레오나르도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걸작인 <모나리자>와 <지네브라 데 벤치>는 인간 내면의 다양한 분위기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베네치아 화파

 

1490년 무렵에 시작된 르네상스 전성기에 이른바 베네치아 화파 Venetian painting가 등장했는데, 조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1430 무렵~1516), 조르조네 Giorgione(1478~1510), 티치아노 Tiziano(1490 무렵~1576)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번영하던 상업도시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의 사치스럽고 쾌락 지향적인 삶을 표현했다.

베네치아 화가 대부분은 피렌체 화파가 관심 갖고 있었던 철학적·심리적 주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목가적인 풍경과 부자나 권력자의 화려한 초상화를 그림으로써 감각에 호소하고자 했다.

그들은 형식과 의미를 색채와 우아함에 종속시킴으로써 그림의 주인공인 부유한 상인들의 화려한 취향을 드러냈다.

 

 

○로마의 회화

 

르네상스 전성기의 회화는 16세기 전반에 절정에 달했다.

비록 피렌체 화파의 전통이 아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는 있었지만 이 시기에 로마 Roma(영어 Rome)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요한 예술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라파엘로

 

라파엘로 초상(사진 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B%9D%BC%ED%8C%8C%EC%97%98%EB%A1%9C%20%EC%82%B0%EC%B9%98%EC%98%A4)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우르비노 Urbino 출신인 라파엘로 Raffaello(1483~1520)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아마도 르네상스 전 시기를 통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오래도록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인간 존재를 온화하고 현명하고 존엄한 존재로 기품 있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비록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라파엘로는 한층 더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화법을 구현했다.
그의 <토론>은 천상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지상의 신학자들은 찬란한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서 성찬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고 있고, 구름 위에서는 성인들과 성삼위聖三位(성부聖父, 성자 聖子, 성령聖靈)가 거룩한 신비 속에서 쉬고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원>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조화를 표현한 것이다.

플라톤 Platon(레오나르도의 모습으로 그렸다)은 하늘을 가리키며 이데아 Idea(이념理念) 세계의 정신적 원리를 강조하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한 팔을 앞으로 뻗으며 피조 세계가 이러한 원리를 물리적 형태로 구체화하고 있느라고 설명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수많은 초상화나 마돈나 Madonna(성모聖母 마리아 Maria, 산타 마리아 Santa Maria)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마돈나에 대한 묘사에서 그는 감미롭고도 경건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을 불어넣었는데, 이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돈나에서 풍기는 수수께끼 같고 초연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초상(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BC%88%EB%9E%80%EC%A0%A4%EB%A1%9C_%EB%B6%80%EC%98%A4%EB%82%98%EB%A1%9C%ED%8B%B0)

 

르네상스 전성기의 마지막 위대한 인물은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Michelangelo(1475~1564)였다.

레오나르도가 자연주의자라면 미켈란젤로는 이상주의자였다.

레오나르도가 덧없는 자연 현상을 포착하여 해석하는데 주력한 반면,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인 미켈란젤로는 영속적이고도 추상적인 진리를 표현하는데 더 큰 관심을 두었다.

미켈란젤로는 화가이자 조각가였고 건축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이 모든 분야에서 동일한 능력과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은 그 중심에 남성이 있고 그 남성은 언제나 강력하고 거대하고 웅장
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에 (남성의 육체 안에 구현된) 휴머니티 humanity(인간애人間愛 즉 인간에 대한 사랑)가 놓여 있다고 한다면, 끊임없이 남성을 그린 미켈란젤로야말로 최고의 르네상스 예술가였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미술 작품들은 한 장소―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 Cappella Sistina(영어 Sistine Chapel)―에 모여 있지만, 이들 작품은 그의 생애의 다른 두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상이한 두 가지 예술 양식과 서로 다른 두 가지 인간관을 보여준다.

둘 중 더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서 1512년까지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창세기의 장면을 그린 장엄한 프레스코화이다.

<빛과 어둠을 가르는 신>, <아담의 창조>, <홍수> 등을 포함한 이 연작 그림은 조화, 위엄, 절제를 중시하는 고전 그리스의 심미적 원칙을 이 젊은 예술가가 얼마나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그림에는 창조의 위대성과 인간의 영웅적인 면모가 장엄하게 배어 나온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가량 지난 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예술 양식과 화풍은 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최후의 심판>은 1536년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 벽면에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 fresco데, 이 그림에서 미켈란젤로는 고전적인 절제를 거부하고 긴장과 일그러짐을 강조했는데 이는 두려움과 죄의식에 찌든 늙은 예술가의 염세적 인간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조각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조각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조각가들은 더 이상 교회 건축물의 기둥과 출입구에 장식물이나 묘지의 석상을 조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 이래 처음으로 '어느 각도에서나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조각상을 새겼다.

조각을 건축물에 종속된 지위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르네상스 전성기는 조각을 하나의 독자적이고도 세속적인 예술 형식으로 재확립했다.

 

 

●도나텔로

 

르네상스 최초의 위대한 조각가는 도나텔로 Donatello(1386무렵~1466)였다.

죽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승리한 모습으로 서 있는 <다윗(다비드) David> 청동상은 고대 이래 처음 등장한 누드 입상으로, 누드를 표현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한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 조각의 모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윗>은 그리스의 운동선수처럼 근육미 넘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나긋나긋한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다.

만년의 도나텔로는 전사 가타멜라 Gattamelata의 위풍당당한 모습―고대 로마 이후 서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진 기마 청동상―을 표현하면서 고대의 조각 양식을 더욱 충실하게 모방했다.

 

 

●미켈란젤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 아니 역사상 최고의 조각가는 누가 뭐래도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를 영감 받은 창조자라고 믿었던 미켈란젤로는 조각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라고 간주했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조각을 통해 인간의 형상을 재창조함으로써 가장 완벽하게 신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의 견해에 따르면, 신에 가장 근접한 조각가는 모방적인 자연주의를 혐오한다.

사람 모습의 석고상을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오직 영감에 찬 창조적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상상력에 자연주의를 종속시켰고 자신이 추구한 이상을 매혹적 형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회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고전주의에서 매너리즘 mannerism(1520년대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후기에서 시작해서 1600년대 바로크가 시작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지적이면서, 자연적인 것과 반대되는 인공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으로, 즉 균형 잡힌 모습에서 극적인 왜곡으로의 경로를 밟았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초기 작품인 <다윗>은 그의 나이 불과 26세 때인 1501년에 제작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완벽한 고전적 조각상이다.

미켈란젤로는 도나텔로와 마찬가지로 남성 누드 조각상을 제작했지만, 다윗을 피렌체의 시민적 이상의 공적인 표상으로, 즉 우아한 모습보다는 영웅적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대리석―'가장 고귀한' 조각 매체―으로 작업을 했고 실물보다 두 배나 큰 조각상을 만들었다.

육체적 조화의 절정에 이른 고요하고 확신에 찬 한 청년을 조각함으로써 미켈란젤로는 폭군에 저항해 시민적 정의의 이상을 견지한 피렌체 공화국의 불굴의 용기를 찬양했다.
<다윗>에 표현된 이러한 평온함은 미켈란젤로의 중기 작품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1515년에 제작된 <모세 Mosè>에서 미켈란젤로는 격렬한 감정―이 경우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의 도덕적 분노―의 효과를 내기 위해 해부학적 왜곡의 기법을 탐색했다.

그의 조각들은 두렵고도 영웅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생애 말년에 접어들어 미켈란젤로는 우울한 고뇌 또는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장된 매너리즘을 점점 더 많이 시도했다.

미켈란젤로 조각의 이런 경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미완성으로 그쳤지만 격한 감동을 주는 <십자가에서의 내림>이다.

이 작품은 조각가를 닮은 늙은 남자가 죽은 예수의 뒤틀리고 구부정한 시신을 바라보며 비통해 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건축

 

르네상스의 건축은 조각이나 회화보다 훨씬 더 과거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건축 양식은 중세적 요소와 고대적 요소의 합성물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은, 이탈리아에 뿌리 내린 적 없는 고딕 Gothic 양식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Romanesque 양식이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에 중세적 기초를 제공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들은 대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 건축 설계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그들은 이들 교회가 중세가 아닌 로마 시대 건물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고대 로마의 폐허에서 건물 장식물을 베꼈다.

그리하여 좌우 익부(건물 돌출 부분)와 본당의 십자형 바닥 평면에 바탕을 두되, 부속 장식물로 기둥과 아치 arch(곡선형 구조물) 또는 기둥과 상인방上引枋(문 위나 창 위로 가로지르는 나무), 주랑柱廊(수평의 들보를 지른 줄기둥이 있는 회랑), 돔 dome(반구형 지붕)을 사용한 건축물이 등장했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기하학적 비례를 강조했는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특정의 수학적 비율이 우주의 조화를 반영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건축의 가장 좋은 예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바실리카 예배당 Basilica di San Pietro(영어 St. Peter's Basilica)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 Pope Julius II와 레오 10세 Leo X의 후원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도나토 브라만테 Donato d' Aguolo Bramante(1444~1514)와 미켈란젤로 같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조각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Andrea Palladio(1508~1580)가 건축한 예술적 균형감을 갖춘 귀족의 시골 별장도 인상적이다.

팔라디오는 로마의 판테온 Pantheon 같은 고대 신전 양식을 활용해 세속화된 축소판 건물을 지어 그 안에 사는 귀족의 영광을 더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9. 1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