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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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퇴

새샘 2024. 9. 21. 17:45

1494년 무렵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교황령 국가, 나폴리 왕국의 5대 강국으로 분할(출처-출처자료1)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르네상스는 1550년 무렵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쇠퇴의 원인은 여러가지다.

1494년 프랑스의 침입과 그 후에 계속된 전쟁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프랑스 왕 샤를 8세 Charles VIII(재위 1483~1498)는 이탈리아를 자기 왕조의 팽창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탐스러운 먹잇감으로 생각했다.

그는 1494년 3만 명의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Alps를 넘어와 밀라노 공국 Ducato di Milano(영어 Duchy of Milan)과 나폴리 왕국 Regno di Napoli(영어 Kingdom of Naples)을 압박했다.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는 금세 항복했고,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를 행진해 1년도 되지 않아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자국 영토인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yli)에 대한 프랑스의 공격을 두려워한 에스파냐 España(영어 Spain) 지배자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에스파냐는 교황령 국가, 신성로마제국,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등과 동맹을 결성해 마침내 샤를 8세를 퇴각시켰다.

그러나 휴지기는 짧았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은 루이 12세 Louis XII(재위 1498~1515)는 두 번째 침공에 나섰고, 1499년부터 1529년까지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동맹 세력과 반동맹 세력이 잇달아 어지럽게 등장했지만 그들 사이에는 적대감만 깊어질 뿐이었다.

프랑스군은 1515년 마리냐뇨 Marignano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1525년 파비아 Pavia에서 에스파냐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가장 끔찍한 재앙은 1527년 에스파냐 지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 Karl V(1530~1556)재위 지휘 아래 미치광이 군대가 로마 Roma(영어 Rome) 시를 약탈해 어마어마한 파괴를 자행한 일이었다.

1529년에 이르러 카를 5세가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고 전쟁은 일시 중단되었다.

일단 승리를 거둔 카를 5세는 이탈리아의 가장 큰 두 영토―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를 에스파냐 몫으로 확보했고, 베네치아와 교황령 국가를 제외한 이탈리아 거의 모든 지역에 자기가 선호하는 군주를 앉혔다.

에스파냐 왕의 피보호자들은 종전과 다름없이 궁정의 주인 노릇을 하고 예술을 후원했으며 그들의 도시를 호화로운 건물로 치장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외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신민에게 활기찬 문화적 독립성을 고취시킬 수도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재앙에 경제적 쇠퇴가 더해졌다.
이탈리아는 15세기에 아시아와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요한 경제적 밑거름 중 하나였다.

그러나 1500년 전후의 지리상 발견으로 통상로가 지중해에서 대서양 지역으로 서서히 옮겨감에 따라 이탈리아는 유럽 무역 중심지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빼앗겼다.

에스파냐가 밀라노와 나폴리의 재정을 고갈시킨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전쟁 또한 이탈리아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탈리아의 번영이 기울자 예술을 후원할 여유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쇠퇴의 마지막 원인은 반종교개혁 Counter-Reformation이었다.

16세기에 로마 교회는 세속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종교개혁으로 성립한 기독교 교파들의 중심 사상)의 확산을 막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사상과 예술에 대한 통제의 고비를 바짝 조였다.

1542년 로마에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고, 1564년에 최초의 금서 목록을 발표했다.

심지어 시스티나 예배당 Cappella Sistina(영어 Sistine Chapel)에 있는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의 걸작 <최후의 심판>도 벌거벗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고, 교황 파울루스(바오로) 4세 Paulus PP. IV(영어  Pope Paul IV )는 삼류 화가를 시켜 가능한 모든 곳에 옷을 그려 넣도록 했다(그 후 이 운 없는 화가는 '속옷 만드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어처구니없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교리적 통일성을 강제하려는 교회 검열관의 결의는 대단한 것이어서 혐의자를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 철학자 지오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는 (창세기의 기사와는 달리) 지구가 하나 이상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1600년 로마 종교재판소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지적 사고에 대한 종교재판소의 검열 중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은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이 Galileo Galilei에게 가해진 징계였다.

1616년 로마의 교리성성敎理 Holy Office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새로운 천문학 이론을 '어리석고 터무니없으며 철학적으로 거짓된 이단'이라고 정죄했다.

1632년 갈릴레이가 태양 중심설을 옹호하는 탁월한 논문을 발표하자 종신 자택연금형을 내렸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죽고 싶지는 않았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나오면서 갈릴레이는 "그래도 지구는 움직이는걸!"이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다음 세대의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이 이탈리아가 아닌 북유럽에서 이루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탈리아에서 문화적·예술적 업적이 소멸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인상적인 새로운 예술 양식이 1540년에서 1600년 사이에 등장했는데, 이 양식은 라파엘로 Raffaello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의 특징을 모방한 화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17세기에는 교회의 후원 아래 로마에서 현란한 바로크 건축 양식 Baroque architecture style이 탄생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음악은 16세기에서 20세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문화가 이탈리이에서 유럽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이탈리아의 문화적 우위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유럽 고급문화의 중심은 에스파냐,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폴란드 등의 궁정으로 옮아갔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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