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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람 전기 "계산포무도"

새샘 2024. 10. 1. 23:58

"무정한 흙덩이도 이분의 손가락은 썩히지 못하리"

 

전기, 계산포무도, 19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 24.5x41.5cm, 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천재가 모두 대가인 것은 아니지만 그림에 남다른 천재성을 보인 화가는 분명 따로 있다.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 당세부터 천재로 불렸다.

우봉 조희룡은 고람에 대해 말하기를 "그림은 스승에게 배운 바가 없는데 문인화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시는 세속을 훌쩍 뛰어넘는 빼어남이 있다"고람의 시화는 당세에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전후 100년을 두고 논할 만하다고 했다.

 

고람 전기는 중인 출신으로 처음엔 호를 두당杜堂이라 하였다.

약포藥舖(약방藥房: 약사 없이 면허만으로 약을 파는 가게)를 경영하면서 서화 매매의 중개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약포가 있던 이초당二草堂은 중인 서화가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화가 중에는 대여섯 살 위인 북산 김수철, 다섯 살 아래인 형당 유재소와 금란지교金蘭之交(금란지계金蘭之契: 친구 사이의 매우 두터운 정)로 일컬어질 만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유재소와는 합작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초당이라는 호를 공유할 정도였다.

 

고람은 초산 유최진이 이끄는 여항문인 모임인 벽오사에 참여하면서 교류의 범위를 넓혀갔다.

조희룡, 오경석, 나기 등 중인 문사들과 만났으며, 특히 유최진과 조희룡은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람이 25살 때인 1849년 여름에 열린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모임이 그의 서화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그해 늦여름, 우봉 조희룡은 젊은 서화가 열네 명을 모아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추사 김정희에게 평을 받는 자리를 마련했다.

추사는 이들을 마치 서화의 전선戰線에 출전한 병사들처럼 묵진墨鎭(서예가 조) 여덟 명, 화루畵壘(화가 조) 여덟 명으로 편성하여 각각 사흘씩 세 차례에 걸쳐 제시된 과제를 제출하게 하고 여기에 평을 내렸다.

실로 한국회화사에서 보기 드문 장대한 서화 경진 대회였다.

 

화루 여덟 명은 소치 허련, 고람 전기, 북산 김수철, 희원 이한철, 혜산 유숙, 하석 박인석, 자산 조중묵, 형당 유재소 등이었으며 6월 28일, 7월 7일, 7월 14일 사흘간 열렸다.

묵진은 6월 24일, 6월 27일, 7월 9일에 열렸다.

고람 전기와 형당 유재소는 화루에 묵진 모두에 출전하였다.

추사는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하였고 이들의 작품을 성심껏 평하였다.

이때 고람의 그림에 대해 추사는 이렇게 평했다.

 

"쓸쓸하고 간략하고 담박하여 자못 원나라 문인화가의 풍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갈필 쓰기를 좋아하는 이는 중국 최초의 석도와 운수평만 한 분이 없으니 이 두 사람을 따라서 배우면 가히 문인화의 정수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요, 한갓 그 껍데기만 취한다면 누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가."

 

추사는 고람의 글씨에 대해서도 최상등의 점수를 주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유자재하면서도 정밀하고 세미細微하니(매우 가늘고 작으니) 이는 다만 글씨의 절묘한 법일 뿐만 아니라 글씨 쓰는 사람이 더욱 깊이 착안해야 할 것이다. ····· 그런데 이 글씨는 걸음걸이가 좋아서 완급 조절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고람은 추사의 모든 평을 받아 적어 간직했다.

그리고 창작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광주리 속에서 이 쪽지를 찾아내어 옮겨 써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서화비평서 ≪예림갑을록≫이다.

고람은 이 기록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번 읽어보니 말은 간략한데 뜻은 원대하여 경계하고 가르침이 정성스럽고도 정성스러워 잘하는 자는 더욱 정신 차려 정진하게 하고, 잘못하는 자는 두려워하여 고치게 하였다."

 

추사는 고람에 대한 기대가 커서 자신보다 더 나은 예술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청출어람靑出於藍에서 글을 따 '고람古藍'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고람의 서화는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고람이 전형적인 문인화풍으로 그린 <천광운영도泉光雲影圖>와 <계산적적도溪山寂寂圖> 등은 부드러운 필법과 담담한 먹빛으로 해맑은 느낌을 자아내어 조선 말기의 문인화풍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꼽힌다,

 

역매 오경석에게 드린다는 관기款記(낙관落款)가 들어 있는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아담한 소품으로 여백 없이 하늘까지 먹으로 칠하여 자못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점점이 흰 매화꽃을 화면 가득 메워 밝은 기상이 일어난다.

 

고람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바로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다.

간결한 구도에 스스럼없이 속사速寫(빨리 그림)하여 단 몇 분 만에 그려낸 것 같은 작품이지만 사의寫意(그림에 담긴 뜻)가 역력하여 선미禪味(참선의 오묘한 맛)조차 감돈다.

나이 스물다섯에 그렸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화제 글씨를 보면 오래 사용하여 붓끝이 갈라지는 독필禿筆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그림은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흉내 내어본들 객기가 드러나 추하게 되고 만다.

과연 고람의 천재성이 담긴 작품이다.

 

불행하게도 고람은 1854년, 나이 서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많은 동료들이 천재의 요절을 안타까워했다.

우봉 조희룡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사哀詞를 쓰면서 이렇게 통곡했다.

 

"아, 슬프다. 일흔 먹은 노인이 서른 살 청년의 일에 대해 쓰기를 마치 옛 친구 대하듯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차마 할 노릇이냐."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조시弔詩를 마무리하였다.

 

"흙덩이가 아무리 무정한 물건이라지만

과연 이 사람의 열 손가락을 썩힐 수 있겠는가."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0.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