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5: 북유럽 르네상스 및 12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2장 르네상스 문명, 1350년~1550년 5: 북유럽 르네상스 및 12장 결론
새샘 2024. 10. 3. 14:27북유럽 르네상스의 학자와 예술가 | |
에라스무스 Erasmus 토마스 모어 Thomas More 울리히 폰 후텐 Ulrich von Hutten 에드먼드 스펜서 Edmund Spenser 프랑수아 라블레 François Rabelais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
1469?~1536년 1478~1535년 1488~1523년 1552?~1599년 1494?~1553년 1471~1528년 1497~1543년 |
이탈리아 Italia와 북유럽 Northern Europe[중세 르네상스 시기의 북유럽은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탈리아 즉 알프스 Alps 산맥 북쪽 유럽을 말하며, 프랑스 France, 독일 Germany, 잉글랜드 England, 베네룩스 Benelux 3국(벨기에 Belgium, 네덜란드 Netherlands, 룩셈부르크 Luxembourg), 폴란드 Poland 등]의 접촉은 14·15세기 전 시기를 통해 지속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온 대학생들이 볼로냐 Bologna나 파도바 Padova( 영어: 파두아 Padua) 같은 이탈리아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또한 (잉글랜드의 제프리 초서 Geoffrey Chaucer를 비롯한) 저술가들은 이탈리아를 오고갔으며, 북유럽 병사들은 이탈리이에서 치러진 전쟁에 빈번히 참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적 흐름이 에스파냐 España와 북유럽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의 일이었다.
이렇듯 북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지체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중세 말기 북유럽의 지적 생활은 파리 대학 Université de Paris,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 카를로바 대학 Univerzita Karlova(영어: 샤를 대학Charles University)(체코 Czech 프라하 Prague) 같은 대학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 대학의 교육 과정(커리큘럼 curriculum)은 논리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북유럽 대학들의 접근방식은 고전 문헌 연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의 대학들은 법학, 의학을 위한 전문 교육기관인 경우가 많았고, 지적 생활에 대한 영향력이 훨씬 적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는 좀 더 세속적이고 도시 지향적인 교육 전통이 형성되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르네상스 휴머니즘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에 감화 받은 16세기 북유럽 학자들도 통상 대학 제도권 밖에서 군주의 후원 아래 활동했다.)
또한 16세기 이전의 북유럽 지배자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군주들에 비해 예술가와 지식인을 후원하는데 관심을 덜 보였다.
이탈리아에서 그와 같은 후원활동은 정치적 라이벌들 사이에서 중요한 경쟁 영역이었다.
북유럽은 정치적 단위가 컸고 정치적 경쟁도 적었다.
그러므로 군주국가는 도시국가에 비해 예술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웠다.
이를테면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의 중앙광장에 세워진 조각상은 거의 모든 소시민이 볼 수 있었지만, 파리에서 그와 같은 조각상은 프랑스 왕의 신민 중 극소수만이 볼 수 있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북유럽 귀족이 왕의 궁정에 거주하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왕들은 예술가와 지식인에 대한 후원이 신민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는데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교 휴머니즘과 북유럽 르네상스
북유럽 르네상스는 기존의 북유럽 전통 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이상을 접목시킨 결과물이었다.
이것은 북유럽 르네상스의 가장 두드러진 지적 운동인 그리스도교 휴머니즘 Christian humanism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북유럽 휴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스콜라 철학 scholasticism을 경멸했지만 키케로 Cicero나 베르길리우스 Vergilius보다 성경과 종교적 가르침에서 윤리적 지침을 구했고,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고대로부터 지혜를 구했지만 그들이 염두에 둔 고대는 고전 고대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고대―≪신약성서≫와 초대 교부들의 고대―였다.
마찬가지로 북유럽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업적에 감동 받아 고전 기법을 배우고 익혔다.
하지만 북유럽 예술가들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에 비해 고전적 주제를 묘사한 경우가 훨씬 드물었고 완전히 벌거벗은 누드를 결코 그리지 않았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사상과 문학의 영역에서 북유럽 르네상스가 이룩한 업적을 이야기하려면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스트의 왕 the crowning glory of the Christian Humanists'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1469?~1536)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Rotterdam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북유럽 여러 지역을 폭넓게 여행함으로써 사실상 북유럽 전체의 시민이 되었다.
10대에 자신의 의지에 반해 수도원에 들어간 에라스무스는 그곳에서 종교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원하는 것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자유만은 누렸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고전과 수많은 교부들의 저작을 게걸스럽게 읽었다.
3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수도원을 떠나 파리 대학 입학 허가를 얻었으며 그곳에서 신학사 학위 학부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그 후 파리 대학의 무미건조한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사제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대신, 가르치는 일과 저술활동, 영적 의무의 부담이 없는 다양한 교회 업무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늘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나섰던 그는 종종 잉글랜드를 여행했으며 이탈리아에 약 3년 동안 머물렀고 독일과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에서 거주하다가 말년에는 스위스 Switzerland 바젤 Basel에서 지냈다.
각처에서 사귄 학식 있는 친구들과 나눈 방대한 양의 서신을 통해 에라스무스는 북유럽 휴머니스트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출간한 방대한 저술을 통해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에라스무스는 평생 동안 북유럽의 문화적 흐름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에라스무스의 다방면에 걸친 지적 활동을 우리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즉, 문학적 관점과 교리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에라스무스는 키케로 이래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라틴 산문 문장가였다.
박학과 기지를 겸비한 그는, 현란한 언어 효과를 창출해내는가 하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가 읽을 경우 다른 의미를 연상할 수 있는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재담을 구사하면서, 자신의 설명방식을 주제에 맞추어 바꾸기를 즐겼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아이러니 irony(반어反語: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실제와 반대되는 뜻의 말을 하는 것)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는 ≪대화≫에서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동시대의 죄악상을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왕들은 전쟁을 일삼고, 성직자들은 돈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싸우고, 신학자들은 삼단논법을 발명하고, 수도사들은 수도원 밖을 배회하고, 평민은 반란을 이르키고, 에라스무스는 ≪대화≫를 쓴다."
에라스무스의 세련된 라틴어 문장과 기지는 순수한 문학적 이유 때문에 광범한 독자를 끌어 모았지만, 그가 쓴 모든 글은 이른바 '그리스도의 철학'을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당시의 사회 전체가 복음의 단순한 가르침에서 멀어져서 타락했고 부도적해졌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세 가지 다른 범주의 출판물―사람들의 생활방식의 오류를 일깨워주는 명쾌한 풍자문, 그리스도교도의 올바른 행동을 안내하기 위한 진지한 도덕적 논고, 기초적인 그리스도교 문헌의 학문적 편집물―을 제공했다.
에라스무스의 저작 가운데 첫 번째 범주에 속하는 글로는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우신예찬愚神禮讚 Praise of Folly≫(1509)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스콜라적인 현학과 교조주의를 조롱하고 대중의 무지와 미신을 비웃었다.
그리고 ≪대화≫(1518)에서 그는 좀 더 진지하지만 여전히 아이러니한 어조로 당대의 종교 관행을 조목조목 검증했다.
이 저작들에서 에라스무스는 가공의 인물로 하여금 말하도록 해서 자신의 의견을 단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범주의 글에서 에라스무스는 거침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명료하게 말했다.
두 번째 범주에서 가장 두드러진 논고는 ≪그리스도교도 기사의 핸드북≫(1503)과 ≪평화의 불평≫(1517)이다.
그는 ≪그리스도교도 기사의 핸드북≫에서는 평신도에게 고요한 내적 경건의 삶을 추구하라고 촉구했고, ≪평화의 불평≫에서는 그리스도교도적 평화주의를 감동적인 필치로 서술했다.
문학적 저술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문헌 연구를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간주했다.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Hipponensis,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등 초대 라틴 교부들의 권위를 존중한 그는 이들 교부의 모든 저작에 대한 믿을 만한 판본을 출간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탁월한 재능을 활용하여 ≪신약성서≫의 좀 더 정확한 판본을 출간했다.
1504년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의 ≪신약성서 강해≫를 읽고서 에라스무스는 중세 동안 누적된 필사와 번역 과정에서의 수많은 오류를 ≪신약성서≫ 본문에서 삭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 message(전언傳言)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면서 훌륭한 그리스도교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권위 있는 성경 판본을 확립하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바쳐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최선의 그리스어 성경 필사본을 모조리 찾아내 연구하고 비교했다.
마침내 1516년에 출간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에라스무스의 주석과 새로운 라틴어 번역이 첨부되었다―는 성서 연구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이정표 중 하나였다.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의 손에 들어간 이 성경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첫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토마스 모어
에라스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스트로서 에라스무스에 버금가는 인물은 잉글랜드인 토머스 모어 Thomas More(1478~1535)였다.
변호사와 하원의장으로서의 화려한 경력을 쌓은 모어는 1529년에 잉글랜드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 Henry VIII(재위 1509~1547) 의 노여움을 샀다.
가톨릭 보편주의에 충실했던 모어는 국가 교회를 왕권에 종속시키려는 왕의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1534년 모어는 헨리 8세를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는 서약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런던탑에 투옥되었으며 이듬해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가톨릭 순교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아직 모르고 있던 1516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길이 남길 ≪유토피아 Utopia≫를 출간했다.
상상의 섬에 건설된 이상사회를 묘사한 이 책은, 실제로는 당시에 팽배했던 부조리―터무니없는 빈곤, 불로소득, 가혹한 형벌, 종교 박해, 전쟁의 무분별한 학살―에 대한 고발이었다.
유토피아의 주민은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하루에 6시간만 일하면 되므로 모든 사람이 지적인 활동에 필요한 여가를 누리며, 지혜, 중용, 인내, 정의의 자연적 미덕을 실천한다.
철은 '유용하기 때문에' 귀금속이다.
전쟁과 수도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이 허용된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그리스도교를 드러나게 옹호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의도만은 분명히 읽을 수 있다.
'유토피아 주민'은 '그리스도교적 계시啓示의 은사恩賜(하나님이 자신을 열어 보여주는 것)' 없이도 사회를 잘 꾸려나갈 수 있는데, 하물며 복음을 안다는 유럽인은 마땅히 그들보다는 더 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울리히 폰 후텐
에라스무스와 모어는 기질상 근본적으로 타협적이었고 비꼬는 말투로 의사를 표현했다.
반면 그리스도교 휴머니즘 운동의 세 번째 대표적 인물인 에라스무스의 독일인 제자 울리치 폰 후텐 Ulrich von Hutten(1488~1523)은 성향이 한층 호전적이었다.
독일의 문화적 민족주의에 헌신했던 폰 후텐은 외세에 저항하는 '자부심 강하고 자유로운' 게르만 민족 Germanic peoples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러나 폰 후텐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또 다른 독일의 휴머니스트인 크로투스 루비아누스 Crotus Rubianus와 공동으로 집필한 ≪무명 인사의 서한≫(1515) 덕분이다.
이 책은 문학사상 가장 신랄한 풍자 중 하나이다.
이 책은 히브리 Hebrew 문헌―특히 ≪탈무드 Talmud≫―을 연구하는 인문학자 요한 로이힐린 Johannes Reuchlin(1455~1522)을 변호하기 위한 선전전宣傳戰(많은 사람의 이해를 얻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선전하는 일 )의 일환으로 쓰였다.
스콜라 철학자들과 독일 종교재판소장이 독일 내에 있는 모든 히브리 문서를 없애려 하자 로이힐린과 그의 동료들은 강력히 반대했다.
얼마 뒤 직접적인 반대 의사 표명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로이힐린 지지자들은 전략을 바꿔 조롱하는 방법을 썼다.
폰 후텐과 루비아누스는 일부러 조악한 라틴어로 쓴 일련의 서한집을 출간했다.
이 서한집은 로이힐린을 반대하는 쾰른 대학 Universität zu Köln(영어 University of Cologne)의 스콜라 철학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신학자들은 염소젖 짜는 사람, 대머리, 똥거름 주는 사람 등 해괴망측한 이름을 가졌으며, 터무니없는 종교적 형식주의나 괴상한 박학을 뽐내는 유식한 바보들로 등장했다.
예를 들어 이 서한집에 나오는 편지의 필자 중 하나인 하인리히 양 주둥이 Heinrich Sheep's-mouth라는 학자는 금요일에 노른자위가 있는 달걀을 먹는 엄청난 죄를 지어서 고민 중이라고 고백했다.
또 다른 편지의 필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가 군사활동에 너무 바쁜 나머지 결코 라틴어를 배울 수 없었다고 하는 '위대한 발견'을 했노라고 떠벌렸다.
이 서한집은 교회에 의해 즉각 금지되었지만 널리 유포되고 읽혔다.
그 결과 복음의 소박한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스콜라 철학이나 가톨릭 종교 의식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의 쇠퇴
열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에는 에라스무스, 모어, 폰 후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외에도 잉글랜드인 존 콜레트 John Colet(1467?~1519), 프랑스인 자크 르페브로 데타플 Jacques Lefèvre d'Étaples(1455?~1536), 에스파냐인 추기경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 Francisco Jiménez de Cisneros(1436~1517)와 후안 루이스 비베스 Juan Luis Vives(1494~1540) 등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과 초대 그리스도교 문헌을 편집하고 복음의 도덕성을 해설하는 작업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휴머니즘 운동―1500년 무렵에서 1525년 무렵에 이르기까지 비범한 국제적 결속력과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은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개신교改新敎)의 흥기로 말미암아 전열이 흐트러졌고 그 후 추진력을 잃었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들은 복음이 문자 그대로의 진리임을 강조하고, 성직자의 부패와 종교적 의식주의儀式主義(의식을 중시하여 떠받드는 경향이나 태도)를 가차 없이 비판함으로써,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13장에서 보게 되듯이, 구세대에 속하는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들 가운데 루터와 함께 가톨릭 신앙의 근본 원리를 부정하는 노선에 기꺼이 동참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설령 열렬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가 된 사람이 일부 있었다고 해도 그는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의 표현방식상의 특징인 아이러니 감각을 잃고 말았다.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들은 의식을 반대하고 내적 경건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가톨릭의 울타리 안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가톨릭 Catholic과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사이의 전쟁이 날로 격화되자 가톨릭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관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톨릭 종교 관행에 대한 어떠한 내부적인 비판도 적인 프로테스탄트를 돕는 행위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던 에라스무스는 치욕을 당하기 전에 일찌감치 죽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보다 운이 나빴던 많은 추종자들은 오래 산 탓으로 에스파냐 종교재판소에 의해 고초를 겪게 되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문학과 음악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은 1525년 이후 급속히 쇠퇴했지만 북유럽 르네상스는 16세기 내내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프랑스에서는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 Pierre de Ronsard(1524~1585)와 요하킴 뒤 벨레 Joachim du Bellay(1522?~1560)가 우아한 '페트라르카풍의 소네트 Petrarchan sonnet'(소네트란 14행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서양 시가詩歌로서 우리말로는 십사행시十四行詩)를 썼으며, 잉글랜드에서는 필립 시드니 Philip Sidney(1554~1586)와 에드먼드 스펜서 Edmund Spenser(1552?~1599)가 이탈리아의 문학적 혁신을 대폭 수용했다.
실제로 스펜서의 ≪요정 여왕≫은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Ludovico Ariosto의 ≪광란의 오를란도≫풍으로 쓰인 장편의 기사 로망스로서, 어떤 이탈리아 작품 못지않게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전형적 특징인 화려한 감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라블레
앞서 언급한 어떤 시인보다도 독창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프랑스의 산문 풍자가인 프랑수아 라블레 François Rabelais(1494?~1553)였다.
그는 아마도 16세기 유럽의 모든 위대한 창조적 작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그가 존경한 에라스무스와 마찬가지로 라블레는 처음에 성직자였다.
그러나 서임을 받자마자 그는 의학 공부를 위해 수도원을 떠났다.
개업의로 일하면서 라블레는 의료활동과 문학활동과 병행했다.
그는 역서曆書(책력冊曆: 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를 집필했고 돌팔이 의사와 점성술사를 풍자했으며 대중의 미신을 희화화했다.
그러나 그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문학적 유산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Gargantua and Pantagruel≫이란 5권의 '연대기年代記'(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연대순으로 적은 기록한 책)이다.
가르강튀아아 팡타그뤼엘—그들의 이름은 엄청난 체구와 식욕으로 유명한 중세 전설의 거인들 이름에서 따왔다—에 대한 라블레의 서술은 그의 질펀한 유머와 활기 넘치는 이야기, 그리고 자연주의 철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했다.
라블레는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에라스무스처럼 종교적 의식주의를 풍자하고 스콜라 철학을 조롱했으며 미신을 비웃고 온갖 편협을 조소했다.
그러나 박식한 독자만 읽을 수 있는 매우 세련된 고전 라틴어 문체로 글을 썼던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라블레는 지극히 세속적인 때로는 저속한 프랑스어로 사용함으로써 훨씬 더 넓은 독자층을 포섭했다.
또한 라블레는 어떤 식으로든 설교조로 보이기를 싫어했으므로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회피했고 독자에게 즐거운 오락거리만을 제공하려 했다.
그러나 비판적 풍자를 별도로 하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작품 전체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찬양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라블레에게 건장한 거인들은 실제로는 삶을 사랑하는 인간을 표상하는 존재들이었으며, 인간의 모든 본능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폭압으로 이어지지만 않는다면 건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상향인 유토피아적인 '텔렘 수도원 Abbaye de Thélème'에는 어떤 억압도 없었다.
그곳에는 다만 긍정적인 삶의 추구와 자연스러운 인간적 성취에 적합한 환경만이 있었고, 그곳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규칙은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였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건축
라블레가 르네상스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중세의 거인 이야기를 활용했듯이, 앙부아즈성 Château d'Amboise, 슈농소성 Château de Chenonceau, 상보르성 Château de Chambord 같은 루아르 Loire 지방의 화려한 성들을 축조한 프랑스의 건축가들은, 중세 말기 프랑스의 화려한 고딕 양식을 고전적인 수평선을 강조한 최신 경향과 결합시켜 프랑스 건축사상 가장 인상적이고도 독특한 건축물들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건축을 거의 모방하다시피 한 건축물도 있었다.
마치 롱사르 Pierre de Ronsard와 벨레 Joachim du Bellay가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를 모방한 시를 썼듯이, 1546년에 파리 루브르 왕궁 신축에 참여했던 프랑스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 Pierre Lescot(1510?~1578)는 고전적인 붙임기둥(벽돌을 기둥 모양으로 붙여 쌓은 것)과 박공牔栱/欂栱(지붕의 옆면 지붕 끝머리에 ‘∧’ 모양으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을 강조한 정면正面(파사드 façade: 건물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문 외벽 부분)을 축조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고전주의를 고스란히 베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회화
북유럽 르네상스의 회화는 사상과 예술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분야이다.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의 이상을 회화로써 가장 감동적으로 구현한 인물은 북유럽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인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1471~1528)였다.
뒤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법인 비례, 원근법, 입체 표현법 등을 완전히 습득한 최초의 북유럽 화가였다.
뒤러는 또한 당대의 이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복잡한 작용을 지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재현하는 일에 매료되었으며, 다양한 자세의 인체 누드 nude(회화, 조각, 사진, 쇼 따위에서 사람의 벌거벗은 모습)를 그렸다.
그러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가 다윗(다비드) David이나 아담 Adam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그린 반면, 뒤러의 누드화에는 좀 더 절제된 북유럽의 전통에 따라 무화과 앞을 반드시 덧붙였다.
더욱이 뒤러는 순수한 고전주의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화려함에 함몰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했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도 에라스무스의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적 이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요한 가운데 빛을 발하고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 Saint Hieronymus를 그린 판화는, 에라스무스나 동시대 그리스도교 휴머니스트들이 조용히 연구에 몰두하면서 느꼈음직한 성취감을 오롯이 표현해내고 있다.
<네 명의 사도>는 뒤러가 좋아했던 ≪신약성서≫ 저자들—바울 Paul(라틴어 Paulus), 요한 John(라틴어 Iohannes), 베드로 Peter(라틴어 Petrus), 마가 Mark(라틴어 Marcus)—의 존엄과 통찰력을 예찬하고 있다.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가 있었다면 뒤러는 그 무엇보다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인생행로를 걷다가 딱 한 번 마주쳤다.
뒤러는 그 기회를 틈타 자신의 영웅을 막 스케치하기 시작했지만, 그 후 에라스무스가 일이 바빠지는 통에 뒤러는 미처 작품을 완성할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의 사색에 잠긴 모습을 유화로 그리는 작업은 또 다른 위대한 북유럽 화가인 독일의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1497~1543)의 손에 맡겨졌다.
운 좋게도 홀바인은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에라스무스의 사상적 동료인 토마스 모어의 정밀한 초상화를 그리는 기회도 잡았다.
이 초상화를 통해 우리는 어째서 한 동시대인이 모어를 일컬어 '슬프고 엄숙한 사람, 사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렀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두 점의 초상화는 그 자체로서 중세 문화와 르네상스 문화의 중요한 차이점을 집어내고 있다.
중세에는 어떤 화가도 지식인의 초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정밀하게 그리지 않았다.
반면 르네상스 문화는 한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는데 큰 관심을 쏟았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홀바인은 에라스무스와 모어를 화폭에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음악
15·16세기 서유럽에서 음악은 대단히 발달했으며 회화·조각과 더불어 르네상스 문화의 가장 화려한 변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르네상스의 음악 이론은 휴머니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대체로 고전 음악의 형식과 음계를 회복시켜 모방하려는 성과 없는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연주 부문에서는 중세의 음악 전통과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르네상스 음악에는 꾸밈음과 정서적 특성을 강조한 새로운 표현법이 등장했다.
또한 류트 lute, 비올 viol, 바이올린 violin 등의 새로운 악기가 발전했고, 하프시코드 harpsichod(독일어 쳄바로 cembalo)를 비롯한 다양한 목관악기와 건반악기가 발달했다.
새로운 음악 형식으로 마드리갈 madrigal(자유로운 형식의 짤막한 서정적 가요), 모테트 motet(성경의 문구 따위에 곡을 붙인 반주 없는 성악곡) 등이 등장했고, 16세기 말에는 새로운 이탈리아 형식 음악인 오페라 opera(가극歌劇)가 발달했다.
초기에 음악은 교회 음악을 다루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사이의 구분은 희미해졌고, 대부분의 음악가는 특정 분야에 국한해서 활동하지 않았다.
음악은 이제 더 이상 오락이나 예배의 부속물로 간주되지 않고 진지하고 독립적인 예술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14세기—로네상스 초기 또는 이전—를 거치는 동안 '새로운 예술'이라 불리는 음악이 이탈리아오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다.
이 분야의 뛰어난 작곡가로는 프란체스코 란디니 Francesco Landini(1325?~1397)와 기욤 드 마쇼 Guillaume de Machaut(1300?~1377)가 있었다.
'새로운 예술'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작곡한 마드리갈, 발라드 ballade(담시곡譚詩曲: 자유로운 형식의 서사적인 가곡이나 기악곡) 등의 노래는 14세기에 윤택한 세속 예술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루어진 위대한 음악적 업적은 교회의 모테트를 위해 편곡된 지극히 복잡하고 섬세한 대위법對位法(둘 이상의 독립된 선율이나 성부를 동시에 결합시켜 곡을 만드는 복음악複音樂의 작곡법)이다.
특히 마쇼는 미사곡을 다성 음악多聲音樂 polyphony(독립된 선율을 가지는 둘 이상의 성부로 이루어진 음악)으로 만든 최초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15세기는 프랑스적 요소, 플랑드르적 요소, 이탈리아적 요소가 종합된 시기였는데, 이러한 종합은 부르고뉴 공작 Duc de Bourgogne의 궁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음악은 가락이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15세기 후반 북부 플랑드르적 요소가 강해짐에 따라 다소 경직되었다.
16세기가 시작되자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작곡가들이 유럽 전역의 모든 궁정과 성당에 등장했으며, 그들은 점차 지역적·국가적 유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대개 플랑드르적 요소에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의 음악 문화를 가미했다.
이렇게 해서 창출된 다양한 장르는 르네상스 예술 및 문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6세기 후반에 국민주의적 프랑스-플랑드르 형식을 이끈 음악가로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플랑드르의 롤랑 드 라수스 Roland de Lassus(1532~1594), 복잡한 다성 합창 음악에 뛰어났던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1525?~1594)가 있었다.
팔레스트리나는 로마 교황의 후원을 받아 가톨릭교회를 위해 정교한 다성 합창곡을 썼다
16세기 잉글랜드에서도 음악이 발전했다.
튜더가家 House ofTudor 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재위 1558~1603)는 예술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16세기 말 무렵 이탈리아에서 도입된 마드리갈이 새롭게 생명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이룩된 독창적 형식의 성악과 기악곡은 장차 유럽 대륙에서 이루어질 음악 발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음악은 윌리엄 버드 William Byrd(1543?~1623)에 이르러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플랑드르, 이탈리아 작곡가들에 필적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전반적인 음악적 숙련도는 오늘날보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가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합창곡은 가정이나 비공식 모임에서 소일거리로 유행했고, 교양 있는 엘리트에게는 악보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대위법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지만, 오늘날 널리 이용되는 근대적 화성법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고 향후 더 많은 시험을 거쳐야만 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르네상스 음악이 단지 음악 발달과정의 한 단계일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을 거느린, 그 자체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음악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라수스, 팔레스트리나, 버드 같은 작곡가들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같은 미술가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엇다.
오랫동안 경시되었던 그들의 유산은 근년에 들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음악가 그룹이 그 재생을 위해 노력한 결과 대중성도 높아지고 있다.
12장 결론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유럽 르네상스 사이에는 차이점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강조해서는 곤란하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지식인은 북유럽 지식인에 비해 좀 더 세속적이고 도시적인 교육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다.
페트라르카가 스콜라 철학을 비판한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수준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스콜라 철학의 정서적 무미건조와 조야粗野한(천하고 상스러운) 취향을 반대했는데, 그런 점들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위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로렌초 발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교황의 세속권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의 문헌 연구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확고한 그리스도교 신앙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플라톤 학회는 플라톤을 마치 교회의 성자처럼 숭앙했지만, 13세기의 스콜라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접근했던 것과 동일한 정신으로 플라톤 저작을 대했을 뿐이다.
헌신적 그리스도교도였던 그들은 고전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이 그리스도교 진리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렇듯 스콜라 철학과 그리스도교 휴머니즘의 양립 가능성을 드러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유일하고도 진실한 신앙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지식인의 임무였다.
'시민적' 휴머니즘'과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의 대비를 고찰하면서, 우리는 르네상스 사상이 대단히 다양했다는 점 또한 유념해야 한다.
피치노, 알베르티, 브루노 등과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유일한 전형적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사상가를 북유럽 사상가와 비교할 경우 비슷한 부류를 비교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학자들은 종종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가와 북유럽 르네상스 사상가의 차이를 지나치게 부각시키곤 한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휴머니스트 모두를 대표하고, 에라스무스는 북유럽 휴머니스트 모두를 대표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들의 차이점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전제와 관련된 것이지, 그들이 이탈리아 휴머니즘에 속했는가 아니면 북유럽 휴머니즘에 속했는가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만일 존 콜레트를 북유럽 휴머니즘의 대표로 그리고 마르실리오 피치노 Marsilio Ficino를 이탈리아 휴머니즘의 대표로 비교한다면 또는 페트라르카를 토머스 모어와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와 중세 전성기의 차이를 과장해서도 안 된다.
이탈리아 휴머니스트들과 북유럽 휴머니스트들은 아담과 이브의 불복종과 원죄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의 개선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 관점을 공유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보다 더 낙관적인 인물은 없었다.
두 휴머니스트 집단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12세기의 시토 수도회 Cistercian Order 사상가들 이상으로 그러한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도 없었다.
끝으로 두 집단은 지식인의 권면勸勉(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이 모든 사람의 도덕과 행동을 새롭고도 높은 미덕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르네상스 전성기의 지적 풍토는 순진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좀 더 어둡고 심리적으로 복잡한 중세 세계와도 달랐고 곧 다가오게 될 종교개혁 시대와도 현저하게 달랐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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