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소고기 - 편견을 딛고 이어진 우리의 별미 본문
농경 사회에서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축이었다.
그래서 가족처럼 대접을 받았으며 신성시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버릴 곳이 하나도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꼬리부터 소 발톱까지 부위별로 다양한 요리법이 오래전부터 발달했다.
그리고 오늘날 소고기는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의 대명사다.
살아서는 농사를 짓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죽어서는 단백질의 원천이자 특유의 고소한 풍미로 입맛을 사로잡았던 소.
소와 관련된 유물들을 통해 소 숭배와 소고기 미식의 역사를 살펴보자.
○숭배의 대상이었던 소
가축 소는 오록스 aurochs라 불리는 야생 소에서 기원했다.
오록스는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 초기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뿔 달린 소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야생 오록스를 처음으로 가축화하는데 성공한 곳은 근동 지역이다.
가축화된 소는 약 6,000년 전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로도 전래된다.
이후 양쯔강 이남에서는 목에 혹이 달린 혹소를, 북방인 한국과 일본에서는 우리가 아는 황소를 키웠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서 키웠던 소의 원형은 3,300년 전 상나라 유적에서 발견된 소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즈음부터 각지의 자연환경에 맞춤한 소가 사육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소고기를 좋아하면서도 소를 가족처럼 여기거나 조상처럼 숭배했다.
소를 숭배하는 전통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풍습은 아니다.
전 세계 고대 유적에서는 소 숭배의 흔적이 두루 발견되었다.
야생 소는 2미터 크기에 몸무게는 1톤에 달했다.
매머드 mammoth가 멸종한 이후 야생 소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큰 초식동물이었다.
거대한 몸집에 더해 커다란 뿔까지 달렸고, 몸 전체는 시커먼 털로 뒤덮였으니 인간들의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했다.
9,000년 전 근동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인 튀르키예의 차탈회위크 Çatalhöyük에서는 거대한 야생 소를 사람들이 사냥하는 모습, 경외하는 모습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었다.
야생 소는 신석기인들에게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주요한 식량이었던 셈이다.
지중해 크레타 문명 Ancient Crete civilization(또는 미노스 문명 Minoan civilization)에서 전해지는 미노타우로스 Minotauros 신화나 근동 지역의 바알 Baal/Ba'al 신 숭배에서 보듯 뿔 달린 소는 인간에게 경외와 존숭의 대상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소를 숭배하며 제사를 지낸 흔적이 발견되었다.
전남 나주시 복암리 고분군에 있는 마한 족장의 무덤 근처 늪에서 소뼈가 발굴된 것이다.
이를 통해 남도의 기름진 옥토에서 농사를 짓던 마한 사람들이 소의 제사를 지냈음이 밝혀졌다.
당시 무덤 주변 도랑에서 사지가 묶인 채 머리가 잘린 소뼈가 통째로 발견되었다.
추정컨대 잘린 소머리는 따로 어딘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고, 소의 몸통은 족장의 무덤 곁에 묻은 것이다.
○천대와 편견을 이겨낸 맛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요리해서 먹는 소고기 부위는 120여 가지에 이르는데, 이는 소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미국이나 영국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되는 수치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왕조 600년 동안에는 엄격하게 소의 도축을 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채로운 소고기 요리법이 발달한 배경은 무엇일까?
가장 강력한 배경으로 꼽히는 두 가지는 몽골이나 말갈과 같은 유목 민족과의 접촉 그리고 백정으로 대표되는 소고기 도축을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몽골 침략기에 한반도에는 다량의 소가 유입되었는데, 그와 함께 목축 및 다양한 도살 기술이 함께 전해져 보편화되었다.
그 전통은 백정白丁과 수척水尺(무자리 또는 양수척楊水尺: 후삼국과 고려시대에 떠돌아다니면서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 등 특수 집단들에 의해 수백년 동안 이어져왔다.
백정으로 일했던 이들은 본래 삼국시대 이래로 백두대간을 따라서 연해주와 간도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흔히 말갈계라고 알려진 이들은 농경민들이 잘하지 못했던 고기의 도축과 가공에 능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백정은 극도로 천대받는 직업이 되었지만, 우리가 즐기는 소고기 요리법은 전적으로 이들 백정에 의해 발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고기는 도성 내 소의 도살을 엄금했던 조선시대에도 양반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행했다.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소뼈를 가지런히 모아 구덩이에 묻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공평동은 조선시대 관공서들이 몰려 있던 동네다.
조선시대에 한성 안에서는 소 도축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에는 사대문 밖에서 소를 도살해 들여와야 했다.
공평동 유적은 솔선수범을 해야할 관리들이 대놓고 관청에서 고기를 잡고 회식을 한 흔적이다.
사료에 따르면, 제사를 지낸다는 핑계를 대고 소를 잡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선 후기에 인기가 많았던 소불고기 요리로는 설하멱雪下覓을 꼽을 수 있다.
'눈 오는 날 찾는다'라는 뜻의 설하멱은 일종의 꼬치구이로, 소고기를 불에 구웠다가 찬물이나 눈에 넣어 식인 뒤 기름을 발라서 다시 한번 구워 먹는 요리다.
지금도 유라시아 일대에서 널리 유행하는 꼬치구이인 샤슬릭 shashlik도 분무기 같은 것으로 물을 뿌리면서 고기를 구우니, 요리법이 비슷하다.
보다 대중적인 소고기 요리의 대표로 설렁탕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머리, 내장, 뼈다귀, 발, 도가니(무릎도가니: 소 무릎의 무릎뼈와 거기에 붙은 고깃덩이) 따위를 푹 삶아서 만든 국 또는 그 국에 밥을 만 음식인 설렁탕은 말뼈나 양뼈를 고아서 만든 몽골과 카자흐스탄 요리인 슈르파 shurpa(또는 소르포 sorpo)와 그 맛이 거의 똑같다.
가축의 뼈를 푹 고아서 만든 이 음식들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부위까지 살뜰하게 조리해 영양 섭취를 해야만 했던 민중들의 지혜가 담긴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
○한우의 맛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오래전 소고기의 맛을 어땠을까?
아쉽게도 이를 알아낼 도리는 없다.
전통의 맛을 복원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언젠가 미국 화교들이 운영하던 미식가 클럽이 하버드대에서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교수의 자문까지 받아가며 거액을 들여 3,000년 전 중국 상나라의 음식을 세심하게 복원하고자 시도했었다.
잃어버린 중화민족의 전통을 음식으로 잇겠다는 포부였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식단을 복원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로 끝났다.
다양한 문화의 갈래 중에서도 음식 문화만큼 쉽게 변형되는 것도 없다.
맛은 매우 즉흥적이고 상대적인 감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우 요리가 사랑받는 이유는 세계인의 다양한 입맛에 맞춰 적극적으로 조리법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20세기 한우의 역사는 획일화의 역사였다.
그 결과, 전통 한우는 그 기원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최신 DNA 기법을 도입해도 한우의 기원은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그 이면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루어진 급격한 한우 표준화 작업이 존재한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한우는 황우黃牛(노란털), 칡소(호반우虎斑牛: 털색이 황갈색 바탕에 검은색 혹은 갈색의 세로줄 무늬), 흑우黑牛(검은털), 제주 흑우(검은털로서 작은 몸집이지만 강건한 체질과 강한 지구력)로 크게 네 종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황우만을 한우로 표준화함에 따라 한우의 다양한 유전자풀 gene pool(어떤 집단의 전체 구성원이 소유한 유전자의 총체)이 고립되었고, 이후 전통 소의 명맥이 끊겨버렸다.
한우가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으려면 다양한 요리법만큼이나 품종을 개량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전통 소 복원 작업과 한우의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이를 위한 방편들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0.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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