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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역사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전후로 나뉜다

새샘 2025. 3. 21. 00:15

인간은 미생물과의 싸움을 위한 무기들을 차근차근 만들어왔다.

첫 번째가 백신 vaccine이다.

1796년 에드워드 제너 Edward Jenner가 최초로 천연두 백신인 우두접종을 성공시키면서 같은 원리를 이용해 광견병 백신(1884), 결핵 백신인 BCG(1909), 디프테리아 diphtheria 백신(1921), 파상풍 백신(1924) 등이 개발되었다.

두 번째는 소독 disinfection이다.

조셉 리스터 Joseph Lister의 공헌으로 소독법이 정착되어 수술 부위나 상처가 세균에 의해 2차 감염이 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백신과 소독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미 몸 안에 들어온 병원균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이었다.

 

1922년 영국 세균학자 알렉산터 플레밍 Alexander Fleming(1881~1955)은 세균 연구를 위해 페트리접시 Petri dish에 세균을 배양하려고 접종하는 도중 재채기를 했다.

며칠 뒤 페트리접시를 확인하던 플레밍은 재채기할 때 튀었던 침이 묻었던 곳에만 세균이 번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구를 통해 세균을 죽이는 침의 성분이 콧물과 눈물에도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플레밍은, 그런 기능을 가진 물질을 세균을 녹이는 효소라는 뜻으로 용균효소溶菌酵素(라이소자임) lysozyme라 불렀다.

하지만 추가 연구에서 용균효소는 뚜렷한 효과가 증명되지 않아 플레밍은 아쉽게도 슬픔을 머금고 실험을 중단해야 했다.

그 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1928년 여름, 플레밍에게 또 다른 용균효소가 행운처럼 다가왔다.

 

 

플레밍이 키운 포도알균 집락들이, 우연히 오염된 페니실리움 곰팡이가 분비한 물질에 의해 분해된 결과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배양 접시(출처-출처자료1)

 

긴 여름휴가를 다녀온 플레밍은 포도알균 Styphylococcus이라는 세균을 접종해 놓았던 페트리접시를 확인했다.

페트리접시에는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었다.

어디선가 곰팡이 홀씨(포자) spore가 날아와 세균이 자라야 할 페트리접시를 오염시킨 것이다.

오염된 페트리접시를 버리려던 플레밍의 눈에 약간 특이한 모습이 들어왔다.

"뭔가 이상한데??"

곰팡이 주변의 세균 집락(콜로니) colony들이 마치 파괴된 것처럼 사라져버렸거나 희미해진 것이다.

그때 플레밍의 머릿속에 용균효소가 떠올랐다.

"곰팡이가 용균효소 같은 물질을 분비해 세균을 죽인 것이 아닐까?"

 

푸른곰팡이가 낀 모습(출처-https://www.ultimatemoldcrew.ca/blue-mold-on-walls-ceiling-home/)

 

LPCB 염료로 염색한 푸른곰팡이 현미경 사진(출처-https://www.adelaide.edu.au/mycology/fungal-descriptions-and-antifungal-susceptibility/hyphomycetes-conidial-moulds/penicillium)

 

플레밍이 확인해보니 페트리접시 안의 곰팡이는 아래층 학자가 키우던 곰팡이 중 한 종류인 푸른곰팡이 blue mo(u)ld 페니실륨 Penicillium이었다.

푸른곰팡이란 이름은 청록색의 분생홀씨(분생포자) condiospore를 가지고 있어 곰팡이가 낀 물체 표면이  위 사진에서처럼  청록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아래층 곰팡이 학자는 페니실륨 계통의 푸른곰팡이 8종류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복도를 타고 올라와 플레밍의 페트리접시 안으로 운 좋게 들어온 것이었다.

 

우연과 행운이 겹친 페니실린 penicllin 발견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자극했다.

페니실린으로 세 명이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는데 플레밍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노력보다 우연과 행운에 더 공감하는 듯하다.

플레밍은 곰팡이가 분비하는 물질을 발음하기 좋게 페니실린이라 이름 붙이고 1929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후 엄청난 파장이 ······ 일어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페니실린은 금세 잊혔다.

다른 과학자들이 여러 번 시도했는데도 플레밍과 같은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푸른곰팡이와 포도알균이 잘 자라는 온도가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푸른곰팡이는 섭씨 20도 정도의 약간 선선한 날씨에서 잘 자라고, 포도알균은 섭씨 35도의 무더위에서 잘 자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푸른곰팡이와 포도알균이 동시에 잘 자라기는 어렵다.

하지만 플레밍이 휴가를 다녀온 기간 동안 런던 London은 여름치고 선선한 날씨가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다고 한다.

일종의 이상기온이었던 셈이다.

시원한 날씨에 아래층에서 올라온 푸른곰팡이는 플레밍의 페트리접시에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플레밍이 휴가를 마칠 때쯤 원래의 무더운 여름 날씨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포도알균이 무럭무럭 자랐다.

덕분에 며칠 동안 푸른곰팡이와 포도알균이 동시에 자란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다른 과학자들은 플레밍의 실험을 재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별했던 여름 날씨 말고도 다른 과학자들이 플레밍의 연구를 재현할 수 없었던 원인이 하나 더 있다.

원래 페니실린 자체가 화학적으로 매우 다루기 어려운 불안정한 물질이었다.

페니실린은 곰팡이에게서 분비되고서 며칠만 지나도 세균 증식 억제 능력이 사라졌다.

이 때문에 당사자인 플레밍도 자신의 실험을 재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곰팡이와 사투를 벌이느라 지쳐가던 플레밍은 독일의 게르하르트 도마크 Gerhard Domagk가 실험실에서 뚝딱 항생물질(설파제)을 만든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아 페니실린 연구를 중단했다고 한다.

 

 

페니실린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알렉산더 플레밍, 하워드 플로리, 언스트 체인(출처-출처자료1)


1930년대에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University of Oxford의 두 연구자가 플레밍의 용균효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Austria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 Howard Florey(1898~1968)와 독일 화학자 언스트 체인 Ernst Chain(1906~1979)이었다.

두 사람은 용균효소를 연구하면서 내친김에 페니실린까지 연구하기로 했다.

다행히 화학자 체인은 의사인 플레밍보다 페니실린을 훨씬 잘 다뤄 그것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안정적으로 자라는 환경을 찾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로 얻은 체인의 페니실린은 플레밍의 것보다 1,000배 이상 강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동물실험이 시작되었다.

치사량의 포도알균에 감염된 8마리의 쥐 가운데 4마리에게만 페니실린을 주사했다.

그러자 페니실린을 맞은 쥐들은 모두 살고 나머지 쥐는 모두 죽었다.

동물실험에서 효과를 입증했으니 인체실험을 할 차례였다.

인체실험을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페니실린을 만들어야 했다.

플로리와 체인은 과감하게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실을 페니실린 제조 공장으로 개조했다.

먼저 엄청나게 많은 변기를 연구실로 들여왔다.

그리고 분무기로 푸른곰팡이 포자가 든 용액을  변기에 뿌리고 온도를 25도로 유지했다.

변기 속에서 곰팡이가 무럭무럭 자랐고, 온갖 시금털털한 냄새가 연구실을 꽉 채웠다.

며칠 뒤 변기 아랫부분에 모인 푸른곰팡이의 분비물 즉 페니실린을 주사기 같은 흡입기로 모았다.

제법 충분한 양이었다.

그것을 이용해 1941년 진행한 인체실험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세균에 심하게 감염된 6명의 환자 중 5명이 페니실린으로 목숨을 건졌다.

 

반면 아쉬운 죽음도 있었다.

앨버트 알렉산더 Albert Alexander라는 43세의 영국 경찰관은 정원에서 장미 가시에 얼굴을 긁혔다.

그는 운 나쁘게 상처가 병원균에 감염되어 다른 부위로 퍼졌고, 나중에는 한쪽 눈을 잃고 뇌까지 감염되어 정신착란 증상까지 보였다.

그는 얼마 못 살 듯했다. 이런 상황이 믿기는가?

장미 가시에 찔렸다고 죽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초기 페니실린 연구팀은 겨우겨우 페니실린을 짜내듯 만들어 알렉산더에게 투여했다.

그러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2~3일 사이에 알렉산더는 급격히 좋아졌다.

문제는 투여한 페니실린의 양이 너무 적었다는 점이다.

페니실린이 떨어지자 감염증이 재발한 알렉산더는 5일 만에 사망했다.

아쉬운 죽음이었다.

 

페니실린의 가장 큰 장점은 세균에게 치명적이면서도 인간에게 큰 해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물질이 가능할까?

그것은 페니실린이 세균의 세포벽을 표적으로 해서 공격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람을 포함한 동물에는 세포벽이 없고 세포막만 있기 때문에 페니실린의 항생 작용으로부터 안전한 것이다.

인류를 위한 진정한 마법의 탄환이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영국에서 페니실린을 계속 생산하기가 어려워진 플로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당국은 페니실린 균주를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때 페니실린에게 폭발적 명성을 안겨준 사건이 발생한다.

1942년의 '앤 밀러 사건'이다.

 

앤 밀러 Anne Miller는 33세 여성으로 유산 후 전신감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주치의였던 존 범스테드 John Bumstead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범스테드는 플로리와 친분이 있는 동료 의사에게 부탁해 페니실린 가루약이 든 유리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페니실린을 생리식염수에 섞어 조심스럽게 앤 밀러에게 투여했다.

그러자 41도에 육박하던 고열이 하루 만에 37.1도까지 떨어지고, 당장 내일 죽을 운명이었던 그녀는 건강을 회복해 57년을 더 살다 90세에 사망했다.

페니실린의 상상을 뛰어넘는 약효에 온 국민은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페니실린의 생산량이 폭증한 것은 물론이다.

1945년 알렉산더 플레밍과 언스트 체인, 하워드 플로리는 나란히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플레밍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귀중한 항생제를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않으면 언제든 내성이 발생해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의 연설은 노벨상 수상 연설 가운데 가장 잘 미래를 내다본 연설로 평가받는다.

 

페니실린의 발견은 의학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대부분을 차지하던 세균 감염에 의한 질환을 인류 스스로 간단히 제어하게 됨으로써 의학이 보유한 에너지를 다른 질환에 투자할 수 있었다.

지금 오히려 우리를 더 괴롭히는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만성질환이 그 혜택을 받았다.

페니실린 발견의 또 다른 의미는 인류의 자신감이다.

장미 가시에만 찔려도 죽음을 걱정해야 할 만큼 감염에 취약했던 시대에 흔한 곰팡이에서 뽑아낸 물질로 감염증을 치료했다는 사실은 의학을 연구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자신감을 크게 상승시켰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페니실린에 반응하지 않는 질병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결핵이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5. 3.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