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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목숨을 건 음침한 도박 '도굴' 본문
고고학과 유물에 대해 말하다 보면 도굴盜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오래된 문화재나 보물은 비싼 값에 유통될 수 있기 때문에 도굴꾼들의 단골 표적이 되곤 한다.
보존·연구되어야 하는 문화유산들이 단지 경제적 이익에 눈먼 사람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약탈되는 상황은 고고학자들에게 악몽과도 같다.
한편 도굴은 여러 매체에서 흥미로운 소재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고대의 유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는 (그 행위의 타당성은 논외로 친다면) 스펙터클한 spectacle(규모가 크고 볼거리가 많은) 재미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가령, 할리우드 Hollywood 어드벤처 adventure(모험) 영화 <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가 대표적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고고학자로 나오지만 정작 고고학자들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 character(특징물特徵物: 작품 내용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개성과 이미지)다.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 유적지를 찾아가서 귀한 유물을 훼손하고 훔쳤던 서양 고고학계의 어두운 얼굴을 미화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고고학의 세계와 대척점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도굴의 음침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자.
○죽어서도 부자이고 싶은 마음이 도굴꾼들을 불러 모으다
오래전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이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시신 외에도 진귀한 보물들을 무덤에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로 함께 묻었다.
가령,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 Pharaoh(고대 이집트 Egypt 왕의 칭호)인 투탕카멘 Tutankhamun(서기전 1331~서기전 1322)의 미라가 안치된 관은 삼중으로 된 관으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맨 안쪽의 순금으로 만들어진 관은 그 무게만 해도 100킬로그램이 넘었다.
또한, 관 속에 잠들어 있던 투탕카멘의 미라는 황금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이와 같은 황금 유물 외에도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이집트 신들의 조각상, 의복, 활 등 다양한 껴묻거리들이 발견되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많은 수의 유물이 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거의 도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처럼 부유하고 존귀한 삶을 누리길 바랐던 고대인들의 마음은 몇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들의 무덤이 도굴꾼들의 목표가 되는 이유로 작용했다.
진시황秦始皇(서기전 259~서기전 210)의 14대조 할아버지인 진경공秦景公(?~서기전 537)의 무덤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1970년대 중반 중국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 유적이 발견된다.
이에 중국 정부는 춘추전국시대 진秦나라에서 가장 큰 무덤을 썼던 진경공의 무덤 발굴에도 의욕적으로 착수하게 된다.
진경공은 서기전 577년에 즉위해 40년 동안 진나라를 다스리며 갖은 호사를 누린 인물이다.
그의 무덤은 지름 300미터에 깊이가 20미터나 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하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무덤에 순장殉葬(산 사람을 함께 묻던 일)된 사람 수만 해도 170여 명에 달했다.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이었으니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경공의 무덤은 마치 도굴꾼들의 도굴 연습장이었던 듯 도굴갱이 250여 개나 발견되었다.
결국 1976년부터 1986년까지 1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고고학자들의 발굴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현재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진경공의 무덤은 혹여나 무덤이 무너질까 봐 콘크리트를 덧발라 억지로 보존 중인 상태다.
반면 진시황의 무덤은 선조 진경공의 무덤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도굴꾼들의 손길을 타지 않았다.
진경공의 무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도굴당했는지 익히 알고 있었던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 조성을 극비리에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발굴된 면적만 해도 축구장 세 개를 합친 넓이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이었다면 필시 기록이 남아있을 법도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봐도 '자동발사 활이 장치돼 도굴을 막는다', '수은으로 만든 강이 흐른다'와 같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도굴꾼에 의해 발견된, '도굴의 왕' 조조의 무덤
도굴과 관련해 조조曹操(155~220)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사연을 지닌 인물도 없다.
중국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조조는 군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무덤을 파헤치는 부대인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과 보물을 긁어모으는 부대인 '모금교위摸金校尉'를 만들어 서기전 2세기 한漢나라 왕족인 양효왕梁孝王의 무덤을 비롯해 여러 무덤을 도굴했다고 한다.
각각의 도굴 절차에 최적화된 별도의 부대를 만들어 운용했을 정도이니 가히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도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살아생전 도굴의 왕이었던 조조의 무덤이 발견된 계기는 다름 아닌 후세 사람의 도굴 때문이라는 점이다.
2008년 봄, 중국의 역사 도시 허난(하남河南)성 안양安阳/安陽시에서 옛 무덤들이 도굴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다.
이 일대는 유적이 워낙 많다보니 이전에도 도굴이 많이 이루어져서 이 첩보에 크게 주목하는 이가 없었다.
늘 있는 일이려니 했던 것이다.
결국 그해 연말이나 되어서야 고고학자들이 가장 파괴가 심한 두 개의 무덤에 들어갔다.
도굴 현장은 참담했다.
무덤에는 3미터가 넘는 구멍이 뚫려있어서 성인 장정도 쉼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남아 있는 유물이라고는 바닥에 널린 자잘한 400점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남아 있는 유물을 판독하던 고고학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만다.
얼마 되지 않은 유물들 사이에서 조조를 뜻하는 '위무왕魏武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돌로 만든 꼬리표들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들이 무엇인지 적어둔 일종의 꼬리표였다.
도굴꾼들이 껴묻거리들은 거의 다 가져가고 돌로 만들어진 꼬리표들은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고 간 것이다.
이윽고 2010년 중국 정부는 조조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묘의 주인이 밝혀진 사례,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묘가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내 이 무덤이 조조의 것이 맞는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진다.
무덤 방의 크기는 400제곱미터로 귀족급이기는 했지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자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도굴을 당한 탓도 있었지만 출토된 유물 목록이 극히 빈약했다.
'위무왕'이라는 명명도 진위 여부 논란에 불을 붙였다.
조조는 살아생전에는 '위왕魏王'이라 불렸고, 죽은 뒤에는 '무왕武王'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니 '위무왕'이라고 불리기는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몇년 동안의 논란 끝에 중국 고고학계는 사료에 기록된 조조 무덤의 위치, 발굴된 사람뼈의 연령이 60대인 점(조조는 66세에 사망했다) 등을 들어 조조의 무덤이 맞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도 진위 여부를 두고 의심이 가시지 않고 있다.
무덤의 진위 여부를 떠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조조 역시 앞서 언급한 진시황처럼 자신의 무덤이 도굴당할 것을 무척이나 걱정했다는 것이다.
조조는 자신의 묘를 만들 때 봉분封墳(무덤 위에 높게 쌓아올리는 둔덕)이나 왕릉을 보호하는 나무를 심지 말고, 귀중품도 넣지 말고, 수의도 평범한 것으로 준비하라고 명했다.
후대의 기록들을 살펴봐도 조조가 가짜 무덤을 사방에 두었다는 내용이 흔히 보인다.
남송시대의 책에도 조조가 죽고 난 뒤에 수많은 도굴꾼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 헤맸지만 정작 진짜 무덤은 못 찾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옥새처럼 뚜렷한 증거 없이 논란이 되는 이름이 새겨진 꼬리표 몇 개를 근거로 조조의 무덤임을 확신하는 쪽을 의심하는 주장도 이해는 된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부질없는 욕망
도굴은 죽어서도 살아생전의 부와 명예를 누리고 싶어 땅속에 금은보화를 묻었던 인간의 욕망과,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도 불사하며 그것을 도둑질해 부를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아닐까 싶다.
물론,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가 순환하는 순기능도 있었다고 본다.
또한, 그들이 남긴 무덤과 껴묻거리들 덕분에 미래의 고고학자들은 옛사람들의 삶을 추적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예전의 왕이나 귀족처럼 자신의 무덤에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를 넣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인 부호라고 해도 진시황릉 같은 무덤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수많은 약과 시술에 돈을 쓴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이다.
아마존 Amazon.com, Inc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 Jeffrey Bezos는 '세포 재프로그래밍 cellular reprogramming' 기술을 개발하는 '알토스랩 Altos Labs'이라는 생명공학 새싹기업(스타트업 회사 startup company)에 투자를 했다.
일론 머스크 Elon Musk와 함께 페이팔 PayPal을 만든 피터 틸 Peter Thiel은 이른바 '냉동인간(인체냉동보존) cryonics'을 연구하는 알코어 생명연장재단 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과 사후 냉동 보존 계약을 맺기도 했다.
유전자를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편집해 사람의 노화를 방지하거나, 심지어 다시 젊게 만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이런 뉴스를 보면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던 고대의 왕이나 귀족들이 떠오르곤 한다.
죽음의 공포가 극대화되는 무덤이라는 공간을 다시 파헤쳐서 보물을 얻고자 하는 도굴꾼들의 마음도 어떻게든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요즘 우리의 삶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영생에 대한 꿈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 인간의 이 두 가지 욕망은 지금도 그 모습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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