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8: 식민 활동과 제국, 15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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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8: 식민 활동과 제국, 15장 결론

새샘 2025. 3. 12. 16:54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 Treaty of Utrecht은 식민 세력 사이의 경쟁에 새 시대를 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위트레흐트 조약의 가장 큰 패배자는 국경에 대한 안전만 보장받은 네덜란드 Netherlands와 에스파냐령 식민지에서 노예 시장에 대한 권리를 영국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던 에스파냐 España였다.

승자는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영토의 커다란 땅 덩어리를 획득한 영국  England과 이보다는 덜하지만 북아메리카 내륙 지역인 퀘벡 Quebec 지방의 케이프브레튼 섬 Cape Breton Island을 유지하고 인도 India에 교두보를 확보한 프랑스 France였다.

18세기는 유럽 경제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묶어주었던 상업적 팽창의 지배권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설탕과 노예의 삼각 무역

 

18세기 동안 유럽의 식민지 무역은 주로 대서양 항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대서양 항로는 서인도 제도 West Indies의 수지맞는 설탕 산업과 카리브 해 Caribbean Sea의 대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Africa 출신 노예에 대한 수요에 부응해 발전했다.

이러한 '삼각 triangular' 무역에서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은 경쟁국인 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 Portugal·네덜란드에 비해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 선박은 일반적으로 뉴잉글랜드 New England에서 탁송된 럼주 rum를 싣고 이것을 화물이나 다름없는 노예와 교환하게 될 아프리카로 항해했다.
그런 다음 이 선박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남대서양을 가로질러 싣고 간 노예를 당밀과 거래하게 될 자메이카 Jamaica나 바베이도스 Barbados의 설탕 식민지로 갔다.

이후 이 선박은 당밀을 럼주로 만드는 뉴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막바지 항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변형된 삼각 무역으로 저렴한 제조품이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노예와 교환되는 방식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노예들은 버지니아 Virginia로 실려가 담배와 교환되고, 이 담배는 다시 영국으로 선적되어 거기서 유럽 전 지역에 판매되기 위해 가공된다.

 

신세계 즉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 식민지에서의 설탕과 담배 경작은 노예 노동에 의존했다.

이들 상품에 대한 유럽의 수요 증가와 더불어 노예화된 아프리카인의 수송량도 늘어났다.

18세기 노예무역의 절정기에는 해마다 7만 5,000명에서 9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인이 대서양을 건너 실려 나갔다.

노예무역으로 거래된 노예는 모두 900만 명이었는데, 그중 600만 명이 18세기에 거래되었다.

그 가운데 약 35퍼센트에 달하는 노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카리브 해 지역으로, 5퍼센트(약 45만 명)는 북아메리카로, 나머지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 Brazil과 중남미에 있는 에스파냐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1780년대 프랑스의 최대 플랜테이션 plantation(재식농업栽植農業: 열대 또는 아열대 지방에서, 자본과 기술을 지닌 유럽인이 현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설탕·커피·담배·차·고무 따위의 특정 농산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경영 형태) 식민지인 카리브 해의 생 도밍그 Saint-Domingue에는 50만 명 이상의 노예가 있었으며, 영국의 식민지 자메이카에는 최소한 약 2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 초에는 여러 나라의 정부가 노예무역을 독점했지만, 18세기에는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항구를 운영하던 개인 사업가에게도 노예무역이 개방되었다.

그들은 인도산 옷감, 금속 제품, 럼주, 소총 등을 아프리카 노예 상인에게 주고 대신 인간 짐짝을 건네받았다.

인간 화물은 몇백 명 단위로 노예선에 실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시무시한 중앙 항로(유럽에서 아프리카로, 그 다음 식민지에서 유럽으로 들어오는 항로와 노예선의 항해를 구분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를 항해했다.

위생 시설도 없이 배 안에 결박되어 있던 포획된 남녀와 어린이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들의 사망률은 약 10~11퍼센트 정도로 유지되었는데, 100일 또는 그 이상 걸리는 정상적인 항해 여정에서 나타나는 평균 사망률보다 그렇게 높은 수치는 아니었다.

노예 상인은 노예 한 명당 10파운드 정도의 금액을 투자했기 때문에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상태로 자신의 탁송 화물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기를 염려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통상 경쟁

 

노예무역에 대한 지배는 영국에게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1749년 한 영국인이 기록했듯이, 노예무역은 "영국에 아무리 써도 고갈되지 않는 부의 재원"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아니더라도 식민지 통상의 가치는 18세기에 눈부시게 증가했다.

1716년 2,500만 리브르 livre(1795년까지 사용되던  프랑스 화폐 단위)였던 프랑스의 식민지 무역 총액은 1789년 2억 6,300만 리브르로 치솟았다.

대략 같은 기간 동안 영국의 해외 무역 총액이 1,000만 파운드 pound에서 4,000만 파운드로 증가했는데, 4,000만 파운드라는 금액은 프랑스 무역 총액의 두 배 이상에 달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통상의 가치 증대는 정부와 대양을 횡단하는 상인의 이해관계를 매우 긴밀하게 묶어주었다.

식민지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은 자신의 해외 투자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자국 정부에 의존했고, 정부 역시 국력이 의존하고 있는 식민지 무역을 유지하고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상인과 그 재정적 지원에 의존했다.

18세기에는 전쟁을 치를 능력조차 대개 (그리고 점차) 부유한 투자가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빌리고 나중에 이자를 붙여서 상환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영국은 통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정에서도 프랑스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1694년에 창업한 잉글랜드 은행 Bank of England은 매우 성공적으로 영국의 국채를 관리했다.

이 은행은 투자가들에게 주식을 판매함으로써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주었으며, 투자가들에게는 적정 수준의 이자율로 상환해주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기적으로 정부가 빚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프랑스 국왕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높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야 했으며, 이는 일련의 재정 위기를 불러일으켜 마침내 1789년 프랑스 군주정의 붕괴를 초래하고 말았다.

 

 

○18세기의 전쟁과 제국

 

7년 전쟁(1756~1763년)(출처-출처자료1)


17세기와 18세기의 전쟁
    명예혁명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아메리카 혁명
     러시아-터키 전쟁
1688~1689년
1689~1697년
1702~1713년
1756~1763년
1775~1783년
1787~1792년

 

1713년 이후 서유럽은 거의 한 세대 동안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이 평화는 1740년 프로이센 Preußen(영어 Prussia)의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the Great(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재위 1740~1786)이 오스트리아 Austria의 슐레지엔 Schlesien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재위 1745~1765)가 오스트리아의 왕위에 즉위한 상황을 이용했을 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일어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상실했던 일부 지역을 수복하려는 기대를 갖고 프로이센 편에서 싸웠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1690년대 이래로 그래왔던 것처럼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

이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빠르게 유럽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갔다.

인도에서 영국의 동인도회사 East India Company(EIC)는 프랑스에게 마드라스 해안 Madras coast(지금의 첸나이 Chennai)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 뉴잉글랜드의 영국 식민지인은 어업과 해운업에 대한 프랑스의 간섭을 중단시키고자 케이프브레턴 섬 Cape Breton Island에 있는 프랑스의 중요한 요새 루이보로 Louisbourg를 점령했다.

1748년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마드라스를 되찾았고 루이보로를 프랑스에게 돌려주었다.

 

8년 뒤 프로이센이 또다시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 식민지를 둘러싼 갈등은 다시 점화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프로이센이 스스로 영국과 연합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 Russia 양쪽에서 지원을 받았다.

이 7년 전쟁(1756~1763)은 유럽에서 교착 상태에서 끝났다.

하지만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이 전쟁은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인도에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용병이 프랑스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원주민 연합 세력과 제휴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영국군이 루이보로와 궤벡 모두를 점령했고 오하이오 강 Ohio River 계곡과 오대호五大湖 Great Lakes로부터 프랑스 군대를 몰아냈다(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이 전쟁을 '프랑스-인디언 전쟁 French and Indian War, 1754~1763'이라고 한다).

7년 전쟁의 종식을 가져온 1763년의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캐나다 Canada와 인도를 모두 영국에 양도했다.

6년 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폐쇄되었다.

 

 

○아메리카 혁명

 

대서양 연안을 따라 급속하게 성장하던 영국 식민지들은 런던 London에 지배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영국 의회는 7년 전쟁의 비용 일부를 충당하고 식민지 백성을 보호하는데 들어가는 지속적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들 세금은 즉각적인 불평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지인은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동의 없이 과세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며, 이러한 과세가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식민지 무역에 대한 영국의 규제에 불만을 터트렸다.

그들은 특히 영국이 특정 상품을 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옮겨 싣기 전에 먼저 영국의 항구를 거쳐야 한다는 요구사항이 아메리카인의 생계를 옥죄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국왕의 적법한 세금 납부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불평했다.

 

1760년 이후 젊고 경험 없는 조지 3세 George III(재위 1760~1820)가 이끄는 영국 정부는 이런 식민지들의 불만에 계획적인 우유부단함과 무력이 서투르게 혼합된 방식으로 대응했다.

다양한 세금이 부과되었지만 날선 식민지의 저항에 직면해 철회되었다.

하지만 차(다茶) tea에 세금을 부과한 적이 있는 세관에 반대하는 반항적인 식민지인이 1773년 동인도회사의 차를 보스턴 Boston 항구에 던져버렸을 때 영국 정부는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식민지 대의기구의 활동을 축소시켰다.

이른바 '탄압법들 Coercive Acts'은 매사추세츠 Massachusetts를 위한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활기찬 지원을 불러일으켰다.

1774년 모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온 대표들이 자신들의 불만에 대해 국왕과 협상하기 위한 대륙회의大陸會議 Continental Congress를 열고자 필라델피아 Philadelphia에 모였다.

하지만 1775년 4월 렉싱턴 Lexington과 콩코드 Concord의 지방 민병대는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고자 파견된 영국군 정규군과 충돌했다.

곧이어 대륙회의는 군대를 모으고 영국 정부에 대항하는 공공연한 반란을 시작했다.

 

1776년 7월 4일 13개 아메리카 식민지는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 전쟁의 첫 2년 동안 독립은 실현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1713년 이래로 확립해온 영국의 식민지 패권이 잠식되기를 열망하는 프랑스가 1778년 아메리카인 편에 서서 전쟁에 가담했고, 에스파냐는 지브롤터 Gibraltar와 플로리다 Florida(플로리다는 1763년에 영국에게 빼앗김)를 되찾으려는 기대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며 참전했다.

1780년 영국은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와 무역을 계속한다는 이유로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제 식민지 경쟁국의 연합에 직면한 영국은 이 전쟁을 자국에 대해 거역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1781년 프랑스와 아메리카 연합군은 육상 및 해상 연합 작전으로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Yorktown에서 영국군 주력 부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패배한 영국 병사들이 무기를 내려놓자 영국군 군악대는 <거꾸로 뒤집혀진 세계>라는 제목의 노래를 연주했다.

 

평화 협상은 요크타운의 패배 직후에 시작되었지만 1783년 9월까지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파리 조약 Treaty of Paris'으로 영국의 캐나다와 지브롤터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게 했다.

에스파냐는 미시시피 강 Mississippi River 서쪽 지역의 영토를 보유했고 플로리다를 되찾았다.

미국은 독립을 획득했고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 서쪽 경계를 확정했으며 캐나다 동쪽 해안에 이르는 값진 어업권을 확보했다.

프랑스는 단지 식민지 경쟁국을 패배시킨 것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다.

6년 뒤 아메리카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사용한 대규모 채무로 말미암아 프랑스에서는 유럽 역사를 영구적으로 바꾸게 될 또 다른 매우 상이한 프랑스 혁명 French Revolution이 일어났던 것이다.

 

15장 결론

아메리카 독립 전쟁은 식민지 지배권을 둘러싼 영국과 프랑스의 1세기에 걸친 투쟁 중 최후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그러나 1783년 영국의 패배는 예상보다 훨씬 적은 효과를 낳았다.

아메리카의 독립 이후에도 대영제국은 이전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에 대해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남았다.

한편 세계의 다른 곳에서 영국이 이미 확립해놓은 통상 지배권은 계속 성장했다.

노예제에서 얻어지는 이윤은 확실히 18세기 영국 경제에 활력을 주었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러 영국의 무역과 제조업은 최고 수준의 생산성에 도달했고, 노예무역의 폐지(1808)와 노예제의 폐지(1833)조차 영국의 계속적인 성장을 막지 못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경제적 번영은 북서 유럽 전역에 걸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1750년 이전에 비해 이후의 유럽 전체 인구가 한층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개선된 수송 체계, 한결 더 안정적인 식량 공급, 늘어나는 소비재의 양 등에 힘입어 상당수 유럽인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주었다.

인구는 특히 도시에서 빠르게 증가했다.

이들 도시에서는 새로운 도시 중간 계급이 등장해 그들의 취향이 상품 시장의 형성을 촉진하고 그들의 여론이 사상의 체계를 다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유럽의 번영은 매우 불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부자와 빈자가 분리된 구역에서 분리된 삶을 살았다.

시골에서는 당대의 발전하는 상업 경제가 비껴지나간 지역들이 16세기와 17세기에 그랬던 것처럼 계속 기아와 기근에 시달렸다.

동부 유럽에서는 많은 농민층이 19세기 말까지 지속될 새로운 형태의 농노제에 처하게 됨에 따라 부자와 빈자 사이의 대비는 한층 더 극단으로 치달았다.

전쟁 역시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유럽의 식민 제국이 세계적으로 퍼진 또 다른 결과로 세계 도처에서 몇십만 명의 사람에게 죽음과 파괴를 가져다주면서 유럽인의 생활에서 현실로 남아 있었다.

 

정치적 변화는 좀 더 점진적이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정부의 권력이 꾸준히 커졌다.

행정가의 수는 늘어났고 한층 효율적이 되었으며, 그들이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정부가 신민의 복지에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책임을 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영역이 넓어짐에도 불구하고 정부 구조와 원리에는 상대적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을 제외하면 18세기 유럽의 강대국은 여전히 프랑스의 태양왕 Le Roi Soleil(영어 The Sun King) 루이 14세 Louis XIV의 예를 따라 절대군주를 자처하는 통치자들이 지배했다.

하지만 1789년에 이르러 유럽인이 사는 세계는 1세기 전 태양왕이 유럽 정치를 지배하던 때와는 엄청나게 상이한 곳이었다.

그 차이점들의 상세한 내용은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3. 1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