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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조선 왕실의 어보와 국새 본문
"국가의 권위와 왕가의 존엄은 여기서 나온다"
조선왕조는 기록 문화에서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나라였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이 이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기록 유산이자 뛰어난 공예품이 있는데 바로 어보御寶이다.
어보는 왕실에서 제작한 의례용 도장이다.
예를 들어 왕세자로 책봉되면 '왕세자인王世子印', 왕비로 받아들여지면 '왕비지보王妃之寶'라는 도장을 만들어주었다.
또 왕과 왕비의 덕을 기리는 존호尊號가 내려지거나 돌아가신 뒤 시호諡號(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올리게 되면 그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어책御冊을 함께 제작하여 바쳤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어보를 종묘의 해당 신실神室(위패나 지방과 같은 신위神位를 모신 방)에 보관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조선왕실에서 어보 366과顆(도장이나 사리의 개수를 세는 단위)를 제작하였고 그중 324과가 전한다.
국립고궁박물관에 316과, 국립중앙박물관에 4과, 고려대학교박물관에 2과,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1과, 그리고 최근 미국에 유출되었던 것을 문화유산국민신탁(법인)이 구입하여 문화재청에 기탁한 1과 등이며, 나머지 42과의 소재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어보는 기본적으로 거북이나 용 모양의 손잡이에 끈이 달려 있는 도장이다.
대개 높이 9센티미터, 무게 4킬로그램으로 옥돌로 만들거나 은과 구리를 섞어 만든 다음 금으로 도금하였다.
도장에 새긴 글자는 적게는 4자, 많게는 116자에 이른다.
어보는 보자기에 곱게 싸서 내함內函(속통)에 넣고, 내함을 다시 보자기로 싼 뒤 외함外函(겉통)에 넣고는 한약재로 된 방충제를 넣어 자물쇠로 잠가서 보관했다.
때문에 하나의 어보는 도장 이외에 내함, 외함, 자물쇠 그리고 3개의 보자기와 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어보 일괄 유물은 한결같이 제작 연대가 명확히 뛰어난 금속공예품이고, 목칠공예품이며, 직조물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공예사의 흐름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조선왕조의 궁중 문화유산인 어보가 300여 점이나 남아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대개 사람들은 어보를 국새國璽로 생각하는데 어보와 국새는 엄연히 다르다.
국새는 왕명과 외교문서에 찍는 인감으로 국왕의 상징이다.
국새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곧 왕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이 국새를 화씨벽和氏璧(중국의 화씨가 발견한 구슬로 천하의 보물을 뜻함)으로 만든 뒤, 옥새玉璽(옥으로 만든 인감)는 황제의 상징이 되었고 제후격인 왕의 국새는 금인金印으로 만들었다.
중국은 국새를 통해 주변부 국가를 외교적으로 통제하였다.
주변부 국가에 국새를 내려줌으로써 동아시아의 지도자(리더) leader로서 각국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외교적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서기 57년, 왜의 '나노쿠니(노국奴國)'의 왕이 후한 황제에게서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금인을 받음으로써 국제사회에 처음 등장하였다.
고려는 송宋, 요遼, 금金, 원元, 명明에서 금인을 받아 국새로 썼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돌려주고 새 국새를 받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03년(태종 3)에야 비로소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금인을 받았다.
그런데 국새는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국왕지인'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만 사용하였고 국내 문서에는 그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금인을 사용하였다.
임금의 명을 내린 교지敎旨에는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인장을 찍었다.
임금의 뜻을 내린 글에는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 관련 문서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라는 인장을 사용했다.
정조 때는 왕이 지은 글에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인장을 찍었다.
일본과의 외교문서에는 별도로 소신지보昭信之寶라는 인장이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이덕보以德寶라는 인장을 찍었다.
우리의 국격이 더 높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국새들은 도승지都承旨(요즘의 대통령 비서실장)의 책임 아래 상서원尙瑞院에서 관리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에는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끝내면서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국새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다시는 국새가 사용되지 않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분실되었다.
정부 수립 후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새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몇 차례 개조하였고, 근래에는 가짜 국새 공예가 문제되어 새로 제작하는 사건도 있었다.
대한제국 시절 국새는 근 100년 동안 행방을 모르다가 지난 2008년 12월, 문화재청이 미국의 한 수장가에게서 고종황제가 사용한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국새를 구입하였다.
외함은 분실된 채 내함과 함께 입수된 이 국새는 전체 높이 4.8센티미터, 무게 794그램으로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 끈이 달려 있다.
형식 자체는 종묘에 전해오는 300여 점의 어보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어보는 왕실 의례용 도장이고 국새는 제국의 상징이니 형식은 같아도 의미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대한제국의 상징적 인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5. 3. 1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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