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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1: 서론 및 과학혁명의 지적 기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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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1: 서론 및 과학혁명의 지적 기원

새샘 2025. 3. 22. 08:04

1543년 지동설 발표로 17세기 과학혁명의 불을 지핀 코페르니쿠스(출처-https://www.worldhistory.org/image/13007/nicolaus-copernicus-by-jan-matejko/)

 

16장 서론

 

"그대는 별들이 불이 아닐까 걱정하노라,

그대는 태양이 움직일까 걱정하노라,

진리가 거짓말쟁이가 될까 걱정하노라,

하지만 나는 사랑한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으리니.

 

-셰익스피어, ≪햄릿≫ 2막 2장.

 

"그대는 별들이 불이 아닐까 걱정하노라. 그대는 태양이 움직일까 걱정하노라."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우주에 대한 예전부터의 이해를 뒤흔들어놓을지도 모를 새로운 사상을 암시하고 있는가?

≪햄릿 Hamlet≫(1600년 무렵 출판)은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1543)에서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암시한 지 50년 이상 후에야 집필되었다.

이 이론들 즉 지동설地動說이 유럽의 일부 식자층 사이에서만 회자되었더라도 셰익스피어는 아마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필리아 Ophelia를 향한 햄릿의 애절한 고백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이 이론들은 추측이나 이상한 수학적 가설로 생각되었다.

이 이론들은 전통적인 학설과는 절대적으로 상충되었고, 아주 중요하게는 상식과 관찰에 도전했다.

유식한 철학자, 젊은 연인들, 양치기, 선원은 똑같이 태양과 별들이 날마다 밤낮으로 한쪽 지평선에서 떠서 다른 쪽으로 지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의 사상가들은 기존의 천동설天動說에 의혹을 품었다.

셰익스피어는 갈릴레이 Galileo Galilei(1564~1642)와 같은 해인 1564년에 태어났다.

영국의 극작가와 이탈리아의 철학자가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에 우주에 관한 지식을 수정하고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는 기나긴 과정이 진행 중이었다.

100년 뒤인 17세기 말 무렵 새로운 관점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지적 변화는 유럽 철학과 자연계 및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위치에 대한 서구의 관점에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科學 science'은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를 필요로 한다.

지식, 연구 방법이나 체계, 연구자들의 공동체 및 연구자와 연구를 지원하는 기관이 바로 그것이다.
17세기의 '과학혁명'(16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1687년 뉴턴 Newton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절정에 달한 것으로 이해된다)은 이 세 가지 영역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우선 지식의 내용과 관련해 과학혁명은 태양 중심적 천체관이 어떻게 지구와 나아가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몰아내면서 대두하고 확립되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그러한 관점을 기술하고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수학적 물리학을 발전시켰다.

둘째, 과학혁명은 자연계를 이해하기 위한 탐구 방법을 확립했다.

구체적으로 관찰, 실험, 가설 검증을 강조했다.

셋째, '과학'이 지식의 독특한 한 분야로서 등장했다.

이 장에서 다루는 기간 동안 사람들은 물질, 운동, 광학光學 또는 혈액 순환 등에 관한 연구를 자연철학(보다 더 이론적인 용어), 경험철학, 의학, 나아가 점차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과학적 연구라고 부르는 것에 기여하는 학회와 기관들의 발전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변화의 중심이었다.

과학은 탁월한 사상가뿐만 아니라 후원자, 국가, 연구자 공동체를 필요로 했기에 과학혁명은 그 밖의 사회적·종교적·문화적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혁명은 조직적인 활동은 아니었다.

때때로 벽에 부딪친 이론들, 우연한 발견들,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렌즈 lens를 연마하던 장인들이 분명 위대한 관념적인 사상가들만큼이나 지식의 진보에 기여했다.

개개의 사상가가 자신의 발견을 자신의 신앙에 일치시키거나 자신의 이론(예를 들면 지구의 운동에 관한 이론)을 기존의 지혜와 조화시키고자 투쟁함으로써 낡은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이 종종 중첩되었다.

과학이 대중적으로 이해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학은 반드시 종교의 토대를 침식시키지 않았고, 확실히 그럴 의사도 없었다.

예컨대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1642~1726)은 자신의 연구가 종교적 믿음을 확실하게 해주고 독실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변화는 서서히 그리고 단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방법이 자연의 작용에 대해 새로운 급진적인 통찰을 만들어내자 과학은 마침내 그것을 시작했던 실험가, 신학자, 철학자의 작은 집단을 넘어서 널리 수용되게 되었다.

 

 

◎과학혁명의 지적 기원

 

과학혁명(1543~1687)
      코페르니쿠스, ≪천체의 회전에 관해≫
     티코 브라헤, 우라니보르그 천문대 세움
     케플러, ≪새로운 천문학≫에서 자신의 법칙을 개진함
     갈릴레이, 별의 사자使者≫ 출간
     베이컨, 신논리학 출간
     갈릴레이, 두 가지 주요 세계 체제에 관한 대화편 출간
      데카르트, 방법 서설≫ 출간
     뉴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출간
1543년
1576년
1609년
1610년
1620년
1632년
1637년
1687년

 

 

과학혁명은 중세와 근대 세계 사이의 결정적인 분기점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 모든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과학혁명은 이전의 발전에서 비롯되었다.

중세의 예술가와 지식인은 최소한 12세기 이래로 대단히 정확하게 자연계를 관찰하고 묘사했다.

중세의 조각가들은 놀라울 정도의 정확성으로 풀과 나무, 그리고 덩굴식물을 조각했고, 15세기의 화가와 조각가는 인간의 얼굴과 외관에 대해 동일한 세심한 주의력을 기울였다.

16세기에는 관찰, 실험, 발명 사이의 연관성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나침반은 13세기 이래로, 화약은 14세기 초 이래로 유럽에 알려졌다.

당대의 지적 생활에 스며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인쇄술은 15세기 중엽 유럽에 전해진 이후 사상을 빠르게 전파시키고 협동 작업을 더욱 용이하게 해주었으며 도서의 구입과 도서관의 건설을 촉진시켰다.

이에 대해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1561~1626)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인쇄술, 소총, 나침반 이 세 가지 기계의 발견보다 인간사에 더 큰 위력과 영향을 행사한 그 어떤 제국이나 학파 또는 별은 없었다."

중세의 사상가에게 신적인 조명의 강력한 상징이었던 빛에 대한 매혹은 광학 연구와 나아가 새로운 렌즈 연마 기법을 촉진시켰다.

렌즈 연마사는 17세기의 망원경과 현미경 발명에 초석을 놓았으며 그 과정에서 돋보기를 만들어냈다.

점성술사 역시 별들이 인간의 운을 지배한다는 굳건한 믿음에서 별자리표를 만들면서 중세 후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자연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신이 자연계를 창조했다는 거의 보편적인 확신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믿음이 과학적 연구를 자극했다.

어느 학파(신플라톤주의자 Neoplatonist)의 사상가는 자연이란 인간에게 신의 길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창조자가 쓴 책이라고 주장했다.

신의 완전함이 자연에 반영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일상 세계의 '그림자' 이면에 놓여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관념과 완전한 구조를 탐색했다.

수학 특히 기하학이 이러한 탐구에서 중요한 도구였다.

예를 들어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는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르네상스(문예부흥) Renaissance 휴머니즘(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 또한 과학혁명이 기초를 놓는 데 도움을 주었다.

휴머니스트(인본주의자) Humanist의 교육 프로그램 program은 자연철학을 낮게 평가하며 고전기의 고대 문화유산의 회복과 연구로 방향을 돌리면서 고대 문명의 권위를 숭배했다.

하지만 휴머니스트들은 활발하게 고전 문헌들(자연계의 개념들에 대한 원천)을 복원하고 번역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수많은 중요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그리고 한층 더 많은 독자가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전에 유럽인들은 아랍권의 자료를 통해 고대 그리스 ancient Greece의 학문에 다가갈 수 있었다.

아랍어 Arabic로 번역된 그리스의 고전들은 중세 말 에스파냐 España와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의 학자들이 다시 찾아냈기 때문이다.

휴머니스트들이 그리스의 고전에 주목하고 새로운 문헌들이 보다 쉽게 인쇄되고 유통될 수 있는 상황은 새로운 연구와 논의를 촉진시켰다.

이슬람 Islam의 학자들은 유럽인 European보다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us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유럽인은 휴머니스트 학자이자 인쇄공인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 Johannes Regiomontanus(1436~1476)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연구를 발굴해 새로운 요약본을 출간한 이후에야 그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자연계는 거대한 기계처럼 기계적인 힘에 입각해 작동하며 그 힘은 수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주장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저작에 대한 휴머니스트의 재발견은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이를 비롯한 16세기 말과 17세기의 중요한 사상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17세기의 기계론 철학을 형성시켰다.

 

르네상스는 또한 수공업자와 지식인 사이의 협력을 촉진시켰다.

12세기와 13세기의 사상가들은 자연계를 관찰했지만 기계를 거의 만지지 못했거니와 실질적 이용을 위한 기계를 만드는데 더 전문기술을 발전시켰던 수공업자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하지만 15세기 동안 이 두 세계는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숙달된 장인이었다.

예컨대 그들은 원근법과 광학을 연구했고, 거대한 돔 dome(반구형 지붕) 양식의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기하학적 방법을 해결했으며, 인체를 연구하고, 새로우면서도 한결 효과적인 전쟁 무기를 고안했다.

르네상스는 연금술과 천문학의 유행을 가져왔다.

예를 들면 부유한 아마추어 amateur 천문가들은 천체 관측소를 세우고 별의 행로를 측정했다.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적·지적 발전이 과학혁명의 토대를 놓았다.

 

지리상의 발견을 위한 항해는 어땠을까?

16세기의 관찰자들은 종종 지구상의 발견을 우주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연결시켰다.

어느 갈릴레이 찬양자는 갈릴레이가 탐험 정신을 활발하게 해준다고 다음과 같이 썼다.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와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의 기억은 하늘이 지구보다 한층 더 고귀하듯이 당신을 통해 한결 더 고결해지면서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탐험은 그다지 깔끔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콜럼버스는 과학에 대한 흥미 때문에 탐험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유럽의 사상가들이 상이한 연구 분야에 신세계의 발견이 함축하는 것들을 처리하는 데는 여러 세기가 걸렸으며, 탐험 항해와 과학에서의 획기적인 진전 사이의 연결은 주로 간접적인 것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은 동식물에 대한 여행자의 상세한 설명으로 매우 풍부해진 자연사 분야에 가장 즉각적인 충격을 주었다.

아프리카 Africa나 아시아 Asia에서 새로운 땅과 문화를 발견하고,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성경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아메리카 America 대륙에 대한 의외의 새로운 사실의 발견 또한 유럽인이 계승해온 지식에 결함이 있음을 드러냈다.

이 점에서 신세계의 탐험은 고대인의 권위에 타격을 가했다.

 

요약하면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고대 문헌을 중세 말에 다시 발견한 것, 인쇄문화와 독서의 확산, 종교개혁에 뒤이은 교회의 혼란과 치열한 전쟁 및 정치적 책략, 탐험과 착취를 위해 대양을 가로지른 신세계의 발견 등 이 모든 것은 이전 사고방식의 권위를 뒤흔들어놓았다.

우리가 과학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도전을 둘러싸고 있던 지적 흥분의 일부였으며, 돌이켜보면 과학혁명은 이러한 그 밖의 발전들의 중요성을 드높여주고 확증해주는 것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3.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