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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창조는 복제에서 시작된다 '모방' 본문
우리는 물건의 가치를 평가할 때 진품 여부를 가장 먼저 따진다.
<TV쇼 진품명품>이나 미국 인기 예능 <폰 스타(전당포 스타들) Pawn Stars>(한국에서는 '전당포 사나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됨)처럼 골동품 값을 매기는 프로그램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지점은 진품 여부다.
진품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무한정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digital 사회가 도래해도 여전하다.
오히려 인터넷 Internet 상의 디지털 파일 file이 '대체 불가능 토큰 Non-Fungible Token, NFT)'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거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2021년 크리스티 Christie's 경매장에서 '비플 Beeple'이라는 무명의 화가가 컴퓨터로 작업한 <매일: 첫 5,000일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이라는 작품은 무려 690만 달러(한화로 약 91억 원)라는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실물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작품만은 고유함을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방한 것은 진품과 견줬을 때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일까?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끊임없이 신기술과 신제품을 모방하면서 점차 발전시켜왔다.
고고학 유물들은 모방과 창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가품으로 만든 칠기, 중국을 구하다
가품은 진품의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기 어려울 때 만들어진다.
서기전 206년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기쁨도 잠시, 흉노를 복속하고자 치른 백등산白登山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후 흉노와 화친을 맺었으나 약 200년 동안 해마다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가 흉노에게 바친 공물로는 공녀를 비롯해 진귀한 과일과 고급 술 등 그 목록이 다양하다.
그런데 흉노인들이 진짜 좋아했던 물건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칠漆그릇이다.
중국의 칠그릇은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 표면에 옻칠을 한 것이었는데 양쪽 주둥이에 손잡이도 달려 있고 매우 가벼웠다.
휴대성이 좋으니 북방 유목 민족에게는 안성맞춤인 물건이었다.
흉노에게 공물로 진상된 칠기는 중국 안에서도 최그급 명품이었다.
흉노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칠그릇들은 모두 바닥에 중국 황실 직속 공방에서 만들어졌음을 증명하는 내용을 비롯해 해당 칠그릇을 제작한 여섯 명의 장인 이름도 차례로 적혀 있었다.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다.
이른바 '제작 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칠그릇이 발견된다.
'노용-울 Noyon uul'이라는 흉노의 왕족 고분에서 다른 칠그릇들에 비해 색감이나 마무리가 조금 미흡해 보이는 것이 발굴된 것이다.
그릇 뒷면 표기도 조금 달랐다.
이 칠그릇에는 휘갈겨 쓴 글씨로 당시 한나라 궁궐을 가리키는 표현인 '상림上林'이라는 글씨가 함께 적혀 있기는 했지만, 해당 칠그릇을 만드는데 참여한 장인의 이름이 세 명만 적혀 있었다.
다른 칠그릇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토대로 판단했을 때, 이 칠그릇은 중국 황실 직속 공방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 사제 공방에서 만들어져 납품한 가품이었을 확률이 컸다.
당시 흉노가 요구했던 조공의 물량이 엄청나다 보니 한나라 황실 재정에 막대한 피해가 갔다.
공물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났을 정도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황실 직속 공방이 아니라 사제 공방에 하청을 주고 공물용 칠그릇을 납품받은 것이다.
품질 면에서 다소 떨어졌지만 공물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200여 년 동안 꾸준히 흉노에게 조공을 하며 굴욕적인 화친 정책을 지속하던 한나라는 한 무제에 이르러 강력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면서 흉노를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가품 공물들은 가히 '중국을 구한 가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나라의 청동거울을 모방한 우리나라의 방제경

적절한 모방은 그 물건이 널리 사용되고 보급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고조선 멸망 뒤 한반도 남쪽의 거수국들은 중국과 직접 교역하게 되는데 삼한의 우두머리들은 중국에서 사온 관리의 옷과 도장을 비롯해 중국제 명품을 무척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인기가 있던 제품은 청동거울이었다.
한나라의 청동거울은 중국 안에서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청동거울의 뒷면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둥그런 모양이 태양 같아서 행복과 부를 상징했다.
청동거울은 일본에서도 인기가 있었는데, 야오이(미생弥生/彌生)시대 무덤에서는 청동거울이 같은 장소에도 몇 개씩 발견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중국 명품의 수요가 많아지자 그 대안으로 청동거울을 모방한 제품이 널리 제작,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명 '본뜬거울'이라고도 불리는 방제경倣製鏡이다.
방제경은 특히 약 2,000년 전 무렵 삼한이 있던 경상남도 일대에서 널리 유행했다.
얼핏 보면 한나라 청동거울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무늬가 조잡해서 차이가 난다.
거울 뒷면의 무늬는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아무 필요가 없다 보니 문양이 다소 거칠더라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만들어 널리 사용한 것이다.
방제경 덕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거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방제경은 경기 하남시 미사리에 있는 초기 백제시대의 집터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이제 청동거울이 살아생전 귀하게 사용되다가 무덤에 함께 묻히는 물건이 아니라 집에서 쓰다가 그냥 버릴 정도로 흔한 물건이 되었음을 뜻한다.
이쯤 되면 방제경은 청동거울의 어설픈 가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보다는 청동거울이란 실용적인 도구를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보급형으로 발전된 형태가 방제경이라 봐도 좋을 듯하다.
심지어 방제경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흑해 연안이나 우크라이나 Ukraine에서도 발견되었다.
비단길(실크로드) silkroad을 통해서 교역이 왕성해지면서 중국제 물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이를 본뜬 방제경이 유통되었던 것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금관이 가품이었다?
앞서 올린 '도굴' 글(https://micropsjj.tistory.com/17041270)에서도 살펴보았지만, 값나가는 유물에 눈이 멀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도굴이 무덤 따위의 유적지에서 발굴되기 전 문화유산을 훔쳐가는 행위라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노리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인 금관은 문화재 도둑들의 단골 타깃 target(표적)이었다.
할리우드 Hollywood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국보 절도 사건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는데 두 사건 모두 신라 금관이 타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신라 금관이 최초로 발굴된 것은 '신라 금관' 글(https://micropsjj.tistory.com/17041246)에 언급했듯이 1921년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여 년 전이다.
일제강점기에 신라 금관은 모두 세 개가 발견된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한 뒤 미군정 시기를 거쳐 남북한에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되는 일련의 혼란한 시기를 겪는 동안 이 금관들을 두고 한몫을 챙기려는 이들에 의해 도난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 도난은 1949년 5월 12일에 발생했다.
당시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서봉총과 금령총의 금관이 도난을 당한다.
박물관의 경비를 뚫기 위해 범인은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범인은 박물관 휴관일에 맞춰 신라 금관이 진열된 전시실 뒷물을 깨고 들어와 진열장 자물쇠를 능숙하게 뜯고 금관 두 점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금관은 안전했다.
경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박물관 측에서 진품은 따로 보관해주고 가품을 진열해두었던 것이다.
김재원 당시 국립박물관 관장은 한 매체와의 기자회견(인터뷰 interview)에서 이렇게 말했다.
"훔쳐간 금관은 발굴 직후 이왕직 미술제작소(대한제국 시절 왕가의 보물을 관리하던 곳)에서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에 금빛을 칠한 것이오. 그 귀한 금관 진품을 어찌 우리가 사람들이 다 보는 진열장에 내 놓겠소? 진짜는 모처에 잘 있으니 걱정 마시오."
하지만 박물관장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복제품을 진열한 까닭에 진품이 도난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진열된 금관이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전시를 했던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또한, 도난당한 물건이 진품이든 복제품이든 간에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박물관의 유물이 쉽게 도난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문책을 당할 사안이었다.
이후 빠르게 수사가 이루어졌는데, 도둑이 박물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과 전시장의 자물쇠를 정확히 노린 점에 주목해 내부 소행으로 방향을 잡고 용의자를 찾아냈다.
사건 발생 4일 만에 잡은 범인은 놀랍게도 당일 박물관 경비를 보았던 장철이라는 인물과 그 일당이었다.
장철은 이미 전과 3범의 품행이 나쁜 자였으나 해방 직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그의 전과 사실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복역 중인 형무소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절도 전과자인 권정학과 결탁해 자물쇠를 뜯을 장비도 직접 마련하여 절도를 저질렀다.
두 범인을 잡았을 때 이미 금관은 다른 장물아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도난 당한 금관 모조품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범인까지 잡힌 마당에 굳이 '가짜' 유물을 힘들여 찾을 필요는 없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만한 큰 사건이었지만 사건 직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희대의 유물 도난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두 번째 금관 도난 사건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6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후 '경주박물관'으로 표기)에서 벌어졌다.
이때도 도둑들이 훔쳐간 금관은 복제품이었다.
사실 박물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복제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만약 복제품을 전시한다면 그에 대한 안내문을 달아주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열된 유물이 복제품이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으면 도둑이 훔치러 올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경주박물관은 왜 복제품 금관을 진품인 양 버젓이 전시했을까?
여기에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깊은 사연이 있다.
1950년 7월,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의 위세에 눌려서 남한 정부는 대구를 임시 수도로 삼게 된다.
북한군의 진격에 우리 국군의 방어선은 점차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와 같은 전황에 따라 서울, 공주, 부여 등에 있던 박물관도 속수무책으로 북한 손에 떨어졌다.
심지어 당시 국립박물관장이었던 김재원은 제대로 피난도 못한 채 북한의 치하가 된 서울에 계속 남아 있어서 생사마저 불투명하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낙동강 전선에서 얼마나 더 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부는 마지막으로 남은 경주박물관의 유물마저 북한 수하에 들어갈 것을 걱정했다.
이에 정부는 신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국보급 유물 120여 점을 비밀리에 미국 화물선에 실어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뱅크 오브 아메리카 Bank of America의 지하 창고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국보급 유물의 미국 이동 계획(프로젝트 project)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전쟁 중에 국보급 문화재들이 비밀리에 한국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되면 엄청난 동요가 일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시 상황이 이내 호전되어서 1951년 경주박물관은 다시 개관한다.
이때부터 경주박물관 직원들의 고심이 시작되었다.
신라 금관 없는 경주박물관은 단팥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였다.
금관 진열실에 정작 금관이 없으니 금관이 미국으로 건너간 사장을 알 리 없는 경주 시민들의 문의가 빗발치는 것은 당연했다.
금관이 미국에 있다는 것은 기밀이었느니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이데 경주박물관의 직원 박일훈은 한 가지 꾀를 낸다.
그는 모조품을 만들어서 전시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손끝이 야무졌던 박일훈은 가계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가내수공업 형태로 유물을 주제(모티브 motive)로 한 기념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유물을 복제하려면 실물을 보고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실물 금관은 미국으로 건너가 있으니 참고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박일훈은 1952년 봄,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금령총과 서봉총에서 발굴된 금관을 실측하고 이를 토대로 모조품을 만든다.
이 금관 모조품의 만듦새가 얼마나 감쪽같았던지 그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요즘이라면 관객을 기만하는 행위였지만 당시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도 했고 사회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라 큰 문제없이 조용히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4년여의 시간의 흐른 뒤인 1956년 3월 7일, 두 번째 금관 도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금관고 경비 담당자는 진열실의 자물쇠도 잠그지 않고 외출을 했다가 그냥 퇴근을 해버리는 어처구이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는데, 그 틈을 타서 도둑이 침입했고, 금관 두 점을 도난당했다.
아마도 경비는 금관이 모조품인 것을 알고서 평소 관리를 소홀히 했던 것 같다.
금관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도둑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황당한 모조품 도난 사건이 터지자 박물관과 경찰은 즉시 박물관에 진열 중이었던 금관이 모조품임을 널리 알린다.
하지만 진품이 미국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박물관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다고만 했다.
참고로 미국에 있던 진짜 금관은 1959년 한국으로 무사히 되돌아왔다.
그때까지 다행히 경주박물관의 거짓말은 들통나지 않아서 유야무야 잘 넘어갈 수 있었다.
모조품 금관을 훔친 불쌍한 도둑들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7개월 뒤인 10월이 되어서야 붙잡혔다.
이들은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2인조 절도단으로, 다른 절도 건으로 잡혀서 여죄를 추궁당하다가 금관을 훔친 사실을 고백했다.
첫 번째 금관 도난 사건 때와 같이 이들이 훔쳐간 모조품 금관도 끝내 찾지는 못했다.
범인들은 금관이 모조품이라는 뉴스를 듣고 실망해서 경주 서천 모랫바닥에 묻어버렸다고 진술했다.
범인들이 붙잡힌 때는 장마철이 지난 가을이이었기에 모랫바닥에 묻힌 모조품 금관은 이미 장맛비에 쓸려나간 상태였다.
모조품이다 보니 다시 찾아왔다고 해도 유물로 대접은 못 받았겠지만, 이를 둘러싼 얘깃거리(스토리 story) 때문에 아마 실제 금관 못지않게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짜와 복제품은 비슷해 보이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가짜는 거짓인 것을 참으로 꾸민 것이다.
복제품은 본디의 것과 똑같이 본떠 만든 물품으로 여러 부득이한 상황에서 진품을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
가령, 전 세계에 로제타석 Rosetta石(로제타돌)은 단 하나뿐이다.
진품 로제타돌은 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자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로제타돌은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이다.
대영박물관의 진품을 보여줄 수 없는 박물관에서는 복제품을 만들어 진열할 수밖에 없다.
만일 진품이 아예 사라졌거나 파괴되었을 경우, 복제품은 진품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후 한국에서 벌어진 복제품 금관 도난 소동은 고고학자로서 입맛이 쓰다.
당시 한국 사회는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유행가의 한 구절처럼 여기저기에서 가짜가 횡행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매우 낮아서 황금 유물이라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절도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복제품을 전시했던 덕분에 두 차례나 일어난 국보급 유물 도난 사건의 결말은 해피엔딩 happy ending이었지만, 사건의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방과 한국전쟁 직후 우리 사회의 혼란했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복제와 모방에 담긴 인간의 욕망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 Wlater Benjamin(1892~1940)은 예술에서의 '아우라 Aura'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처음 사용된 이 용어는 '어떤 예술 작품이나 물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모방할 수 없는 특유의 기운'을 가리킨다.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 한 가지 요소가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벤야민의 생각이었다.
가령, 콘서트홀 concert hall(음악당)에서 듣는 오페라 opera(가극歌劇)와 오디오 audio(음향장치)로 재생해서 듣는 오페라는 현장성 등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가 곧 해당 작품의 가치로 환원된다.
하지만 기존의 것을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인류가 예술을 비롯해 여러 영역에서 발전해왔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을 흉내 내고 복제해왔다.
그 복제의 대상에는 인간이 만든 물건 외에도 다양한 동물과 자연현상도 포함되며, 이들의 특징을 포착해 모방함으로써 인간의 예술과 종교가 탄생했다.
독일 Germany 홀렌슈타인-슈타델 동굴 Hohlenstein-Stadel Cave 유적에서는 상아로 만든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이 조각상은 약 4만 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물상으로, 사자의 머리를 한 샤먼 shaman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도 구석기시대 샤먼을 표현한 예술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조각상들은 공통적으로 짐승의 형태를 모방해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당시 샤먼은 다양한 동물의 모습으로 빙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인들은 자연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에게 신을 부르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앞서 살펴본 여러 예시들처럼 모방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단순히 가짜 내지 아류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 역사에 순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진품에 열광한다.
원본과 복제품의 차이가 전혀 없는 디지털 세계에서마저 '대체 불가능'하다고 표시를 해둔 진품이 등장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원본에 대한 이런 갈망에는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세상 모든 것의 기원, 흐름출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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