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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7장 계몽주의 1: 서론 및 계몽주의의 기반 본문
17장 서론
1762년 프랑스 툴루즈 Toulouse in France의 지방법원(하위 법원)은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장 칼라스 Jean Calas(1698~1762)를 기소했다.
칼라스는 프로테스탄트교도(개신교도) Protestant였기 때문에 가톨릭교 Catholicism와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 Protestantism 사이의 긴장이 그 지역에서 고조되고 있었다.
법정에 불려온 증인들은 칼라스의 아들이 가족과 결별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싶어 했다고 증언하면서 칼라스가 프로테스탄트교 신앙을 배반하려는 아들을 아예 죽인 것이라고 치안판사가 확신하게끔 만들었다.
칼라스는 두 번 고문을 당했다.
처음은 그에게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확실한 사형 선고의 의례적인 절차로서 공범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팔과 다리는 서서히 잡아 당겨졌고 몇십 리터의 물이 목에 들이부어졌으며, 몸통이 공개적으로 바퀴에 짓이겨졌다.
이것은 그의 팔다리가 쇠막대로 결딴나는 것을 뜻했다.
그런 다음 망나니는 그의 목을 베었다.
재판, 고문, 처형의 전 과정에서 칼라스는 결백을 주장했다.
2년 뒤 지방법원은 평결을 뒤집고 칼라스가 무죄임을 선언하고 가족에게 보상금의 지불을 제안했다.
볼테르 Voltaire라고 알려져 있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t(1694~1778)는 칼라스에 대한 평결과 처벌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볼테르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프랑스어로는 뤼미에르 Lumières: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위하여 '이성理性 reason의 힘'으로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18세기 시대 사조) 사상가였다.
연줄이 많고 이미 여러 권의 저술을 갖고 있는 볼테르는 칼라스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는 친구들과 접촉하고 칼라스의 가족을 위해 변호사들을 고용하고 이 사건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하기 위해 사건 적요서, 편지, 논문 등을 썼다.
칼라스 사건은 볼테르가 자신의 문화에서 반대했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불관용, 무지, 그리고 볼테르가 전 생애게 걸쳐 종교적 '광신주의'와 '파렴치 행위'라고 부른 것 등은 모두 정의를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부탁하건대 칼라스를 위해 그리고 광신주의에 대항해 도처에서 외치시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불행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파렴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계몽주의 사상가인 친구 장 르 롱 달랑베르 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에게 편지를 썼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문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몇 세기에 걸친 관행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비밀 심문, 비공개 재판, 즉결 재판(칼라스는 상위 법정의 재심리 없이 유죄 판결을 받은 다음 날 처형되었다), 야만적 처벌 따위가 포함된 법적 절차는 이성, 도덕성,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어떤 범죄자든 그가 비열한 사람일지라도 "인간이며, 당신들은 그가 흘린 피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있다"라고 썼다.
칼라스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논평은 계몽주의의 고전적 관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의적이고 억제되지 않은 권한의 위험성, 종교적 관용의 가치, 그리고 모든 일에서 법, 이성, 인간 존엄성의 우선적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볼테르는 그의 주장 대부분을 앞선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몽테스키외 Montesquieu(1689~1755)와 1764년에 ≪범죄와 형벌 Dei delitti e delle pene(영어 On Crimes and Punishments)≫을 펴낸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저술가 체사레 베카리아 Cesare Beccaria(1738~1794)에게서 빌려왔다.
볼테르의 명성은 철학자로서의 독창성이 아니라 작가이자 변호인으로서의 유능함과 광범위한 청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과 능력에서 온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대표였다.
◎계몽주의의 기반
계몽주의는 18세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지속된 18세기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살았고 활동했던 모든 사상가들이 계몽주의의 기치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인 잠바티스타 비코 Giambattista Vico(1668~1744) 같은 사람들은 계몽주의가 지지한 거의 모든 것에 반대했고, 프랑스의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1712~1778) 같은 사람은 계몽주의의 어떤 가치는 받아들였지만 다른 것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계몽주의의 유형은 나라에 따라 다르고 한 세기를 지나면서 각 나라 내부에서도 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지만 많은 18세기의 사상가들은 새롭고 흥미로운 지적 환경—'인류의 당黨'이 관습적인 풍습과 전통적 사고를 압도하는 환경—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 저작著作(책과 작품)들은 몇 가지 기본적 특성을 공유했다.
우선 그 저작들은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확신'을 특징으로 했다.
이러한 자신감은 과학혁명의 업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뉴턴 Newton의 물리학에 대한 세부적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을 때조차도 그의 방법은 다른 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본보기가 되었다.
자연은 연구·관찰·사고 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작동했다.
스코틀랜드 Scotland의 비범한 저술가인 데이비드 흄 David Hume(1711~1776)의 ≪인성론人性論 A Treatise of Hman Nature≫(1739~1740)과 ≪인간 오성悟性에 관한 철학논집 Enquiries Concering Human Understanding≫(1748)은 과학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가장 직접적인 연결을 마련해주었다.
뉴턴은 자연 현상에 대한 적확한 서술을 주장하면서 궁극적인 원인들에 대한 가설이나 추측을 거부했다(16장 참조).
흄은 종종 뉴턴의 언어로 과학적 법칙에 대한 유추를 끌어오면서 도덕·정신·정부 따위를 뉴턴과 동일한 엄밀함과 회의주의로 연구했다.
흄은 철학적 사고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가설과 체계에 대한 열망'을 비판했다.
그는 경험과 세심한 관찰이 대체로 그러한 체계가 의존했던 전제들을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흄이 예로 든 것 중 많은 것들은 잉글랜드의 토머스 홉스 Thomas Hobbes(1588~1679)가 자신의 정부관을 보강하는데 이용했던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이었다(14장 참조).
인간 오성悟性 understanding(지성이나 사고 능력)과 인간 이성理性 reason(진위眞僞, 선악善惡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의 활용은 어떤 정치적 상황을 필요로 했다.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1724~1804)는 자신의 고전적인 1784년의 논문<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동시대인들에게 "알려고 하라!"고 요구했다.
칸트에게 계몽주의란 '지적 독립 선언'을 의미했다(그는 '계몽주의를 스스로 깨달음 즉 자각自覺'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독단주의의 잠'에서 깨어나게 해준 것은 흄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족적인 미성숙'으로부터의 탈출이자 인류가 스스로 부여한 부모와 같은 상징, 즉 '가톨릭 교회와의 매우 뒤늦은 결별'이었다.
성숙함이란 한 개인으로서 '누군가의 안내 없이도 사고하기 위한 결심과 용기'을 의미했다.
이성은 전통과 기존 권위로부터의 자치나 자유를 필요로 했다.
계몽 사상가들은 과거로부터의 독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직계 선배들에게서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볼테르는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존 로크 John Locke를 자신의 '삼위 일체'라고 불렀다.
실제로 18세기 계몽주의의 많은 업적은 17세기의 위대한 저작들에 내포된 것들에 대한 번역·재출간·탐색 따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계몽 사상가들은 인간 오성에 대한 로크의 연구, 특히 그의 정치 철학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에서 많은 것을 이끌어냈다.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한 로크의 이론에 따르면 교육과 환경이 인간의 성격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모든 지식이 감각 작용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태어날 때의 인간 오성은 '백지白紙 tabula rasa(영어 blank state)'이며, 사물을 경험하기 시작할 때, 다시 말해 감각의 힘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떤 것이 오성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이었다.
로크의 추종자들에게는 중심 명제가 되기도 한 그의 출발점은 인간성의 선함과 완전함이었다.
18세기 사상가들은 로크에 입각해 교육敎育 education을 핵심적인 사업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교육이야말로 개인의 도덕적 향상과 사회적 진보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로크의 이론이 잠재적으로 한층 더 급진적인 의미, 즉 교육이 지위·성별·인종의 계급제도를 평준화해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오직 소수의 계몽 사상가들만이 그러한 평등주의적 주장을 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믿음이 거의 모든 계몽 사상가들의 두 번째 뚜렷한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셋째, 계몽 사상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야심만만했고 관심 영역이 광범위했다.
그들은 적어도 모든 지식의 조직 이상의 것을 추구했다.
일반 법칙에 도달하기 위한 특정 현상의 경험적 관찰을 의미했던 '과학적 방법 scientific method'은 모든 분야—인간사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까지—에 대한 연구 방법을 제공했다.
계몽 사상가들은 국가의 흥망을 지배하는 법칙을 알기 위해 증거를 수집했고, 이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에 도달하기 위해 정부 구조들을 비교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1688~1744)가 자신의 시집 ≪인간론人間論 Essay on Man≫에서 서술했듯이 "(아마도) 다른 여러 과학처럼 인간 본성의 과학은 소수의 뚜렷한 논점으로 환원되었고" 계몽 사상가들은 소수의 뚜렷한 논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들, 즉 지식과 오성, 자연사, 경제학, 정부, 종교적 믿음, 신세계 원주민의 관습, 인간 본성, 성적性的(또는 오늘날 우리가 젠더 gender라고 부르는)·인종적 차별 따위를 체계적인 방식으로 연구했다.
역사가들은 실제로 지식을 적용하고 지식 전파와 자유로운 공개 토론을 촉진시키려는 계몽 사상가들의 관심을 강조하는 의미를 계몽주의를 '문화적 프로젝트 Cultural Project'라고 불렀다.
계몽 사상가들은 프랑스의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1713~1784)가 썼듯이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계몽주의' 운동과 인간성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선배들의 이론적 관심과 많은 것을 공유하기도 했지만, 매우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독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
홉스와 로크는 17세기의 소규모 집단의 식자층을 위해 논문을 출간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볼테르는 희곡, 수필, 서간문 따위를 썼으며, 루소는 작곡도 하고 ≪고백록 Confession≫을 출간했으며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흄은 광범위한 독자층을 위해 역사를 집필했다.
영국의 어느 귀족이나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한 총독은 로크의 논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어느 중간계급 여성은 루소의 소설을 읽었을지도 모르고, 상점 주인과 수공업자들은 계몽주의를 반영한 인기 있는 팸플릿 pamphlet(소책자)에 정통할 수 있었다.
엘리트층 elite class(정예층) 사이에서 새로 형성된 '학회들'이 상금이 걸린 백일장을 후원했으며, 부유한 남녀들은 살롱 salon(상류 가정의 객실에서 열리는 사교적인 집회)에서 정세를 논했다.
바꾸어 말하면 계몽주의의 지적 업적과 목적은 18세기의 문화적 발전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었다.
이들 발전은 문자해독률의 확대, 성장하는 도서 시장, 독자층의 형성, 새로운 형태의 지적 교환, 일부 역사가들이 최초의 '공적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두 따위를 포함했다.
요약하면, 계몽 사상가들은 낡아빠진 관습, 믿음, 권위 따위를 밝게 빛나는 이성의 빛에 비추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마주했다.
그것은 종종 비평과 풍자를 의미했다.
그들은 관습과 전통에 대한 불경을 인간의 완전함과 진보에 대한 믿음과 결합시켰다.
그들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했고, 자연과 문화 또는 환경, 역사와의 관계, 인간의 성격과 사회관계에 대해 열정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계몽 사상가들의 개혁 프로그램은 즉각적인 정치적 함의含意(담긴 뜻)를 담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놀라운 정도로 짧은 기간에 대서양 세계 전역에 걸쳐 정부와 사회의 명제들을 바꾸어놓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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