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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60 - 살구나무 본문

동식물 이야기와 사진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60 - 살구나무

새샘 2025. 10. 7. 14:34

살구(출처-출처자료1)

 

살구나무는 봄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잎보다 먼저 연분홍꽃이 핀다.

초여름에 붉은 빛이 살짝 들어간 노란 열매가 열린다.

'행인杏仁'이라고 부르는 살구씨는 약으로 널리 쓰였다.

 

장미과 벚나무속의 갈잎 넓은잎 작은큰키나무 또는 큰키나무로서 높이 5~12미터까지 정도 자란다.

중국 원산이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 심어 키운다.

 

학명은 프루누스 아르메니아카 Prunus armeniaca, 영어는 apricot 또는 American plum(미국자두), 한자는 행杏(살구나무 행)으로 쓴다.

 

 

○고향의 살구나무

 

종묘의 살구꽃(출처-출처자료1)

 

필자가 살던 마을 한가운데에는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봄이 오면 동네 길가에 있는 살구나무가 먼저 꽃을 피우고, 그 뒤 며칠이 지나면 뒷산의 나무가, 또 며칠이 지나면 앞산의 살구나무가 꽃을 피웠다.

이것은 어느 해에나 다름이 없었는데, 이는 겨울이 가고 봄의 따스함이 찾아오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한 나무에서도 남쪽 가지는 북쪽 가지보다 더 빨리 꽃을 단다.

소나무들만 해도 숲의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는 숲 안에 있는 나무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정말 꽃은 봄의 온도계라고 할 수 있다.

 

살구꽃이 지천으로 나뭇가지를 둘러싸면 사람들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소녀들의 가슴은 더 큰 고동으로 채워지지만, 동네의 공기는 힘을 잃은 듯 차분해진다.

다만, 목을 길게 빼서 한 곡조 뽑아올리는 재래종 장닭의 노랫가락이 아지랑시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볼 뿐이다.

 

필자의 고향의 봄은 이 살구나무 꽃으로 대표할 수 있다.

이 나무 밑을 지나는 소녀들의 물동이 안으로 살구꽃잎이 몇 개씩 떨어질 때면, 그녀들은 이유 없이 한없이 수줍어진다.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은 우리 국민들이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많이 부르고 있는 노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필자가 살던 고향의 봄을 추억할 때 그 안에 수많은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버들강아지, 냉이뿌리, 개나리, 제비꽃, 얼레지, 바람개비 따위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많은 것들이 있다.

어느 하나도 봄의 단장으로서 버릴 것이 없다.

 

<고향의 봄>은 복숭아와 살구, 진달래의 진분홍 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확실히 봄은 분홍색으로 시작된다.

분홍색은 봄의 한창을 알리는 것이지만, 봄의 첫 번째 색은 노랑이다.

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에서 피는 노란 꽃들은 봄이 온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겨울이 지나면 노랑이 오고, 봄의 따스함이 고갯마루에 이르면 온 천지는 분홍이 된다.

분홍은 봄의 절정을 나타내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사람으로 친다면 홍안紅顔(붉은 얼굴이라는 뜻으로, 젊어서 혈색이 좋은 얼굴을 이르는 말)의 소년일 때인 것이다.

 

하잘것없는 소나무의 암꽃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이 꽃도 피기 전에는 연록색이고 필 때에는 홍조紅潮(붉어짐)가 오고 물기가 많아진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나타나 있는 것이나 숨어 있는 것이나, 그것이 모두 한 세상을 만나 행복을 만끽할 때에는 분홍이 된다다는 것은 정말 공평한 일이다.

마을을 둘러싼 산에는 진달래가, 마을 한복판에는 살구꽃이····.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향 마을인가!

 

 

○나그네와 술집

 

살구나무 단풍(출처-출처자료1)

 

우리말로 된 노래 <고향의 봄>에도 살구나무가 나오지만, 한시로 된 봄의 시에도 살구나무가 등장한다.

다음 시는 중국 당나라 두목杜牧의 시 <청명淸明>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

 

"청명 날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청명시절우분분 淸明時節雨紛紛)

길 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찢기는 듯하다 (노상행인욕단혼 路上行人欲斷魂)

주막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차문주가하처유 借問酒家何處有)

목동이 멀리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 (목동요지행화촌 牧童遙指杏花村)"

 

봄꽃이 필 때에는 봄빛이 화사해야 좋지만, 이슬비 속의 살구꽃은 마음을 괴롭히는 잔잔한 파도의 충격을 가져온다.

봄비 속에 타오르는 진달래꽃의 무더기도 그러하다.

 

분홍색을 더러는 좋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복숭아꽃 색이나 살구꽃 색과 비슷한 도색桃色은 연분홍색을 뜻한다.

복숭아 열매의 색깔도 분홍을 벗어나지 않는다.

도색 사건이라 하면 여자와 관계되는 일을 말하고, 이것을 풀이하면 분홍색 사건이 된다.

좋은 것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나쁜 것으로 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전에는 막걸리집 기둥에는 대개 앞서 두목의 시 중 "목동요지행화촌 牧童遙指杏花村"이라든가 "차문주가하처재 借問酒家何處在"라는 시구를 붙이기 일쑤였다.

한문깨나 하는 사람이면 이 한시 한 줄 때문에 술집 마루에 걸터앉게 되었다. 

그냥 지나간다면 시도 모르고 정서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까봐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술집으로 발길을 옮겼다면, 이는 그 사람이 마음이 약하거나 아니면 봄바람이 불어넣은 낭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살구꽃 마을은 낭만으로 충만해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술집 앞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를 심기 마련이다.

 

한편 살림집 담장 안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으면 좋지 않다는 말도 있었다.

살구꽃처럼 복숭아꽃도 그 아름다운 분홍 때문에 부녀자의 치마폭에 봄바람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약효

 

행림杏林, 즉 살구나무 숲이란 것은 병을 고치는 의사를 말한다.

이 말이 생겨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신선전神仙傳에서 이르기를, 옛날 중국에 동봉董奉이란 의원이 있어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데, 치료비 대신 중환자에게는 살구나무 다섯 그루를 심게 하고, 병이 가벼운 사람에게는 한 그루를 심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원 집 주변에 우거진 숲을 동봉의 '살구나무 숲(행림杏林)'이라 하였고, 이는 곧 병을 고치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살구나무 열매 씨 안에 들어 있는 인仁은 기침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이고 있다.

행인수杏仁水는 바로 살구나무 인으로 만든 기침 물약이다.

 

그런데 행자목杏子木이라 하면 살구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은행나무 목재를 말한다.

행자상杏子床은 은행나무 목재로 밥상을 뜻하다.

은행나무 종자가 살구나무 씨와 닮았기 때문에 이러한 혼동이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다듬이와 목탁

 

살구나무 목재는 특별한 쓰임새가 있다.

필자가 어릴 때 우리 집에는 살구나무로 만들어진 다듬이가 있었다.

 

앞산에 있는 큰 살구나무가 끊어지자 그 줄기의 쓰임새에 대하여 동네 어른들이 모여 여러 시간 동안 장황하게 논의하였다.

자기 것은 아니지만 이 나무의 올바른 쓰임을 위해서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의논을 거듭했다.

그 결과 낙착된 용도가 다듬이로 만드는 것이었다.

알맞은 길이로 잘라 아랫마을 연못 속에 넣어두었다.

3년 뒤 이것을 건져서 다듬이로 만들었지만, 그래도 한 곳에 틈새가 생겨 명주천을 다듬이질할 때에는 조심해야 했다.

5년 뒤에 건져서 장만했더라면 갈라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속에 넣어두는 지혜와 3년을 기다리는 인내가 어린 시절의 필자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절간에서 두드리는 목탁은 저승으로 간 물고기의 영혼에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승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은 죄가 많아 대개 지옥으로 가게 마련이라고 한다.

지옥으로 간 물고기도 고생의 바다에서 지내게 되는데, 목탁 소리를 듣는 순간 그 고생의 바다는 극락의 바다가 된다.

그래서 목탁을 쳐서 물고기에 안식을 주는 것이다.

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을 치면 그 소리가 깨끗하고 지옥까지 영롱하게 울려서 물고기들은 더 기쁜 상황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지옥으로 간 물고기에 살구나무는 매우 고마운 나무다.

 

지난날 필자 동네의 젊은 아주머니나 큰 아이들은 살구가 익을 때면 십 리 길도 넘는 살구나무 동네로 살구를 먹기 위해 나들이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시골 좁은 길을 줄 지어 걸어가는데, 그 길에서 웃음이 또한 줄을 이었다.

이처럼 살구는 여자나 아이들이 더 즐겨 먹는 과일이고, 살구나무 아래에 그대로 앉아서 먹곤 했다.

'살구나무 행杏'자는 '나무 목木'자와 '입 구口'자가 위아래에 있는 구조로서, 이것은 아마 살구는 나무 밑에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2(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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