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2: 미래로 돌아가기: 질서의 회복(1815~1830) 1-빈 회의와 복고, 복고에 대한 반란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2: 미래로 돌아가기: 질서의 회복(1815~1830) 1-빈 회의와 복고, 복고에 대한 반란
새샘 2025. 11. 27. 16:00| 유럽 협조 체제(1815~1830년) | |
| 빈 회의 5국 동맹 프랑스가 에스파냐 페르난도 왕의 통치권을 회복시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 러시아에서 12월 당원의 봉기 그리스 독립 전쟁 세르비아의 독립 |
1814~1815년 1818년 1823년 1810~1825년 1825년 1821~1827년 1828년 |
1814년 승리한 유럽 열강들은 빈 회의 Congress of Wien로 모였다.
이 평화 협정은 강대국의 영토적 야심을 만족시키고 국제적 평온 상태의 보장을 모색하고자 하는 대망을 품었다.
빈 회의는 장기간에 걸친 업무가 되었고 두 개의 평화 조약을 낳았는데, 하나는 1814년에 맺어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폴레옹 Napoléon(1769~1821)이 놀랍게도 유배지에서 탈출해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에서 패배한 이후 1815년에 맺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몇 달에 걸쳐 벼락출세한 혁명가 황제의 패배를 축하했다,
그 기간 중 각국의 고관들과 이제는 안도하게 된 유럽의 왕족과 귀족의 구성원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려고 획책하며 세련된 귀족적 에티켓 étiquette을 갖추고 값비싼 연회를 열었다.
○빈 회의와 복고

빈 회의에서 중심 배역은 러시아 제국 Russian Empire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재위 1801~1825)와 오스트리아 Austria의 외교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재임 1809~1848)가 주도적 역할을 한 주요 강대국들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러시아 Russia는 막강한 유럽 대륙의 국가로 떠올랐다.
예카테리나 대제 Catherine the Great(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재위 1762~1796)의 궁정에서 자라난 러시아 차르 Tsar(제국의 절대군주 즉 황제) 알렉산드르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에게서 계몽주의 신조를, 그리고 전제 군주인 아버지 파벨 1세 Pavel I(재위 1796~1801)에게서 절대주의 권력 개념을 배웠다.
그는 1801년 암살당한 아버지를 계승해 차르가 되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스스로를 유럽의 '해방자'로 자처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능한 프랑스 대신에 전능한 러시아로 바꾸어놓을까봐 두려워했다.
프랑스 France의 제1인자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1754~1838)은 자신이 패전국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면서 놀랍게도 강력한 지원 역할을 했다.
탈레랑은 주교이자 혁명가였고, 미국에 망명함으로써 대공포에서 살아남았으며 귀국한 뒤에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 이미 그리고 나중에 복위된 루이 18세 Louis XVIII(재위 1814~1824)의 외무장관이 되기 전에도 나폴레옹의 외무장관으로 봉직했다.
탈레랑이 빈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그의 외교적 수완 또는 기회주의를 입증해주었다.
강화 조약의 설계자인 메테르니히는 소규모 독일 영방 국가들의 불안정한 잡동사니 국가에서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아들로 자라났다.
청년 메테르니히는 스트라스부르대학교 Université de Strasbourg(영어 University of Strasbourg) 학생 시절에 프랑스 혁명의 발발과 관련된 대중의 폭력을 목격했으며, 평생에 걸친 정치적 변화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이 사건과 결부시켰다.
그는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가 1807년 동맹을 맺은 위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둘 사이를 갈라놓고자 애를 썼고,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1791~1847)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데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했다.
메테르니히는 자신이 거미 숭배자라고 실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거미는 세상에서 가장 말쑥하게 자기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바삐 움직인다."
빈 회의에서 메테르니히는 그와 같은 말쑥함으로 국제관계를 정리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외교적 계획에 맞아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거의 강박에 가까웠던 메테르니히의 기본적 관심사는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고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막는 것이었다.
그는 유럽에서 러시아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알렉산드르가 혁명을 선동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그는 패배한 프랑스에 대해 온건하게 대하는 것을 선호했다.
실제로 그는 한때 합스부르크 제국 Habsburgerreich(영어 Habsburg Empire)의 보호와 후견 아래에서 나폴레옹을 프랑스 황제로 복귀시킬 생각을 하기도 했다.
메테르니히는 비밀경찰과 스파이 행위를 포함한 가혹한 억압 전술에 기꺼이 의지했던 초보수주의자 archconservative였다.
하지만 메테르니히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평화는 대단히 중요했고 1914년까지 유럽에서 주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빈 회의는 질서와 '적법한' 권위의 회복을 모색했다.
빈 회의는 루이 18세를 프랑스의 적법한 군주로 인정하고 에스파냐 España와 두 시칠리아 왕국 Kingdom of Sicily에 부르봉 왕가 House of Bourbon 군주들의 복귀가 유효함을 확인했다.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약화시키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루이 18세는 혁명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보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인이 전임 황제가 유배지에서 돌아온 것을 환영한 것처럼 보였던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후에 이에 맞서 싸운 동맹국들은 한층 강경해졌다.
따라서 프랑스는 7억 프랑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5년 동안 연합군의 점령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랑스 국경은 혁명기의 '대'프랑스보다 훨씬 줄어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1789년과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 국경은 프랑스인이 생각했던 것만큼이나 그렇게 징벌적이지는 않았다.
빈 회의에서 결정된 강화조약은 프랑스가 일으킬지도 모를 그 어떤 팽창 기도에 대항해 강력한 장벽을 형성했다.
이 강화조약에서의 지도 원리는 어떤 나라도 국제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 만큼 강력해서는 안 된다는 세력 균형 balance of power이었다.
1795년에 프랑스가 정복했던 네덜란드 공화국 Dutch Republic은 네덜란드 왕국 Kingdom of the Netherlands으로 복원되었고, 이전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였던 벨기에 Belgium는 네덜란드 왕국에 포함되었다.
이제 이 견실한 강대국 네덜란드 왕국은 은 프랑스가 국경을 넘는 것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같은 이유에서 동맹국은 라인강 Rhine River 좌안의 독일 지역을 프로이센 Preußen 또는 Preussen(영어 Prussia)에 양도했다.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면서 제국을 북부 이탈리아로 팽창했다.
1815년의 강화조약은 독일 Germany과 폴란드 Poland에 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나폴레옹은 독일의 영방 국가들을 라인 연합 Confedration of the Rhine으로 재조직했었다.
빈에서 열강들은 독일의 영방 국가와 공국의 수를 300개에서 39개로 줄였고 이들을 프로이센과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명예통령 아래의 느슨한 독일 연합으로 연결시켰다.
이 연합은 나중에 독일 통일의 토대가 되었지만, 이는 강화 조약 체결국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있을지도 모를 러시아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독일 연합을 지지했고 바이에른 왕국 Königreich Bayern(영어 Kingdom of Bavaria), 뷔르템베르크 왕국 Königreich Württemberg(영어 Kingdom of Württemberg), 작센 왕국 Königreich Sachsen(영어 Kingdom of Saxony)의 독립을 유지시켰다.
1790년대에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사이에서 분할되어 사실상 사라진 폴란드는 논쟁의 핵심이자 강대국의 영토 확장 야심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강대국들은 타협에 도달했다.
강대국들은 명목상 독립된 폴란드 왕국을 만들었지만 이 나라에 대한 통제권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넘겨주었고, 폴란드의 일부 지역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갔다.
영국도 전쟁에 승리한 다른 열강들처럼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실론 섬 Ceylon Island(현 스리랑카 Sri Lanka)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던 영토들을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의 군사적 승리는 영국이 팽창하고 있는 상업 제국을 굳게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빈 회의는 또한 평화를 보장하고 항구적 안정을 창출하기 위해 범유럽적 공조 체제를 필요로 했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는 4국 동맹을 결성했다(1818년 프랑스가 가맹하면서 5국 동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가맹국들은 정통성 있는 정부를 타도하려 하거나 국경선을 변경하려는 모든 소요 사태를 진압하는데 협력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서약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동맹국들에게 정의, 그리스도교적 자비,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헌신하는 신성 동맹 Holy Alliance의 선포에 동참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신성 동맹은 유럽의 지도자들에게 알렉산드르의 의도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빈에 모인 많은 귀족적 경세가經世家(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들은 계몽주의적 가치에 경도되어 있었고 신성 동맹을 경계했다.
많은 사람들은 신성 동맹이 "터무니없는 신비주의와 허튼짓의 일부"라는 영국 외무장관의 믿음을 공유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정통성에 중심을 둔 상이한 권위의 개념을 주조해내려고 시도했다.
통치자를 '정통성 있게' 만들고 권력을 다시 강화시켜주는 것은 신성한 권리가 아니라 국제 조약, 지지 그리고 일련의 보장이었다.
동맹국들이 왕위에 오르게 해준 벨기에의 레오폴드 1세 Leopold I(재위 1831~1865)는 전쟁이 이제 '원리의 충돌', 즉 혁명 사상으로 촉발되어 '백성'을 황제에 반대하도록 하는 갈등이 될 것 같다고 관측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유럽에 관해 아는 한에서 그러한 갈등은 유럽의 외관과 전체 구조를 전복시킬 것이다."
메테르니히와 많은 그의 동료 외교관들은 그러한 갈등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빈에서 자신들의 여생을 바쳤다.
○복고에 대한 반란
복고는 애초부터 반란에 직면했다.
초기의 상당수 저항은 억압적 전술 때문에 지하에서 활동하는 비밀 조직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메테르니히의 세력 범위에서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카르보나리 Carbonari(구성원이 숯으로 얼굴을 검게 칠한 데서 이름 지어진 집단)는 세력이 이탈리아 반도에까지 미쳤던 빈에 있는 정부와 보수주의적 동맹국들에 대해 반대하기로 서약했다.
카르보나리의 영향력은 1820년대 동안 남유럽과 프랑스 전역에 걸쳐 확산되었다.
이 조직의 회원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의식으로 서로를 확인했고 남의 눈을 피해 만났다.
그들의 정치적 관점은 분명치 않았다.
일부 카르보나리는 헌법, 정치적 대의제, 자유주의적 개혁을 요구했고, 다른 카르보나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를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실제로 이 왕년의 황제 나폴레옹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보다 복위된 부르봉 왕조에 대한 대안으로 신화화되었던 유배 기간 동안에 한층 더 인기가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의 퇴역 군인들은 나폴레옹의 전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했고 그의 군 장교들은 카르보나리 회원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나폴리 Napoli와 피에몬테 Piemonte 그리고 특히 에스파냐와 에스파냐 제국 Imperio Español(영어 Spanish Empire)에서 복고에 대한 반대는 반란으로 비화했다.
두 경우 모두 헌정적인 개혁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하고 복위된 군주들은 선거를 억누르고 특권을 복권하려고 시도하면서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렸다.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려는 것에 대한 위협에 대응해 국제적인 지지를 확보하기로 결심한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대표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혁명을 진압하는데 상호 지원할 것을 선언한 트로파우 각서 Troppau memorandum(1820)를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이 각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어떤 혁명도 국제적 안정을 위협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국제 조약에 묶여 행동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반도들을 투옥하거나 추방시키면서 이탈리이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외교적 승낙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에스파냐 혁명을 떠맡았다.
프랑스는 1823년 20만 대군을 이베리아 반도 Iberian Peninsula에 파병했다.
프랑스 군대는 에스파냐의 혁명가들을 제압하기 사면초가에 처한 페르난도 7세 Fernando VII(재위 1808, 1813~1833)의 통치권을 회복시켜주었다.
페르난도 7세는 몇백 명의 반도들을 고문하고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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