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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겸재 정선 '독서여가'

새샘 2025. 12. 8. 20:46

"겸재 정선과 친구의 특별한 싱크탱크"

 

정선, 독서여가, 비단에 채색, 24.0x16.8cm, 간송미술관(출처-출처자료1)

 

책은 필자의 '싱크탱크(참모진參謀陳) think tank'다.

어릴 때 만난 책 속의 주인공들이 내 삶의 동반자였다.

때로는 '그녀'가 되고, '그'가 되어 살고 싶었다.

 

가을에 한 친구를 생각하며 책을 고른다.

여고시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 친구는 어릴 때 책이 없어서 언니와 오빠의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책이 고팠던 시절의 애틋한 경험인 만큼 교과서 독서도 삶의 소중한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친구의 지혜는 언니와 오빠의 교과서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보는 책이 다르듯이 필자 또한 그랬다.

현실과는 다른 시간을 경험하고 싶을 때는 시집을 읽고, 마음이 뒤숭숭하면 전집으로 세월을 잊었다.

세상살이가 허할 땐 평전이나 역사책을 찾았다.

감정에 따라 책의 종류가 바뀌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한다.

옛사람들이 책을 가까이하는 광경이 그 증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의 <독서여가讀書餘暇>는 독서에 관해 생각을 이끄는 작품이다.

여유롭게 독서를 하고 난 화가의 인품과 작업실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작업실은 작품의 산실이다.

책과 음악, 화초, 장식품 따위가 화가의 취향을 알려준다.

서가에 꽂혀 잇는 서책들은 생각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서화 작품은 이들 서책으로 담금질된 사유思惟(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서책과 서화 작품이 어우러진 작업실이 예사롭지 않다.

 

정선은 진경시대眞景時代(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문학예술작품이 유행하던 시대)의 핵심인물로 유명하다.

진경시대는 숙종(재위 1674~1720)부터 정조(재위 1776~1800)에 이르는 18세기 조선시대 후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는 조선 고유의 색과 정신을 불어넣어 표현한 우리 문화를 꽃피운 황금기로 통한다.

한글문학이 유행하였고, 판소리가 장안에 울려 퍼졌다.

그림은 우리의 풍토를 담은 산천을 그렸다.

화가들이 경치를 보고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을 표현한 것이 진경산수다.

 

정선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이름난 산과 큰 내)을 유람하며, 우리 산천을 가슴으로 품어서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한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그에게는 진경사상과 학문을 교류한 친구들이 있었다.

선비이자 화가인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과 진경시대의 대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 이 그들이다.

정선은 이들과 그림은 물론 학문을 교류하며, 진경산수를 풍요롭게 꽃피울 수 있었다.

 

정선은 학문에 뜻을 두어 ≪주역周易≫에도 밝았다.

<금강전도金剛全圖>처럼 그림에 음양의 조화를 적용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토산土山(흙산)은 음의 기법으로, 거친 바위는 양의 기법으로 재구성하며,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표현하였다.

금강산은 그가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린 '베스트 모티프 best motiff'(작품 내용을 이루는 이야기의 주요 구성요소)였다.

정선에게 독서는 인격도야를 넘어, 진경산수의 자양분이었다.

 

정선은 산수와 인물, 초충을 비롯한 다양한 소재에 모두 능했다.

그중 <독서여가>는 인물을 비교적 자세히 그린 작품으로 꼽힌다.

정선이 서울 주변의 풍광을 그린 진경산수화첩인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들어 있다.

정선이 오십대 초반 북악산 아래 유란동幽蘭洞(현 경복고 자리)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그린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작업실을 꼼꼼히 그린 탓에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공간을 몇 개로 구분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서가에는 책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촛대가 있고, 붓을 꽂아두었을 법한 화병이 있다.

서가의 문이 열린 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독서를 하다가 잠시 쉬는 듯하다.

열린 문에는 정선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선비가 바위에 앉아 폭포를 감상하는 그림이다.

방에는 깔아둔 돗자리가 시원하다.

방과 연결된 툇마루에는 정선이 한쪽 손을 짚은 채 느긋하게 마당을 보고 있다.

눈앞에 화초가 있다.

손에는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다.

부채 그림에는 원경으로 산이 있고, 강에는 배 한 척이 유람을 즐기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림 속의 그림'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정선의 세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하는 일석삼조의 호사가 따른다.

 

작품에는 초가지붕을 비스듬하게 처리하여 건물 기둥으로 시선을 유도한다.

그리고 기둥은 방과 바깥의 공간을 분리하여 툇마루로 연결시켜준다.

방에는 서가와 툇마루 공간이 공존한다.

열린 방문으로 뒷마당의 공간이 드러난다.

뒷마당에는 잘생긴 향나무가 앞마당까지 뻗어 있다.

마당에는 화초가 정선을 보고 있고, 툇마루 아래 신발도 주인을 향하고 있다.

중년의 정선은 꽃을 완상玩賞(즐겨 구경함)이다.

 

언니오빠의 교과서 애독자였던 친구는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지금 친구의 집에는 정선의 서가처럼 책이 가득하다.

친구는 '책 부자'다.

문득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글귀가 가슴에 꽂힌다.

그 친구에겐 교과서도 소설처럼 재미있는 책이었다.

"책은 정선과 친구의 특별한 싱크탱크"였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12.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