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2: 미래로 돌아가기: 질서의 회복(1815~1830) 2-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 러시아 12월 당원, 그리스와 세르비아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2: 미래로 돌아가기: 질서의 회복(1815~1830) 2-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 러시아 12월 당원, 그리스와 세르비아
새샘 2025. 12. 22. 23:00| 유럽 협조 체제(1815~1830년) | |
| 빈 회의 5국 동맹 프랑스가 에스파냐 페르난도 왕의 통치권을 회복시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 러시아에서 12월 당원의 봉기 그리스 독립 전쟁 세르비아의 독립 |
1814~1815년 1818년 1823년 1810~1825년 1825년 1821~1827년 1828년 |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과거 라틴 민족의 지배를 받아 스페인어 Spanish나 포르투갈어 Portuguese를 우세적으로 사용하는 중미와 남미 지역)에서 페르난도 7세 Fernando VII(재위 1808, 1813~1833)의 제국은 회복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재위 1804~1815)의 에스파냐 España 정복(1807년)은 한때 거대했던 에스파냐 식민지 통치의 근간을 뒤흔들어놓았다.
에스파냐 식민지의 엘리트층은 제국의 통치로 인해 오랫동안 노심초사해왔으며, 세금, 제약이 많은 무역 정책, '반도인(에스파냐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부여된 특권에 대해 분개했다.
페르난도 7세가 프랑스 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하자 그들은 자치의 기회를 모색했다.
이것은 프랑스가 축출되고 난 다음에 페르난도 7세의 통치권이 회복되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절호의 기회였다.
1810년 이후로 계속해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은 힘을 얻었다.
그 선두에 1816년 독립을 선언한 리오 데 라플라타 Río de la Plata(오늘날의 아르헨티나 Argentina)가 있었다.
리오 데 라플라타 군대의 장군 호세 데 산 마르틴 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1778~1850)은 왕당파 군대에 맞서 칠레 Chile와 페루 Peru를 해방시키기 위해 안데스 산맥 Andes Mountains을 넘는 놀라운 행군을 이끌었다.
남아메리카 혁명의 또 다른 핵심적인 군사 및 정치적 인물은 그란 콜롬비아 Gran Colombia(1819년부터 1831년 사이의 콜롬비아 공화국)의 시몬 볼리바르 Simón Bolívar(1783~1830)였다.
그는 베네수엘라 Venezuela를 가로질러 볼리비아 Bolivia에 이르는 일련의 봉기를 이끌었고 마침내 산 마르틴의 군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혁명 이후의 정부에 대해 매우 상이한 전망을 갖고 있었다.
산 마르틴은 군주제주의자였다.
하지만 볼리바르는 에스파냐의 통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해 인디오 Indio(라틴아메리카에 사는 인디언)뿐만 아니라 자유 유색인과 노예(에스파냐와 싸우는 사람들의 거의 4분1을 차지했다)를 기꺼이 동원하고자 했던 공화주의자였다.
볼리바르는 미국이나 자신이 존경했던 나폴레옹의 노선에 따라 남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범아메리카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산 마르틴이나 볼리바르 그 누구도 자신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
정치적 반란은 갈등을 낳았고 많은 경우 폭력적인 내전으로 비화했다.
왜냐하면 한편에는 에스파냐로부터 자신의 해방만을 목표로 삼았던 엘리트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토지 개혁, 노예제 종식 또는 사회적·인종적 계급제도의 폐지를 원했던 한층 더 급진적인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급진 운동은 진압되었고 새로 독립한 국가들은 보수적인 지주 및 군대 장교단 동맹의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Austria의 메테르니히 Klemens von Metternich(재임 1809~1848)와 그의 보수주의 동맹국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 UK과 야심찬 신생국 미국 USA이라는 두 세력과 마주쳤다.
1823년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James Monroe(재임 1817~1825)는 유럽 열강이 신세계 문제에 개입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도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먼로 독트린 Monroe Doctrine'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신생 미국의 선언은 영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사문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영국은 새로운 교역 동반자를 확보하기 위해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의 독립을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에스파냐가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군력을 이용했다.
이리하여 182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때 신세계에서 거대했던 에스파냐 제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1822년 브라질 Brazil이 독립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에서 포르투갈 식민 지배의 발판도 사라지고 말았다.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다준 혁명은 1492년에 시작된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들은 또한 유럽의 핵심 국가들을 훨씬 넘어서 영향을 미쳤고, 대서양 세계와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 지역에 여러 나라들을 새로 만들었던 프랑스 혁명의 전 지구적 중요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러시아 12월 당원
보수주의 동맹의 심장부인 러시아 Russia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재위 1801~1825)가 죽자 그의 후계자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군 장교들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그들은 '12월 당원 Dekabrist'이라고 불렀는데, 그들 중 다수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군의 엘리트 연대에 속한 장교들이었으며, 나폴레옹을 프랑스 France로 몰아냈던 차르 Tsar(제국의 절대군주 즉 황제)의 군대에서 복무했고 평화가 정착되고 있던 기간 동안에 프랑스에 주둔한 적이 있었다.
젊고 이상주의적이었던 그들은 러시아가 유럽의 해방자라는 알렉산드르 1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러시아가 해방자로서의 '도덕적 위대함'을 취하려면 개혁이 필요했다.
농노제는 해방의 약속과 모순되는 일이었고 마찬가지로 전제적인 차르의 정치권력 독점도 이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농민층이 노예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귀족도 '차르의 노예'라고 주장했다.
12월 당원은 단일한 정치 프로그램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입헌군주제주의자에서 자코뱅 Jacobins 공화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자 자유주의적 사고를 지닌 콘스탄틴 Constantin Pavlovich(1779~1831)이 제위에 올라 헌법이 유지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동생이지만 정당한 계승자인 니콜라이 Nicholai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려고 하지 않았다.
장교들도 하사관급 농민층 병사로부터 지지를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고 그러한 지지가 없이는 실패할 운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압이 용이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차르인 니콜라이 1세 Nicholas I(재위 1825~1855)는 반란을 일으킨 몇백 명의 군인을 무자비하게 심문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에게 중노동과 유형을 선고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다섯 명의 지도자들은 한층 더 다루기 힘들었다.
엘리트층의 젊은 구성원인 그들은 순교를 위해서는 최상의 사람들이었고 매려적인 지원자들이었다.
차르는 그들의 장례식이나 매장지가 소요 사태의 원인을 제공할 수 없도록 그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에 있는 페트라파블로프스크 요새 Peter and Paul Fortress 안에서 새벽에 교수형에 처하고 사람 눈에 안 띄는 곳에 묻을 것을 명했다.
니콜라이는 계속해서 전임 차르들의 방식으로 통치했다.
그의 가장 전제적인 활동으로는 국내에서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 비밀경찰인 제3국 Third Section을 설치한 것을 들 수 있다.
수많은 보수주의적 열강의 비밀경찰처럼 이 제3국은 지나치게 확장되어 인원이 부족했지만, 그것의 존재만으로도 공포와 의심의 문화를 창출하기에 충분했다.
니콜라이는 유럽에서 가장 비타협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관료제는 점점 더 중앙집권화되고 더 능률적으로 되었고 정치적 지지와 일상적 활동을 위해서는 귀족층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
1832년 정부는 법들을 체계적인 법전으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곡물을 필요로 하는 유럽의 수요에 자극받아 대지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좀 더 효과적인 생산을 위해 재조직했고, 국가는 곡물을 서방 시장으로 운송하기 위한 철도를 건설했다.
12월 당원을 칭송해 마지않던 알렉산드르 게르첸 Aleksandr Ivanovich Herzen(1812~1870) 같은 러시아 정부의 반대자들은 12월 당원이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유산을 이어가게 된다.
○남동 유럽: 그리스와 세르비아
보수적인 유럽 열강들은 반란이 경쟁 제국을 향할 때 반란에 한층 더 취약했다.
그러한 일은 그리스 Greece와 세르비아 Serbia에서 일어났다.
한때 마구 뻗어갔던 막강한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의 발칸 Balkan 지역에 있던 그리스와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운동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유럽인들에게 자신의 투쟁을 후원해달라고 요청했다.
1821년 그리스에서 일어난 최초의 봉기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Alexandros Ypsilantis(1792~1828)가 이끌었다.
그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친밀한 관계를 누렸던 전직 러시아군 장교였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개입을 거부했다.
그러나 두 번째 봉기는 영국 정부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몇백 명의 지원병들을 이끌어냈다.
19세기 초의 모든 반란 가운데서 그리스의 독립전쟁(1821~1827)보다 더 큰 주목과 동정을 받은 사건은 없을 것이다.
이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에서의 현실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고, 유럽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답이 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인 Christians은 그리스의 독립전쟁을 그리스도교 Christianity와 이슬람교 Islam 사이의 계속된 투쟁의 일부로 생각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인 Greek의 전투는 자유를 위한 십자군이며 그들의 투쟁은 그 땅의 고전고대의 유산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유럽인들은 점차 그리스를 서양의 탄생지라고 말했다.
낭만주의자 시인 영국의 퍼시 셸리 Percy Bysshe Shelley(1792~1822)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법, 우리의 문학, 우리의 종교, 우리의 예술은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가 없었더라면······우리는 여전히 야만인이자 우상숭배자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낭만주의자 시인 영국의 조지 고든 바이런 George Gordon Byron(바이런 Byro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1788~1824)은 그리스에서 싸웠다.
프랑스의 낭만주의자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1798~1863)는 <키오스 섬의 학살 Scènes des massacres de Scio(영어 The Massacre at Chios)>에서 그리스인의 투쟁을 기념했다.
유럽 전역의 여러 도시들에서 '친그리스' 위원회는 돈을 모으고 지원병을 보냈다.
파리 Paris의 남녀들은 그리스인의 대의에 공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란색과 흰색으로 된 리본을 달았다.
그리스인을 기리는 사람들이 터키인 Turkish을 악마화하고 계몽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터키식 전제주의 Turkish despotism'라는 주제를 되살리면서 손을 맞잡고 행진했다.
영국의 한 관리는 터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 쪽에 걸쳐 있는 터키는 거의 전반적으로 무정부, 반란, 야만이라는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이한 정치적 신조를 갖고 있는 유럽인들은 동방적 또는 이슬람교적인 폭군의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그리스의 유산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했다.
한마디롤 유럽인은 그리스인의 투쟁을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보았다.
대결 중인 그리스에서 양쪽은 무자비했다.
몇몇 경우에 그리스 군은 터키인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을 죽였다.
1822년 3월 그리스인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터키인과 그리스인이 거주하던 키오스 섬 Chios Island을 침공해 독립을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그 섬을 되찾기 위해 도착했을 때 그리스의 침략자들은 자신들이 붙잡고 있던 터키인 포로들을 죽이고 도망쳤다.
터키인들은 몇천 명의 그리스인을 살육하고 4만 명 이상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으로 복수했다.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은 터키인의 잔학 행위만을 특징적으로 묘사했다.
그리스의 독립은 궁극적으로 강대국들의 정치에 의존했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 군대가 터키에 맞서 가담했다(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였던 니콜라이 1세는 개입을 지지했다).
1829년과 1830년에 작성된 두 개의 런던 의정서 London Protocol는 비록 1년 뒤에 동맹국들이 바이에른 왕 King of Bayern(영어 Bavaria)의 아들을 그리스 왕위에 앉히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의 독립을 확인했다.
이와 비슷하게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의 투쟁은 1828년 세르비아 독립국의 창건을 도왔다.
러시아의 격려와 지원으로 세르비아는 준독립국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리스 정교의 공국Greek OrthodoxPrincipality(상당히 소수의 인구 보유)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계속해서 그 지역의 또 다른 강대국 즉 오스트리아 제국 Austrian Empire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요구하면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압박을 가했다.
이 투쟁은 19세기 말에 단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요약하면 독립 운동의 지도자들이 강대국 사이의 갈등에 편승할 수 있거나 그리스와 세르비아처럼 독립 운동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럽의 계속되는 투쟁과 조화를 이룰 때, 이들 운동은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들 신생국은 둘 다 크기가 작았고 허약했다.
신생 그리스에는 실제로 단지 80만 명만이 살았고 세르비아는 1856년까지도 강대국의 보호를 받았다.
더욱이 이들 신생국 중 어느 나라도 오스만 제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세르비아의 해외 무역 상인, 은행가, 행정가들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틀 안에서 안주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서양의 경계지 중 하나로 남았다.
그곳은 유럽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다인종적이고 다종교적인 교차점이었고, 주민들이 관용적인 공존과 쓰라린 갈등 사이를 번갈아 오갔던 곳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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