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실상 본문

대부분의 고고학자라면 고고학에 큰 뜻을 품고 처음 발굴장에 찾아간 첫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필자 역시 첫 발굴의 감격을 생생히 기억한다.
1991년 5월 하남 미사리 발굴장이었다.
호미로 땅을 긁다 보니 손끝에 툭 하는 느낌과 함께 빗살무늬토기가 드러났다.
강의실의 사진과 박물관의 전시품으로만 보던 빗살무늬토기를 손에 잡던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그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지층이 아니라 훨씬 뒤인 조선시대의 문화층文化層(유물이 있어 과거의 문화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지층)에서 나온 것이다.
범람이 잦은 한강변이라서 빗살무늬토기가 조선시대 집자리 근처에도 나온 것이었다.
당시 발굴장을 담당하던 최종택 학예사(현 고려대 문화융합학부 교수)는 발굴이 처음인 학부생에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조선시대 지층의 발굴을 실습 겸 맡긴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 빗살무늬토기는 평생 필자의 뇌리에 남아 있다.
아마 이러한 경험은 필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고고학자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박물관이나 미디어 media(사람들의 생각이나 어떤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에서 보았던 화려한 유물을 기대하면서 찾아간 발굴장은 황량함 그 자체일 것이다.
황금은커녕 토기나 돌 몇 조각을 조심스레 긁으며 찾는 모습과 마주친다.
흙구덩이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면서 그야말로 건설 현장보다 못한 상황에서 조사를 한다.
게다가 각 지역의 풍토병과 모기가 온몸을 괴롭히기도 한다.
발굴장의 상황에 따라 몸을 제대로 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화려한 유물은 거의 기대하기가 어렵다.
만약 좋은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곧바로 보존 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현장에서 발굴 중인 토기 몇 점을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 중국의 동북공정 여파가 심할 때 국회의원 10여 명과 함께 발해 발굴 현장을 간 적이 있다.
당시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에 매우 고무된 국회의원들은 바쁜 일정에도 3박 4일을 기꺼이 할애했다.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달려서 현장에 도착했을 때, 기대와 매우 달랐는지 참 난감해하는 국회원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근사한 고고학 유물이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정작 와 보니 한쪽에서는 강물에 빨래를 하고 발굴단장은 도끼를 장작을 패는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처음 발굴을 하면 가장 허드렛일부터 시작한다.
큰 삽으로 퍼 올린 흙을 다른 곳으로 치우기도 하고, 삽이나 호미 같은 장비를 깨끗이 씻는 일을 하기도 한다.
현장 분위기를 며칠 동안 익히고 나면 본격적으로 호미를 들고 발굴 구덩이로 들어간다.
처음부터 중요한 발굴지에 투입되기는 어렵지만, 땅을 직접 긁고 느낌을 익히면서 발굴을 시작한다.
유적을 찾는 첫 번째 기준은 호미나 꽃삽으로 흙을 긁을 때의 미세한 느낌이다.
한번 땅을 파서 살았던 곳은 땅의 색깔이나 토질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일단 한번 파낸 곳은 유기물이 잘 자라기 때문에 주변보다 검고 습기도 풍부하다.
그런 땅 위의 흔적을 경험으로 알아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은 보이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만큼 고고학의 발굴을 잘 표현한 것이 있을까.
고고학 발굴의 원리는 그야말로 땅을 파서 유물을 찾아내고, 그 유물이 나오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직접 발굴해서 땅속에 숨어 있는 여러 자료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 유적의 경우 땅속에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이다.
아무리 세심하게 발굴을 한다고 해도 몇천 년 동안 땅속에서 보존되어 있던 것이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보이든 보이지 않든 유적과 유물은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땅속에 그냥 두었다가는 곧 파괴되기 때문에 발굴을 빨리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자연이나 기후환경의 변화로 유적이 파괴되는 경우다.
만약 고고학자에게 바닷가 절벽의 유적지를 발굴하라고 한다면 어디부터 발굴할 것인가?
보통의 경우 가장 파기 어렵고 위험한 바닷가 절벽 쪽을 발굴지로 택한다.
그 이유는 태풍이나 침식작용으로 바닷가 쪽의 유적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1987년도에 남해안을 강타했던 태풍 셀마 Thelma의 여파로 통영 연대도煙臺島 패총貝塚(조개무지/조개무덤)이 발견되었다.
당시 연대도를 할퀸 태풍의 여파로 바닷가 절벽이 심하게 쓸려 나가고 손상되는 가운데 고대의 유물이 드러났던 것이다.
1925년에는 을축년 대홍수의 여파로 서울 암사동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엄청난 양의 빗살무늬토기가 드러나서 암사동 유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반대로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서울이 한강 남쪽으로 급격히 팽창하기 이전에 이 유적이 알려진 덕택에 암사동 일대의 유적이 보존되었다.
그리고 파괴된 유적에는 수많은 토기가 널려 있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 1960~1970년대에 국내 여러 대학들이 발굴을 하거나 땅에서 유물을 채집했다.
그 덕에 밑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사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강가 모래언덕이 쓸려 나가면서 암사동 유적은 계속 파괴되었기 때문에 1988년에 유적지에 새로 흙을 덮는 등 정비 사업을 하여 보존하기 시작했다.
필자 기억에 1990년대 초반까지도 암사동 유적의 주변을 다니면 빗살무늬토기나 돌도끼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편, 서울 근처의 모래언덕과 달리 인력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파괴가 있다.
바로 지구온난화와 같은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이다.
북극권에는 영구동결대永久凍結帶(영구동토대永久凍土帶)라고 하는 독특한 기후 현상이 있다.
이는 워낙 추운 지역이라 여름이 되면 땅거죽은 녹아서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자라지만, 조금만 땅을 파면 여전히 얼음이 남아 있는 현상을 말한다.
땅속은 사시사철 냉동고인 셈이니 사소한 털 한 오라기도 잘 남아 있는 기억상자(타임캡슐 time capsule: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록이나 물건을 담아서 후세에 온전히 전할 목적으로 고안한 용기로서, 대개 땅속에 묻어 둔다)의 역할을 한다.
추코트카 Chukotka와 같은 러시아 Russia 극북極北(북쪽의 맨 끝) 지역의 경우 무덤 발굴은 그야말로 삽 없이 솔로만 한다.
무덤을 만들 때에 땅을 깊게 팔 수 없으므로 얕게 파고 늑대나 여우 같은 들짐승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돌을 쌓아 올리는 식이다.
어떤 경우는 돌만 걷어 내면 방금 그 자리에 누운 듯한 시신이 옷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누워 있다.
그러니 굳이 땅을 걷을 것 없이 발굴하면 된다.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알타이 고원 Altai Plateau에서 발견된 파지릭 고분 Pazyryk burials은 북극권이 아니라 상당히 남쪽에 있다.
그렇지만 고원지대이기 때문에 영구동결대가 남아 있었고, 그 덕에 '얼음공주 Ice Maiden'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미라가 발견되어서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렇듯 영구동결대는 지구가 고고학자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물론 얼음 속에서 일일이 발굴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지구온난화로 알타이산맥 Altai Mountains의 영구동결대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얼음 속에서 몇천 년 동안 완벽하게 지속되어 왔다고 해도 한번 녹아버리만 몇년 안에 자연적인 부패가 진행되어 각종 유기물질은 빠르게 사라진다.
설혹 앞으로 다시 날씨가 정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무덤 안에 얼음이 들어찬다고 해도 유기물질은 이미 부패가 진행된 다음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존 상태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니 유일한 해결책은 역설적으로 아직 얼음이 있을 때에 빨리 발굴을 하는 것이다.
지구물리탐사를 통해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파지릭 고분을 찾아 발굴 조사를 해야 한다.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는 북방 유라시아 Eurasia의 유목민에 대한 가장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는, 영구동결대에 존재하는 파지릭문화 Pazyryk culture의 고분 만이라도 세계적 차원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지구온난화라는 현상을 막기는 어려울 테니 얼음이 남아 있는 고분을 목록화하고 그들 중 곧 얼음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고분부터 선별해서 조사하는 긴급 발굴이 필요하다.
유네스코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위원회와 같은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국제적인 조사가 절실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다.
파지릭 고분의 주인을 자신의 선조라고 생각하는 현지 알타이 정부에서 발굴을 강력하게 반대하기 때문이다.
파지릭 고분의 발굴 및 미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러시아과학원과 현대 알타이 지역 원주민의 갈등은 1990년대 이후 첨예화되었다.
알타이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의 선조로 간주하고 미라가 보관된 박물관에 반환을 요구하는 등 다양한 이의를 제기했고, 지역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미라 발굴을 금지하고 있다.
미라 덕분에 현지 알타이인의 선조에 대한 역사 인식은 강화되었는데, 그 강해진 민족의 자의식 때문에 더 이상의 미라가 보존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갈수록 지구온난화는 심해지니 이 시간과의 전쟁에서 고고학자가 이길 가능성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고학자의 동반자, 트라울

고고학 발굴을 한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이라면 고고학자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작은 마름모꼴의 손도구를 알 것이다.
우리말로는 흔히 '흙손'이라고도 하는 트라울 trowel이다.
트라울은 정원에서 쓰는 꽃삽류를 통칭하며 용도에 따라 모양새가 다양한데, 고고학자가 쓰는 것은 마름모꼴로 그 끝이 뾰족해서 포인팅 트라울 pointing trowel이라고도 한다.
끝이 뾰족하여 무언가를 파내기 좋고 밑이 납작하여 무언가를 다듬기에 적합하니 미국의 고고학자가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국도 미국의 고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니 우리에게도 트라울은 고고학자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지금이야 발굴장에서 흔한 게 트라울이지만, 30여 년 전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에 트라울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 연장이었다.
당시 미국에 유학하거나 다녀온 고고학자가 트라울을 한두 개 가져오면 그것을 신주단지 모시듯 뒤춤에 꽂아 넣고 아주 중요한 상황에만 꺼내서 긁어보곤 했다.
쉽게 말하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명품 도구였던 셈이다.
서울에서 활동한 필자가 이럴 정도이니 다른 도시에서는 트라울이라는 것을 구경조차 못한 고고학자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한국 고고학의 발전과 값싼 중국산의 등장으로 10~15달러의 저렴한 가격에 일급을 받는 인부나 학부생도 애용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 당시 고고학자가 가장 애용한 상표는 미제 '마셜타운 Marshalltown'이었다.
오죽하면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켄트 플래너리 Kent Flannery는 <황금의 마셜타운 Golden Marshalltown>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진정한 고고학자에게 수여하는 선물이라는 뜻으로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고고학자들 칭송하는 글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도구를 개량해서 쓴다.
일본은 호미를 가공한 가리ガリ라는 도구를 쓴다.
필자가 유학한 러시아에서는 그냥 삽날을 사용해서 땅을 팠다.
일반 삽을 사서 숫돌로 그 날을 잘 갈고 납작하게 펴서 정교하게 발굴하거나 층위를 볼 때 따로 사용했다.
필자도 시베리아 Siberia 현장에서 쉬는 시간만 되면 담배를 한 대 물고 필자가 애용하는 삽을 열심히 숫돌로 문지르곤 했다.
이렇게 고고학자의 손에 쥐어진 도구만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출신을 알 수 있으니, 참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이 트라울은 고고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음모론에 흔히 등장하는 비밀조직 '프리메이슨 Freemasonry'을 상징하기도 했다.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었던 초대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이 손에 트라울을 쥐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어쩌다가 작은 꽃삽이 프리메이슨을 상징하게 되었을까?
사실 이것은 음모론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프리메이슨은 원래 피라미드 pyramid를 만들던 석공石工(석수石手)의 회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집트 Egypt까지 가지 않더라도 석공은 직업상 일반인이 알 수 없는 측량과 건축기술로 건물의 조화를 추구하고 곳곳에 보이지 않는 비례의 숫자를 숨겨놓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힘의 원천은 바로 컴퍼스 compass와 측량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규모 측량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도 이집트였다.
이집트는 해마다 나일강 Nile River의 범람으로 농토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을 다시 측량하여 구획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쌓인 비결(노하우 knowhow)이 곧바로 피라미드의 건설에도 이용되었다.
지금도 측량기의 기본 원칙은 이집트인 Egyptian이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쓰던 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이 손에 트라울을 쥔 이유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당시 상황과 관계가 있다.
미국 건국 초창기에 프리메이슨이 미국에 확산되었고 허허벌판인 미 대륙에 건물을 짓고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건축기술은 절대적이었다.
이에 따라 트라울과 측량기로 그들만의 비결을 간직하고 사회를 인도하는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다.
워싱턴이 트라울을 쥐고 있는 초상화는 의사당의 주춧돌(초석礎石) cornerstone을 세우는 착공식 장면과 연결된다.
이쯤 되면 트라울은 현장에서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의 상징이기 이전에 고대 문명과 우리를 이어주는 끈인 셈이다.
이제 나이가 50살이 넘어서 청년 때처럼 직접 땅을 팔 기회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발굴장에 갈 때는 트라울을 꼭 챙겨 간다.
마치 트라울이 없으면 고고학자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라울로 모래땅을 긁을 때의 그 느낌을 참 좋아한다.
사각사각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흙들이 밀려가는 느낌, 유물이 있는 부분을 지나가면 '챙'하는 소리와 함께 유물의 둔탁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지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유물이 땅 위로 드러나면 트라울의 끝으로 조금씩 파내려 가면서 그 형태를 드러내는 과정의 느낌은 때론 신비롭기까지 하다.
수많은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벼락을 맞거나 신비한 동굴에 가는 따위의 다양한 상황과 상황으로 시간 여행(타임 슬립 time slip)을 설정한다.
고고학자는 작은 철로 만든 꽃삽인 트라울로 시간 여행을 하고, 고대의 유물을 만난다.
뭔가 낭만적이지 않은가?
고고학 발굴이 힘들지만 행복한 이유는 바로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고고학자의 손에 쥐어진 작은 트라울 덕분이다.
지금은 트라울이 흔해질 대로 흔해져서 오히려 고고학자는 호미같이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한다.
대량의 흙을 파는 것은 삽 대신에 정교한 굴착기(삽차車, 포클레인 poclain)를 쓰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그래도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글을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이라는 말은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트라울은 가장 고고학적인 도구이다.
트라울을 손에 쥐고 만능의 작업을 하는 고고학자의 모습을 보면 몇십만 년 전 손에 딱 쥐고 좋은 주먹도끼를 만들어 쓰던 구석기시대의 사람이 떠오르는 듯하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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