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66 - 소나무 3 본문

우리나라에서 소나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하고도 폭넓게 이용된 나무도 없다.
우리나라의 생활문화는 소나무 자원의 이용 정도에 비례해서 발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소나무과 소나무속에 속하는 늘푸른 바늘잎 큰키나무인 소나무의 학명은 피누스 덴시플로라 Pinus densiflora, 영어로 Korean red pine(한국붉은소나무 또는 한국적송), 한자는 송松, 적송赤松, 육송陸松, 여송女松 따위로 쓴다.
○조선시대 소나무 기록
조선시대 초기인 1485년에 만들어진 법률 서적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가을이 되면 중앙 관서에서는 각 지방의 장정들을 징집해서 숯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때 제탄製炭(탄炭이나 연탄을 만듦)으로 쓰인 나무가 소나무였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소나무에 의지해서 살아온 것 같다.
어느 해인가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 대한 영화가 유행했을 때, 가정에서는 숯으로 취사를 했을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사실 신라시대의 경주에는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정蘿井(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그 곁에 있었다고 하는 전설상의 우물)의 기록이 있는데, 나정은 경주 내남면內南面 탑리塔里에 있는 신라 시조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곳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나정의 숲이 예부터 울밀鬱密하다(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우거져 빽빽하다)"고 했다.
나정의 숲을 구성했던 나무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왕버들 따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나무들은 오래 살고 사람들로부터 숭앙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말엽의 석학 정약용도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나라에 미재美材(아름다운 재목 또는 양질의 재목)가 없어 다만 소나무를 쓴다"라고 하고 있다.
소나무에 대해 신라시대까지 소급시킬 수 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소나무는 궁궐을 수호하는 가장 강력한 수종을 인식되었고, 풍수지리설로써 지상地相(집이나 건물을 지을 때에, 집터의 형세를 관찰하여 길흉을 감정하는 일)을 존중하는 종교 또는 신앙의 숲은 주산객수主山客水(명당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높과 큰 산과 바깥에서 명당을 감싸 안는 강물)의 땅을 골라 적응력이 강한 소나무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는 두 개의 잎이 마주나 한 집에 들어 있어 음양 또는 조화가 유감類感된(비슷한 것끼리 감응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음양풍수설로써 존중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나무의 별칭이 '음양수陰陽樹(음양이 함께 하여 오래사는 나무)'였고, 분묘와 사당 주변에 많이 심어졌다.

한편 우리나라의 민속 신앙의 하나로 장승長承/長丞/長栍이 있는데, 이것은 좋지 못한 귀신을 쫓는 벽사신辟邪神으로서, 그리고 이정표里程標 또는 경계표境界標의 역할을 해왔다.
이 가운데 벽사의 기능이 주된 것으로서, 악령을 '살殺/煞'이라 하므로 장승은 살을 막는 수살守殺이었다.
장승은 탈 없는 방위에서 자르는 소나무를 베어다 이를 깎아 대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기거나 써서 혼례식을 올린 뒤 신랑 신부의 장승을 합궁合宮(짝짓기)시킨다.
동네 어귀(동구洞口)에 장승을 세우고 장승제를 지내는데, 이때 축문을 읽고 소지燒紙(부정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하게 된다.
장승을 만드는 재료가 소나무였다는 것은 그 목재가 가공하기 쉽고 잘 썩지 않으며 오래 간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고, 또 재료를 구하기도 쉬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가 장승으로 되어 인간의 행복을 지켜온 오랜 세월의 흐름을 다시 되새겨본다.
○산신

오랜 옛적부터 어지간한 산에는 반드시 산신山神이 있다고 믿었고, 느티나무·회나무·소나무·팽나무 따위의 노거목老巨木은 수령樹靈(나무의 영혼)을 간직하는 것으로 믿어 제사를 올리곤 했다.
옛적부터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까지도 신령神靈(신으로 받들어지는 영혼 또는 자연물)은 조용하고 깨끗하며 원만하고 평화스러운 곳에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러한 곳이 바로 하늘이며, 신령이 땅으로 내려올 때에는 깨끗하고 원만한 산악을 통로로 삼았거나 아니면 큰 나무와 숲을 택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한 신령은 산악과 나무 또는 숲에 안주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숲 그 자체를 신령으로 보고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서낭당 숲은 그러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정령精靈(산천초목이나 무생물 따위의 여러 가지 사물에 깃들어 있다는 혼령) 관념으로 나무를 볼 때 신목神木으로 취급해서 신성神性의 발휘가 가능한 것으로 믿었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은 제단으로서 하늘의 신을 받느는 데 적합한 곳으로 보았다.
옛날 중국에서는 오악五嶽, 즉 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衡山, 북쪽의 항산恒山, 중앙에 있는 숭산嵩山, 이 다섯 진산鎭山(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산의 높이가 달라서 걸려 있는 하늘이 기울어진 것으로 보기도 했다.
소나무는 하늘 높이 솟아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에 신령이 거처하는 대상으로 보기에 어색함이 없었다.
○풍수지리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지형이 생기生氣(싱싱하고 힘찬 기운)를 가질 때 그것은 길지吉地(명당明堂: 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장차 좋은 일이 많이 생기게 된다는 묏자리나 집터)로 여겨졌고, 그 생기가 흐르는 맥脈(풍수지리에서, 산맥이나 지세의 정기가 흐르는 줄기)은 산맥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생기가 축적되는 곳이 진산이며, 각 도읍은 진산을 가지고 있었다.
진산에 나무가 없으면 생기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개성의 진산 송악松嶽에 대해 벌채를 금하였고 나아가 소나무를 심게 했다고 전한다.
이는 생기를 적극적으로 회복하는 활동으로서,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즉 "산이 산다우려면 흙이 남아 있어 살이 되고 나무가 있어 피부와 모발이 되어야 한다"라는 생기론生氣論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림森林은 생기를 담고 용일涌溢(물이 솟아서 넘침)하는 것이므로 비보裨補(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았다.
비보라는 것은 풍수지리설 용어로서, 있어야 할 곳에 무엇이 없다든가 허虛할 때 그것을 보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비보의 좋은 보기로는 경북 상주의 밤나무 숲이 있다.
기록에 상주라는 고을의 지형은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서쪽에 있는 산 모양이 지네(오공蜈蚣)와 닮아 그 독을 없애기 위해 마주보는 동쪽에 밤나무 숲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밤나무와 지네는 상극이다.
밤나무가 왜 지네와 상극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밤꽃의 수술이 무서운 벌레를 닮아 지네를 이겨낸다는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양잠이 성했던 곳에서 밤나무 숲을 싫어한 이유도 벌레끼리의 상극을 생각한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지승람≫에는 서울의 진산은 삼각산(북한산)이고 경주의 진산은 낭산狼山이라 했다.
≪경국대전≫에는 "서울 부근의 산에서 목석木石(나무와 돌)을 훼손하는 것을 금한다. 그리고 주산主山과 내맥來脈에 대한 훼손을 금한다"라 했고, ≪속대전續大典≫에는 "해마다 봄과 가을 소나무와 잡목을 심게 하라"하고 법령에 명시했는데, 이것도 풍수지리설과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강릉 한송정
강릉 한송정寒松停에 얽힌 소나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송정 솔밭이라 하면 기록상으로는 강릉 동쪽 해안가 약 4킬로미터에 걸친 사구지砂丘地(모래언덕)로서 폭이 넓은 곳은 1킬로미터라고 했다.
남항진리南項津里에 한송사 터(한송사지寒松寺址)가 있다.
약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큰 늙은 소나무(노송老松)들이 울창하게 서 있었지만, 계속 벌채되어 지금은 "한송정 솔을 베어 배를 만든다"는 노랫가락만 남아 있다.
배를 만들 소나무들이 서 있었다니 그 모습이 연상된다.
이곳은 옛적 신라의 땅이라 신라의 유적과 전설이 많다.
한송정은 우리나라의 차 유적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 중 하나로서, 언제 지어졌는지 또 언제 없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라 진흥왕 때 화랑들이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송정은 신라의 화랑도 사선四仙(사선랑四仙郞)이 소나무를 심고 마음과 몸을 단련한 곳으로 도를 닦아 선거仙去(죽어서 신선이 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 시는 고려 명종 때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한송정을 읊은 것으로 ≪파한집破閑集≫에 남아 있다.
"오랜 옛날 사선四仙이 놀던 곳 (천고선유처 千古仙遊處)
푸르디 푸른 소나무가 우뚝 서 있네 (창창독유송 蒼蒼獨有松)
다만 샘 바닥에 비치던 달이 남아 있어 (단여천저월 但餘泉底月)
비슷한 그 모습 아른거리게 하네 (방불상형용 彷佛想形容)"
또한 그 무리 3천이 각각 한 그루씩 소나무를 심어 지금도 울울창창해서 소나무의 끝이 하늘을 나는 구름에 이어진다는 구절도 있다.
한편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보면 "강원도 영동 지방에는 곳곳에 소나무가 많아 그곳에서 배를 만들어 경상도 지방으로 가져오는 것이 좋겠다"는 상계上啓(조정이나 윗사람에게 사정이나 의견을 아룀)가 있었는가 하면, "요사이 무식한 자들이 소나무를 몰래 베어서 배도 만들고 집도 짓고 해서 소나무 자원이 거의 없어졌으니 실로 우려할 바로서, 지금부터는 소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곳을 조사 치부置簿해놓고(금전이나물건따위가 들어오고나감을장부에 기록함) 소나무가 있는 곳에 대해서는 엄하게 벌채를 금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도의 감사로 하여금 나무를 심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상서上書(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 대해서 왕이 이것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강릉의 한송정 주변에 소나무 조림이 왕성했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조선 초에 이미 소나무 목재의 이용 가치를 알았고, 아울러 솔숲의 한량없는 풍치風致(고상하고 훌륭한 운치나 경치)적 가치를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도 "가옥 주변에 나무를 심을 때에는 소나무(창송蒼松/청솔: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취죽翠竹/청죽靑竹: 푸른 대나무)를 심으면 되는데, 이와 같이 하면 주위가 나무로 둘러싸여 생기가 솟아나는 법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당시에는 송죽松竹(소나무와 대나무)이 주거 환경의 구성 수종으로 숭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해 여름에 필자는 강릉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로 오는 도중 평해平海에서 월송정越松亭 쪽의 소나무 숲을 발견하였다.
솔숲의 풍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어느 때인각 더 긴 시간 동안 조용히 찾아보고 싶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강원도 평해군 월송정, 푸른 소나무 만 그루(창송만주蒼松萬株), 백사장은 눈이 온 것 같고 전하기로는 신라 선인仙人 술랑述朗 등(신라 사선四仙 화랑: 술랑, 남랑南郎, 영랑永郞, 안상安詳/安常)이 이곳에서 쉬었다"라고 하고 있다.
바람이 불면 솔밭은 거문고를 타는 소리로 변하고, 달이 뜨면 솔밭에 황금 모래알을 뿌려놓은 것 같다는 표현은 솔숲의 풍치를 극찬한 것으로, 이와 같은 감정이 우리 민족의 성격을 만들어 갔기 때문에 우리나라 백성은 평화를 좋아하고 속기俗氣 없는 깨끗한 정신을 숭상하게 된 것이다.
○소나무 예찬

뜰이 있는 집을 갖게 된다면 필자는 우선 한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싶다.
소나무는 계절성 나무가 아니고, 아침과 저녁의 나무도 아니며, 맑은 날 흐린 날을 가리는 나무도 아니고, 어느 날 어느 상황에서나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어울리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비 오는 날 그리고 눈 오는 날 가장 아름답고, 바람 부는 날에도 그만이며, 이 세상에 이러한 나무는 따로 없다.
맑은 날 눈을 덮어쓴 소나무(천청설무송天晴雪霧松)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비가 지나간 뒤의 소나무의 푸름(과우간송색過雨看松索)을 생각해보라.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그 아름다움은 경박하지 않고 장중하며, 화사하지 않고 엄숙하며, 다변多辯하지 않고 과묵하며, 속俗되지 아니하고 고결하며, 자질구레한 기교 없이 생략적省略的이며,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평면적이 아니고 다차원적이며, 편협하지 않고 화동적和同的(사이가 멀어졌다가 다시 뜻이 잘 맞게 됨)이다.
이러한 이유로 시 속에서 "방에 들어서자 한 그루의 푸른 소나무만 보이고, 장수長壽의 약을 끓이는 붉은 숯불을 보노라(입문유견일청송入門唯見一靑松 약로유화단복藥爐有火丹伏)"하는 광경은 선인仙人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의 세상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양화소록≫에 나오는 소나무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소나무 줄기를 청룡靑龍에 비긴 것이 있고, 또 식송론植松論(소나무 재배법)의 설명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소나무를 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숭산嵩山과 대산垈山에 심으면 바다의 정기가 몸 안에 고이고, 해와 달빛이 비치어 봉황새가 날아와 쉴 것이며, 나무 아래에는 샘물이 소리를 내어 흐를 것이고, 신령스러운 바람이 아름다운 피리 소리를 무색하게 할 것이며, 곧은 뿌리는 땅속 황천黃泉의 깊이에 이를 것이고, 가지는 뻗어 푸른 하늘에 닿을 것이다. 줄기는 명당明堂의 기둥감이 될 것이고, 큰 집의 대들보가 될 것인즉, 이는 많은 나무 가운데 으뜸이라."
이는 소나무를 극찬한 것으로, 이 외에도 소나무는 초일超逸(어떠한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음)하다는 칭찬을 많이 받고 있다.
사명대사四溟大師는 풍천豊川 임씨任氏로 필자의 선조가 되는 분이다.
대사가 지은 <청송사靑松辭>는 소나무를 찬양한 명문으로 그 내용을 소개해본다.
"소나무여 푸르도다 (송혜청혜 松兮靑兮)
초목의 군자로다 (초목지군자 草木之君子)
눈서리 이겨내고 (상설혜불부 霜雪兮不腐)
비이슬도 기뻐하지 않네 (우로혜불영 雨露兮不榮)
안 좋을 때나 좋을 때나 변함 없구나 (불부불영혜 不腐不榮兮)
겨울이나 여름이나 항상 푸르고 푸르도다 (저하청청 這夏靑靑)
푸르도다 소나무여 (청혜송혜 靑兮松兮)
달 뜨면 달빛을 금모래처럼 체질하고 (월도혜절금 月到兮節金)
바람 불면 청아한 거문고 소리 내는구나 (풍래혜명금 風來兮鳴琴)"
주희朱熹의 ≪격물론格物論≫에는 소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모두 소나무를 극찬하는 문장들이다.
"소나무에는 품종이 두어 가지 있는데, 잎이 3개인 것을 '고자송枯子松'이라 하고 5개 인 것을 '산자송山子松'이라 한다. 산자송은 송진松津(송지松脂)의 맛이 떫은데, 땅속에 들어가 천 년이 지나면 복령茯苓(소나무 뿌리에 공생하는 버섯)이 되고, 또 천 년이 지나면 호박瑚珀(송진이 화석처럼 굳어 만들어진 노란 보석)이 된다. 큰 소나무는 천 년이 지나면 그 정기가 검정 소(청우靑牛)가 되고, 누워 있는 거북으로 된다."
한편 ≪양화소록≫에 수록되어 있는 <화목구품花木九品>을 보면, 일품一品에 소나무, 대나무, 연蓮, 국화가 해당되고, ≪화암수록花庵隨錄≫의 9등급을 보면 1등급에 소나무, 매화, 국화, 연, 대나무가 들어 있다.
물론 이러한 등급은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첫 번째로 모두 소나무가 들어가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또 ≪화암수록≫에 28우友라는 것을 들고 있는데, 그중 소나무는 노우老友라 했다.
무어니 해도 소나무는 오래될수록 운치가 더해가기에 그와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소나무 보호 정책

조선시대에는 소나무 보호에 힘쓴 기록이 많다.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입구 부근에는 나라에서 나무베는것을금지하여솔숲을 보호하기 위해 봉산封山 또는 금산禁山으로 해서 보호의 석표石標를 세웠는데, 아직까지 이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돌 표면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고 새겨져 있는데, '황장'이란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이는 소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소나무가 굵고 오래되면 줄기 속 목재의 색깔이 노란색을 띠게 되는 데서 연유하였다.
정약용의 시에도 "완도 앞바다에 나무 가득 실은 배, 황장목黃腸木 한 그루면 천 냥 값이 된다네(궁복포전시구선弓福浦前柴溝船 황장일수직천전黃腸一樹直千錢)"라고 하여 소나무를 중요한 나무로 인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종 8년(1408) 왕께서 상왕上王(정종)과 함께 건원릉에 가서 태조 이성계의 동지제冬至祭를 지낼 때 산세를 내다보시고 말씀하시되, "능침陵寢(임금이나 왕비의 무덤)에는 예부터 송백松柏(소나무와 잣나무)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하물며 나무 없이 벗겨져 있게 해서 될 것인가. 쓸모없는 것을 뽑아버리고 송백을 심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능원묘陵園墓(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과 왕세자나 왕세자비와 같은 왕족의 무덤인 원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나무였으며, 이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1410년에도 창덕궁과 건원릉에 소나무를 심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1408년의 명령이 그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 것 같다.
그 이듬해에 "공조판서를 보내 경기도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해서 남산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20일 동안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의 남산이나 지금의 남산이나 크기는 비슷했을 터인데 장정 3천 명이 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대규모 조림사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했다면 남산은 아마 온통 솔밭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예전부터 소나무가 크게 숭상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세종 6년(1424)에는 봉상시奉常寺(나라의 제시를 관한 업무를 맡아보던 관아)의 일로 예조禮曹가 공문을 내려 "모든 제단 주위에는 소나무를 심으라"하고 있다.
그해에 병조兵曹에서는 "병선은 나라를 지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으로, 그것을 만드는 데에는 소나무 목재를 사용하는데, 그동안 오래 계속해서 배를 만들어 왔으므로 바다나 강 등 물에 가까운 곳에는 소나무 자원이 거의 고갈되었고, 또 불을 놓아 농경지를 일구는 무리들이 산불을 나게 하여 소나무의 자람에 지장을 주고 있어 매우 우려할 바로서······"라 하고 있다.
목재 운반이 쉬운 바닷가의 소나무가 조선재로 그간 많이 벌채되어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소나무는 배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삼림정책으로 금산禁山, 봉산封山, 시장柴場(관청의 땔감 채취를 위하여 특별히 지정된 삼림지역), 임수林藪, 향탄산香炭山, 능원묘의 해자垓子/垓字, 금송禁松(소나무 벌목 금지) 그리고 특수 용도 수종의 재식栽植(나무심기)과 납세納稅 따위가 있다.
그중 금산禁山이란 땔감, 개간, 화전 따위를 금하는 수목樹木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몇 가지 성질을 삼림으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수도인 한양 주변의 산에는 나무를 남겨 풍치를 조성해서, 말하자면 서울의 존엄성을 유지시키고자 일반 주민의 이용을 금했다.
이것이 도성의 사산四山인데, 도성내외산都城內外山(내사산과 외사산)이라 해서 금산제도에 묶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풍치보안림風致保安林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렇게 도성의 산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당시의 풍수설에 의해 크게 뒷받침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나무를 심어 도읍으로서의 생기를 찾고 유지한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세종 30년(1448)에 풍수지리, 즉 음양학의 전문가 김수온金守溫이 다음과 같이 임금에 상서上書하여 인가를 받았다.
"지금 서울 부근의 산에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서 흙을 파고 돌을 캐서 나무가 무성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산은 황폐하고 나무는 쇠잔衰殘(쇠하여 힘이나 세력이 점점 약해짐)하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서울 주변의 산에 대해서는 공과 사를 막론하고 나무와 돌을 보호하도록 해서 산악의 정기를 보호하고 배양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서울 주변의 산악은 금산禁山의 하나였다.
그다음으로 관방금산關防禁山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군사전략상 보호·유지시킨 높은 재(산령山嶺)의 삼림으로서,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문경의 새재(조령鳥嶺), 단양의 죽령竹嶺, 영동의 추풍령秋風嶺, 황해도의 동선령銅仙嶺, 강원도와 함경남도 경계에 있는 철령鐵嶺, 함경남북의 도계에 있는 마천령摩天嶺 같은 곳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영액금산嶺阨禁山이었다.
또한 연해금산沿海禁山이 있었는데, 이것은 선재금산船材禁山 또는 선재봉산船材封山이라고도 했고, 주로 해안가와 도서 지방에 지정된 소나무 숲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세종 30년(1448)에 금산이 구체적으로 지정되고 있는데 200개소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약 90퍼센트는 포浦·도島·곶串으로 되어 있으며, 이러한 금산은 해양성으로 배를 만들기 좋은 바닷가였다.
이처럼 금산은 자세히 조사되고 장부에 기록되어 엄하게 보호되었다.
이러한 섬과 해안에는 원래 가시나무 종류, 동백나무, 녹나무, 사스레피나무, 후박나무 따위의 늘푸른넓은잎나무(상록활엽수)들이 숲을 만들고 있었는데, 바닷가는 사람들이 고기를 잡아 정착하기에 알맞았으므로 일찍부터 나무가 땔감으로 벌채되었을 것이고, 그 자리에 소나무 종류가 들어서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늘푸른넓은잎나무숲은 한 번 황폐화되면 회복되기가 더욱 어려우므로 소나무 숲이 지난 천 년 이상은 해안과 도서의 우세 수종으로 군림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장소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한편 ≪만기요람萬機要覽≫ 중 소나무 숲 정책 송정(松政)을 보면, 육도六道 즉 공충도公忠道(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의 봉산의 수는 282개소, 황장봉산은 60개소, 유명송전有名松田은 293개소로 기록되어 있다.
임수林藪는 도읍 부근의 평지림平地林으로 방풍, 방수, 풍치, 비보裨補(풍수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거나 보수하는 것), 풍수설, 군사적 목적 따위로 설치된 것으로, 금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금벌되고 보호되었으며, 그 면적은 금산에 비해 대체로 좁았다.
임수의 구성 수종은 소나무 외에도 팽나무, 서어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왕버들, 상수리나무, 느릅나무 등 다양하다.
경남 함양의 상림上林, 경주의 계림鷄林, 제주도 평대리의 비자림榧子林 따위가 임수의 좋은 예이다.
능원묘의 경계인 해자垓子/垓字 숲도 보호되었다.
민간인의 분묘 주변에는 대개는 소나무를 심어 보호했는데, 이것도 해자림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내해內垓라든가 외해外垓라는 것은 능원묘가 차지하는 구역의 한계를 뜻하는 것으로, 이 내해자內垓子 안에 있는 숲은 능을 지키는 참봉(관아의 종구품 벼슬)인 능참봉陵參奉과 그 밑에 많은 직원을 두어 보호했다.
한편 향탄산香炭山을 통해 능의 전례제사典禮祭祀(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 및 제사)에 쓰기 위해 산을 지정하고 그곳 주민으로 하여금 숯을 굽게 해서 상납시킨 것을 알 수 있다.
수원 광교산光敎山이 이러한 향탄산이었고, 서울 홍릉洪陵의 향탄산은 경남 양산 통도사 일대의 산이었다.
이때 숯을 구운 나무는 아마도 참나무류나 소나무류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나무 숯이 질로 보아 가장 좋긴 하지만, 숯을 굽기 위해서는 소나무 장작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3(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6. 1.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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