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3: 편들기: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1-보수주의 원리, 자유주의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3: 편들기: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1-보수주의 원리, 자유주의
새샘 2026. 1. 13. 12:05
19세기 초에 일어난 반란들은 프랑스 혁명이 제기한 문제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에 한층 뚜렷하게 정의된 집단들과 경쟁하는 신조信條 또는 이데올로기 ideology(이념, 사상체계, 관념형태)들이 형성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정치적 질서에 관한 시종일관된 사고체계, 즉 세계가 어떤 것인가 또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이 의식적으로 경쟁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근대의 주요 이데올로기, 예컨대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내셔널리즘 nationalism)은 이 시대에 처음 명확히 표현되었다.
이 사상들은 훨씬 더 이른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계속되는 정치적 투쟁으로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적·사회적 사고에 엄청난 자극을 준 것으로 판명된 산업혁명(제19장 참조)과 사회적 변화들은 그것에 수반되어 일어났다.
산업의 발달이 진보를 가져다줄 것인가 아니면 비참함을 불러올 것인가?
'인간의 권리'란 무엇이며 누가 그 권리를 누릴 것인가?
평등은 반드시 자유와 손을 맞잡고 갔는가?
이렇게 예외적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시대는 이런 질문에 대해 몇 가지 상이한 대답을 토해냈다.
정치적 지평에 대한 간략한 개관이 18세기 이래로 대안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그 입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보수주의 Conservatism 원리
일반적으로 빈 회의 Congress of Wien(1814~1815)와 19세기 초 복고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지배적 개념은 정통성正統性 legitimacy이었다.
정통성은 혁명에 반대하는 일반적인 정책으로서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녔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 질서에 관한 최적의 완곡 어구로서 이해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군주정의 권위와 계급 제도적 사회질서 모두를 정통성 있게 만들고 따라서 그것을 굳건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당대의 가장 사려 깊은 보수주의자들은 구질서가 완벽하게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남거나 그런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1820년대 이후에 복고가 도전받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군주정이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고 귀족이 국가의 정당한 지도자이기에 양자가 공적 생활에서 적극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귀족과 국왕이 과거의 의견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공동의 관심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변화는 서서히 증진되어야 하고 권위의 구조는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과거를 보수하고 전통을 장려하는 것은 질서정연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1729~1797)의 저작들은 19세기를 위한 평가 기준이 되었다.
그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은 처음 출간되었던 1790년대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시대적 맥락에서 더 영향력이 있었다.
버크는 모든 변화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위험상 추상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자연권에 대한 논의에는 반대했다.
그는 헌법에 대한 열광은 오도된 것이고 '이성을 따르게 하는 힘'에 대한 계몽주의적 강조는 위험한 것이라고 믿었다.
대신에 버크는 경험, 전통, 역사에 따를 것을 권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Joseph de Maistre(1753~1821)와 루이 가브리엘 앙브루아즈 보날 Louis Gabriel Ambroise de Bonald(1754~1840)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절대군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주요 기둥인 가톨릭교회를 위해 조심스레 옹호론을 썼다.
메스트르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을 위해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것을 비난했고, 계몽주의적 개인주의가 사회를 한데 묶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유대감과 집단적인 제도(예를 들면 교회나 가족)를 무시한다고 공격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본 것처럼 군주정, 귀족정, 교회는 사회적·정치적 질서의 대들보였다.
이들 제도는 새로운 세기의 도전에 직면해 함께 고수할 필요가 있었다.
보수주의는 단순히 지식인의 영역만은 아니었다.
19세기 초 한층 더 폭넓게 토대를 둔 종교의 부흥 역시 혁명에 대한 대중적 반동과 질서·규율·전통에 대한 강조를 표현했다.
더욱이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인근 집단을 훨씬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역사와 역사가 전개되는 어수선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식에 대한 그들의 강조 그리고 과거에 대한 그들의 자각은 점차 19세기 전반기의 사회사상과 예술적 상상력의 중심이 되었다.
○자유주의 Liberalism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적 자유나 권리에 대한 헌신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지식·진보·번영을 촉진시키면서 모든 사람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믿었다.
자유주의는 우선 전통적인 특권의 종식 그리고 높은 지위의 권력과 세습적인 권한의 제한을 의미했던 법 앞의 평등을 요구했다.
둘째, 자유주의는 정부가 국민의 정치적 권리와 동의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셋째, 경제학적 측면에서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나 경제적 개인주의가 이롭다는 믿음을 뜻했다.
법적·정치적 자유주의는 17세기 말 존 로크 John Locke(1632~1704)의 저작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로크는 절대주의에 대항한 영국 의회의 반란과 영국인이 '양도할 수 없는(inalienable)' 권리를 옹호했다(제15장 참조).
자유주의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작가들 그리고 특히 아메리카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선언서들(미국 <독립선언서>와 프랑스 <인권 선언>)과 더불어 발전해왔다.
전횡적인 권능·투옥·검열로부터의 자유, 언론의 자유, 회의를 소집하고 심의할 권리 따위와 같은 모든 원리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출발점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믿었으며, 이러한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고 성문화된 헌법으로 보장되어야만 한다고 믿었다(반면 앞서 본 것처럼 보수주의자들은 헌법이란 추상적이고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세습 군주제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입헌적인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모든 자유주의자는 권력을 남용하는 군주는 합법적으로 폐위시킬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에 직접 선출한 대표—최소한 재산을 소유하고 권력의 책임을 다할 것으로 기대되는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를 둘 것을 주장했다.
자유주의는 결코 민주주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이 투표권을 가져야 하는가가 뜨겁게 논의된 문제였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에 대해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던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은 권리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과 정치적 혼란에 대한 두려움을 놓고 분열되었다.
그들은 재산과 교육이 정치 참여의 필수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부유한 자유주의자는 투표권을 보통 사람에게 확대되는 것을 반대했다.
남성의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것은 정말로 급진적인 것이었고, 여성이나 유색인에게 선거권을 주자고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 훨씬 급진적인 것이었다.
노예제와 관련해서 19세기의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의 모순을 물려받았다.
개인적 자유에 대한 믿음은 기존의 경제적 이해관계, 질서와 재산을 유지하고자 하는 결심, 그리고 더욱더 '과학적인' 급진적 불평등 이론과 충돌했다(제19장 참조).
경제적 자유주의는 좀 더 새로운 것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창건한 문서는 애덤 스미스 Adam Smith(1723~1790)의 ≪국부론≫(1776)이었다.
이 책은 자유 시장의 이름으로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세입을 늘리기 위해 제조업과 무역을 규제하는 정부 정책)를 공격했다.
경제는 '천부적 자유의 체계 system of natural liberty'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스미스의 주장은 제2세대 경제학자들에 의해 보강되었고 1838년에 창간된 ≪경제학자 Economist≫라는 학술지에서 대중화되었다.
경제학자들(또는 당대에 그렇게 불렀듯이 정치경제학자들)은 기본적인 경제 법칙, 예컨대 수요와 공급의 법칙, 무역 균형, 수확 체감의 법칙 따위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들은 경제 정책이 이런 법칙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데이비드 리카도 David Ricardo(1772~1823)는 임금과 지대地代가 각각 장기간 오르내린 결과를 결정하려고 노력하면서 임금과 지대의 법칙을 상세히 설명했다.
정치경제학자들은 경제 활동은 규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노동은 길드나 노동조합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계약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재산은 봉건적 제약으로 방해를 받아서도 안 되었다.
상품은 자유롭게 유통되어야 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정부가 허가한 독점뿐만 아니라 특히 곡물, 밀가루 또는 옥수수 같은 중요한 상품들에 대한 전통적인 시장 규제 관행의 종식을 뜻했다.
아일랜드 Ireland 대기근 시기에 그들의 저작은 정부 간섭이나 구제에 대한 반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제19장 참조).
국가의 기능은 최소한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정부의 역할은 질서를 유지하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어야지 경제력의 자연적 활동, 즉 대략 "일이 자기 힘으로 굴러가게 내버려두어라"라고 번역되는 자유방임주의 laissez-faire의 신조를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
정부 간섭에 대한 이런 준엄한 반대는 19세기의 자유주의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주의와는 상당히 다르게 만든다.
자유自由 liberty와 해방解放 freedom은 여러 나라에서 서로 다른 것을 뜻했다.
강대국들에게 점령당한 나라에서는 자유당이 외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했다.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의 식민지들은 에스파냐 España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했고, 이와 비슷한 투쟁이 오스만튀르크 Ottoman Turks에 대항한 그리스 Greece와 세르비아 Serbia, 오스트리아 Austria에 대항한 북부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 러시아 Russia의 지배에 대항한 폴란드 Poland 따위에서 일어났다.
중부 및 남동 유럽 Europe에서는 자유란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최소한 교육받은 엘리트가 정치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해주고 지방의회에 더 많은 권리를 주며 대의제적 국가 정치제도를 창조하는 것을 뜻했다.
일부는 영국 UK의 정부 체제를, 또 다른 일부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본보기로 열거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급진주의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문제는 입헌적이고 대의제적인 정부였다.
러시아, 프로이센 Preußen(영어 Prussia), 그리고 복원된 부르봉 군주정 Bourbon monarchy 아래의 프랑스 France 같은 나라들에서 자유란 투표하고 회합하며 검열을 받지 않고 정치적 주장을 출판할 권리 같은 정치적 자유를 뜻했다.
정치적 자유가 상대적으로 잘 확립되어 있던 영국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시민권의 확대, 자유방임 경제와 자유 무역, 제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의 창출을 목표로 한 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국의 자유주의자는 제러미 벤담 Jeremy Bentham(1748~1832)이었다.
벤담의 주요 저작인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은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계몽주의의 유산을 지속시켰고 또한 어떻게 변형시켰는가를 보여준다.
벤담은 스미스와는 달리 인간의 이해관계가 자연적으로 조화롭다거나 한정적인 사회질서가 일군의 이기적인 개인들로부터 자연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사회가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라는 조직 원리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제도나 법(선거제도나 관세 따위)은 그것의 사회적 유용성, 즉 그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창출할 수 있을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어떤 법이 이 기준을 통과한다면 그것은 성문화될 수 있고,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공리주의자들은 개인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개인 각각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기에 가능하다면 자신이 적합하다고 보는 그런 이해관계를 자유로이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며, 최대 다수의 이해관계, 즉 행복과 충돌할 때에만 개인의 자유가 박탈된다.
매우 실용적인 공리주의 정신은 개혁을 향한 신조로서 자체의 영향력을 고양시켰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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