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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호관 이인상 '병국도'

새샘 2026. 1. 13. 20:24

"올곧은 선비가 그린 병든 국화"

 

이인상, 병국도, 종이에 수묵, 28.5x14.5cm, 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알알이 맺힌 꽃망울 속으로 빨려든다.

샛노란 국화의 물결이 한창이다.

팔공산 가는 길, 화훼단지가 장원급제한 선비의 이마처럼 국화로 환하다.

언제나 꽃들은 계절보다 먼저 와서 싱그러운 자태를 뽐낸다.

봄에는 난초, 여름에는 연꽃, 가을에는 국화가 호객행위에 나선다.

덕분에 계절마다 제철의 꽃들이 집안 분위기를 바꾼다.

올해도 노란 국화는 식탁과 거실에서, 진분홍 국화는 쪽마루(베란다 veranda)에서 가을을 선사한다.

 

늦가을(만추晩秋)에 팔공산으로 들어갔다가 기나긴 단풍놀이 행렬에 갇히고 말았다.

막바지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은 모양이다.

밀리는 차량 속에서 본 바깥 풍경은 탐스러운 국화 세상이다.

순간 착잡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 <병국도病菊圖>(병든 국화 그림)가 떠올랐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국화도 결국 시들어서 스러지기 때문일까.

모두가 싱싱한 국화로 그 오상고절傲霜孤節('서릿발이 심한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국화’를 이르는 말)을 기릴 때, 이인상은 병든 국화로 마음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국화는 가을의 정취를 북돋워주는 꽃이다.

사군자 중 굳은 절개를 상징한다.

예술가들이 곁에 두고 즐겨 다룬 소재였다.

단정하고 소박해 꾸밈이 없는 꽃이다.

꽃이 시들어도 꽃잎이 떨어지지 않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색상이 아름다워 눈을 즐겁게 하고, 향기가 그윽해 심신을 편안케 한다.

국화는 차로 애용되는가 하면, 베개 속에 채워져 숙면을 취하게도 한다.

다양한 용도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꽃이 국화다.

 

이인상은 영의정을 지낸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與(1585~1657)의 후손이지만 증조부가 서얼이었기에 그도 서얼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후손답게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비록 신분의 제약으로 평생 가난한 하급관리 신세였지만 학식이 높고 출중해 명사들과 학문을 교유하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서예와 그림, 전각篆刻(나무, 돌, 금옥 따위에 인장을 새김), 시문詩文(시가와 산문)에도 뛰어나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이인상의 예법藝(글 쓰는 법)과 화법畵法(그림 그리는 법)에는 모두 문자기文字氣('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의 준말로서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이란 뜻)가 있다"고 칭송했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하는 시대에 남종문인화(산수화의 2대 화풍 가운데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의 경향)에 주력한 이인상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작품은 먹의 농담이 은은해 깊은 맛이 우러난다.

빼어난 기교도 서툰 듯 기품있게 표현한 것이 이인상 그림의 멋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게 하는 고졸古拙한(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미美가 있다.

소나무를 특히 잘 그렸고, 산수화·인물화·국화를 개성적인 기법으로 그렸다.

경물景物(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과 여백의 조화는 강한 여운을 남긴다.

 

<병국도>는 국화와 바위, 대나무가 어우러진 늦가을의 정취를 담았다.

주인공인 국화는 계절 중 가장 늦게 꽃을 피워 오래도록 향기를 전한다.

이인상은 왜 하필 누구도 그리지 않는 병든 국화를 그렸을까.

그가 이십대에 지은 '병국病菊'이란 제목의 시를 보면 짐작이 간다.

"시든 꽃도 떨어지지 않아서, 새 꽃도 걱정스럽네. 늦가을 바람이 또 세차더니, 꺾어져 떨어지니 가을을 이기진 못했구나."

시에서는 국화를 즐기기보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국화를 걱정한다.

그림에서도 국화는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모습이 기개와는 무관하다.

이파리는 시들었고, 가는 줄기는 큰 꽃봉오리를 유지하느라 힘들어 보인다.

병든 국화가 자신의 처지인 양 그림도 시처럼 애잔하다.

 

<병국도>에는 세 그루의 국화를 맑은 먹 선으로 그렸다.

가장 먼저 핀 국화는 이미 고개를 떨구었다.

또 한 그루는 바위 뒤에 숨은 듯 피어있다.

국화 옆에 대나무가 가지를 뻗었다.

배경에는 갈필渴筆(그림을 그릴 때 쓰는, 빳빳한 털로 만든 붓)로 거친 바위를 층층이 그렸다.

바위에 태점笞點(바위나 흙, 나무에 자란 이끼나 작은 식물을 표현하기 위해 찍은 점)을 찍어 변화를 주었다.

오른쪽 공간에는 '남계南溪의 겨울날 우연히 시든 국화를 그렸다(남계동일우사병국南溪冬日偶寫病菊)'는 화제와 '보산인寶山人'이라는 호가 배치되어 있다.

≪능호집凌壺集≫의 초고인 ≪뇌상관고雷象觀藁≫(뇌상관은 이인상의 또 다른 호)에는 이인상이 스물셋 무렵 남계에 살았던 기록이 있어 <병국도>는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이인상은 화려한 꽃으로 살기보다 스스로 자신을 불태운 단풍이길 바랐다.

기교가 화려하지 않아 자세히 보게 만드는 작품은 마치 이인상을 보는 듯하다.

그의 인생은 꽃길이 아닌 낙엽 속에서 더 빛났다.

빛나는 가문도, 유행하던 화풍도 등진 채 자신만의 길을 간 것이 외려 조선 후기 문인화의 맥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 쪽마루에는 여전히 진분홍의 국화향이 그윽하다.

크고 작은 수포水疱(물집)처럼 징그럽기까지 하던 꽃망울이 두어 달 동안 꽃을 피우는 모습이 놀라웠다.

또 시든 꽃잎은 그대로 오그라들어 피기 전의 꽃망울로 되돌아갔다.

꽃 주위는 공기마저 맑고 깨끗하다.

그래서 국화가 사랑 받는 것일까.

맑은 국화가 지면 농익은 가을도 진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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