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애춘 신명연 '연꽃' 본문
"두 송이 연꽃으로 시대의 변화를 밝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에 민감한 이들이 예술가다.
변화에 맞춰 미의식도 색다른 것을 원한다.
조선시대 말기, 시대의 변화 속에 화가들도 현세의 흐름을 이식하기에 바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새로운 바람은 작품 감상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산뜻하면서도 세련된 먹 기법의 화조화花鳥畫(꽃과 새를 그린 그림)가 감상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화조화에 불씨를 지핀 화가는 단연 애춘靄春 신명연申命衍(1808~1886)이었다.
그의 작품 <연꽃>은 환한 등불로 감상자의 눈을 밝혀준다.
화가의 감성으로 꽃핀 작품은 혼란한 시대에 맞선 변화였다.
신명연은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의 둘째 아들이다.
열일곱에 무과에 합격하여 칠십대 초반까지 정3품 당상관으로 부사府使로 재직했다.
관직에 있으면서 사군자, 화조, 화훼, 산수, 인물을 비롯한 다양한 회화장르를 소화했다.
그리고 '이색적인 화풍'으로 조선시대 말기에서 근대 초입까지의 시대 흐름을 담았다.
아버지 자하 신위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갖춘 문신이자 명성 높은 서화가였다.
1812년 서장관書狀官(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으로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문물을 보고 견물은 넓혔다.
청에서 만난 대학자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교유하며 국제적인 예술관을 형성한다.
신위는 묵죽화墨竹畫(먹 즉 수묵水墨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으며, 많은 양의 중국 회화를 소장하고 감상한 품평가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신명연은 청대의 새로운 학문과 서화를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회화세계에 반영하였다.
조선 말기는 신분이 와해되는 시기로, 그는 서자임에도 관직에 나갈 수 있었고, 작품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신명연은 십대 초반부터 형 신명준申命準(1803~1842)과 아버지 신위에게 시서화를 배우고 재능을 보였다.
그가 열한 살에 지은 시구詩句, "한편으로는 눈이 오고 한편은 사라지는구나(일변설래일변소 一邊雪來一邊消)/ 봄눈과 봄비가 같이 우거지네(춘설춘우동애애 春雪春雨同靄靄)"에서 따온 '애춘靄春'을 호號로 사용한다.
열세 살이 되면 '애춘동자'라는 호칭을 받을 만큼 시와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평생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은 그는 화조화를 가장 많이 그렸다.
섬세하고 세련된 색감의 화조화를 19세기 회화로 개척한 시대적 감성을 지닌 화가였다.
신명연은 꽃과 나비를 잘 그린 일호一濠 남계우南啓宇(1811~1888)와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와 함께 조선시대 말기 화단을 다채롭고 감각적인 화풍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특히 산수화와 사군자에 조형요소로 필묵筆墨(묵필: 붓과 먹)을 활용하여 사의적寫意的인(그림에서, 사물의 형태보다는 그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린) 아취雅趣(고아한 정취)가 깃든 이상경理想景(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경치)의 문인화文人畵(전문적인 직업 화가가 아닌 시인, 학자 등의 사대부 계층 사람들이 취미로 그린 그림)를 창출하기도 했다.
청대의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며 19세기 화단의 참신한 미감으로 변화시키는데도 앞장섰다.
신명연은 청대의 화조화가인 운수평惲壽平(또는 운격惲格)(16633~1690)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운수평은 시서화에 능했다.
작품의 색채가 아름답고 우아하며 필촉筆觸(회화에서, 붓놀림에서 오는 느낌)이 경쾌해 독특한 품격을 형성한 화가였다.
그의 산수나 화훼의 창작은 자연미를 바탕으로 한 가슴속의 일기逸氣(뛰어난 기상 또는 세속에서 벗어난 기상)를 표현한 것이었다.
세련된 기교가 돋보이는 <연꽃>은 그런 일기를 발휘한 작품이다.
신명연의 화조화는 운수평의 작품에서처럼 세련된 색채에 장식성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화조화를 탄생시켰다.
조선 말기에는 꽃과 새들이 어우러진 화조화와 매화, 국화, 연화와 같은 군자의 아취를 나타내는 꽃 외에 백합, 작약, 금낭화, 옥잠화, 원추리, 수국 따위의 다양한 꽃들을 소재로 다룬 화훼화花卉畵가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다.
화훼화는 색채가 밝고 산뜻하여 장식적인 역할도 했다.
신명연이 1864년에 제작한 ≪산수화훼화첩山水花卉畵帖≫에는 19점의 꽃 그림과 21점의 산수화가 들어 있다.
작품들은 간결하면서 담백하여 일기를 풍기는 점이 특징이다.
그중 <연꽃>은 보는 순간 푹 빠져들게 하는 마력 같은 작품이다.
'연蓮'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군자를 상징한다.
<연꽃>에는 두 송이의 연꽃이 탐스럽게 피어 반짝인다.
어린아이의 볼처럼 분홍빛 꽃잎이 터질 것만 같다.
앞쪽의 봉우리를 맺은 꽃은 입을 다물고 피기 직전이다.
이미 활짝 핀 연꽃은 연밥을 드러낸 채 아우라 aura(기품氣品: 인격이나 작품 따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품격)를 자랑한다.
연꽃잎은 정갈하고도 복스럽다.
아래쪽에는 네 개의 줄기가 공간에 변화를 준다.
마치 발레 ballet를 하듯 다리 같은 줄기를 꼿꼿이 세웠는가하면, 줄기를 교차시키면서 공연에 열중하고 있다.
붉고 하얀 연꽃이 돋보이게, 두 장의 초록 잎사귀는 배경 역할에 충실하다.
연잎 색과 바탕색이 은은하여 활짝 핀 꽃에 시선이 집중된다.
주연과 조연이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빛이 되고 있다.
밝고 산뜻한 그림은 어쩌면 암울한 시대에 맞섰던 신명연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변화의 바람이 휘몰아친 시대를 염두에 두면, 무심한 듯 그린 <연꽃>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우리 집 쪽마루(베란다 veranda)에서는 화초들이 어울려 자란다.
필자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매일 철이 든다.
고요하게 물결치는 소리, 꽃이 열리는 소리, 물방을 지는 소리, 발길을 멈추는 소리, 숨죽이는 소리,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 소리 따위가 신명연의 <연꽃>처럼 필자를 깨운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6. 1. 24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간, 몇만 년을 뛰어넘어 (1) | 2026.02.10 |
|---|---|
| 정신병치료제 2 - 롤란드 쿤과 이미프라민 (0) | 2026.01.27 |
|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3: 편들기: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2-급진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초기 사회주의,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1) | 2026.01.23 |
| 퍼즐, 깨진 유물로 맞추는 역사 (1) | 2026.01.21 |
| 정신병치료제 1 - 앙리 라보리와 클로르프로마진 (1) | 2026.01.1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