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3: 편들기: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3-시민권과 국가주의(내셔널리즘) 공동체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0장 복고에서 혁명까지(1815~1848) 3: 편들기: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3-시민권과 국가주의(내셔널리즘) 공동체
새샘 2026. 2. 17. 20:58
19세기 초의 온갖 정치 이데올로기(이념, 사상체계, 관념형태) ideology 가운데서 국가주의(내셔널리즘 nationalism)의 전제들은 알기 어렵다.
국가를 정확하게 뭐라고 설명할까?
누가 국가를 요구하고 그들의 요구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19세기 초 국가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와 같은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19세기를 거치면서 국가주의가 어떤 신조에도 들어맞도록 주조될 수 있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국가 nation'의 뜻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이 용어는 '태어나다'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나스키 nasci'에서 왔으며, '공통적 탄생 common birth'을 시사한다.
16세기 영국 UK에서 국가는 귀족이나 귀족의 생득권生得權 birthright(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권리)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프랑스 France 귀족층 역시 자신들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이런 초기의 친숙하지 않은 용례들은 중요하다.
이 용례들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발전을 눈에 띄게 해준다.
즉, 프랑스 혁명은 국가를 인민 또는 주권을 지닌 인민을 뜻하는 것으로 다시 규정지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가들은 대담하게 더 이상 왕이 아닌 국가가 주권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포고문에서 혁명기 축제, 판화, 중요 기사 따위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발견되는 문구인 "비브 라 나시옹 Vive la Nation(우리나라[프랑스] 만세)"은 영토나 민족성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를 기념했다.
철학적으로 장 자크 루소 Jean-Jacques Rousseau(1712~1778)로부터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킨 프랑스 혁명가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구성원의 평등(그러한 평등의 제한에 관해서는 18장 참조)에 입각해 다시 탄생한 국가라는 주장은 한결 더 정당한 것이었을뿐더러 한층 더 강력한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인 수준에서 혁명가들은 국민국가, 군대, 법체계 따위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것들의 관할권은 귀족계급이 지녔던 이전의 지역적 특권, 국가적 법체계, 국가 군대 따위를 능가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직후에 국가는 어느 역사가가 "근대적 시민의 집합적 이미지"라고 부른 것이 되었다.
19세기 초에 '국가'는 법적 평등, 입헌 정부, 통일성 또는 봉건적 특권과 분할의 종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라는 용어를 싫어했다.
국가적 통일과 국가적 정치 제도의 창설은 귀족적 정예精銳(엘리트 elite)의 지방 권력을 축소하도록 위협했다.
신생 국가들은 보수주의자들이 위험한 추상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헌법에 의존했다.
국가주의는 그것이 엄밀하게 정치 변화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19세기 초 유럽 전역에서 자유주의자에게 중요한 표어標語(구호口號, 슬로건) slogan가 되었다.
국가주의는 보통 사람의 업적과 정치적 각성을 세상에 알렸다.
국가주의는 또한 경제적 근대성을 향해 자유주의자가 내건 요구 사항들과 서로 협조했다.
영향력 있는 독일인 German인 프리드리히 리스트 Daniel Friedrich List(1789~1846) 같은 경제학자들은 국가 경제와 국가적 기반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예컨대 그들은 더 크고, 더 강하며, 더 잘 통합되고, 한층 더 효율적인 은행, 무역, 운송, 생산, 분배 체계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리스트는 독일 영방 국가들의 영토적 분열 종식과 제조업의 발전을 '문화, 번영, 자유'에 연계시켰다.
하지만 국가주의는 다른 자유주의적 가치들을 쉽사리 해칠 수 있다.
자유주의자가 개인적 자유의 가치와 중요성을 주장할 때, 국가 건설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지극히 중요한 임무가 시민 각자의 자유를 어느 정도 희생하는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특히 국가라는 집단의 강력한 상징이었던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1769~1821)의 군대는 시민의 군대를 원했던 자유주의자에게뿐만 아니라 군사력과 권능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에게도 매력적이었다.
19세기 국가주의자들은 마치 국민적 감정이 역사의 움직임에 새겨진 당연한 것인 양 기록했다.
그들은 '독일인 German', 이탈리아인 Italian', '프랑스인 French', '영국인 British'이라는 집단의식 안에 잠자고 있는 감정들을 갑작스레 깨우는 것에 관한 시를 지었다.
이것은 사람들을 호도한다.
국가적 정체성은 (종교적, 성性적 또는 소수민족적 정체성들처럼) 역사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했다.
그것은 19세기의 특정한 정치적·경제적 발전, 읽고 쓰는 능력의 증대, 학교나 군대 같은 국가적 제도의 창설, 그리고 투표하는 일에서부터 휴일과 마을 축제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중요성 따위에 의존했다.
19세기 정부들은 국민감정을 발전시키고 자국인을 한층 더 긴밀하게 국가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교육 체계는 전통적인 방언의 원심력과 싸우면서 '국어'를 가르쳤다.
이탈리아어는 전 인구의 단지 2.5퍼센트만이 이탈리아어를 말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소수민족조차도 국가적 문화를 규정할 수 있었다.
교과서와 의식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작품을 상영하는 극장, 시, 회화 따위는 국가적 유산을 정성들여 만들고 때때로 '조작하는' 것을 도왔다.
정치 지도자들은 특정한 대의와 국가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아침에 일간 신문을 읽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활동도 사람들이 자신의 동료 시민을 생각하고 동일시하도록 도왔다.
어느 영향력 있는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면대면面對面 접촉 face to face contact이 이루어지는 원초적인 촌락(아마도 이 공동체들조차도)보다 더 큰 모든 공동체들은 다음과 같이 상상된다."
국가는 "제한되고, 주권을 지닌 것"으로 상상되고 "마침내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횡행할 수도 있는 실제적인 불평등과 착취에 관계없이····국가는 항상 심대하면서도 수평적인 동지애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민성 nationhood의 서로 다른 뜻,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정치적 믿음, 그리고 그것이 개발한 강력한 정서는 국가주의를 유난히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들이 19세기 초의 주요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이들 이데올로기는 18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19세기 초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전면에 등장했다.
19세기의 일부 이데올로기들은 프랑스 혁명의 세 구호口號, 즉 자유自由 liberté(영어 liberty), 평등平等 égalité(영어 equality), 박애博愛 fraternité(영어 fraternity)의 연속이었다.
또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보수주의처럼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이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재해석될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동안 점차 공통적인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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