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인성 '가을 어느 날' 본문
"해바라기가 있는 가을 어느 날"

가을은 도둑처럼 왔다.
손바닥을 뒤집듯 갑자기 기온이 꺾였다.
기세등등하던 폭염이 계속될 것만 같았는데, 훌쩍 높아진 하늘은 사람을 '심쿵'하게 만든다.
그동안 열대야에 지친 심신은 가을 하늘로 위로를 받는다.
대형스크린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황금빛 꽃을 활짝 피운 해바라기가 서 있다.
해바라기는 늦여름을 장식하는 꽃으로, 코발트블루 cobalt blue(코발트청靑: 녹색을 띤 짙은 파란색) 하늘과의 대비 속에 황금빛이 더욱 강렬하다.
하늘에 양떼구름까지 출현하면 최고의 가을 풍경이 된다.
게다가 서늘한 바람마저 분다면, 이대로 속세를 떠나고 싶을 만큼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린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면, 이인성李仁星(1912~1950)의 걸작 <가을 어느 날> 속으로 떠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청년화가 L을 위하여>-
해바라기는 필자의 유년시절을 품고 있다.
우리 집은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있었다.
주위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집 앞에 목장이 있는, 도시에서 약간 벗어난 평화롭고도 한적한 곳이었다.
그 시절 필자는 해바라기에 심취해 있었다.
나만의 해바라기를 심은 뒤, 성정하는 과정을 관찰해서 일기에 썼을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때 시인 함형수咸亨洙(1914~1946)를 만났다.
우연히 접한 시 <해바라기의 비명>은 사춘기 여학생의 가슴을 들쑤셔놓았다.
시를 수첩에 적어서 유서인양 몰래 꺼내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꽤나 심각했다.
하지만 성장과 더불어 해바라기는 까맣게 잊혀졌다.
불혹이 되어 느닷없이 그 시가 다시 내게로 왔다.
두 번째의 만남이었다.
역시 가슴이 뛰고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함형수는 '청년화가 L'을 위하여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사춘기 때는 시만 좋았지, 시에 얽힌 사연은 몰랐다.
사연을 알고 시를 음미해보니, 마치 화가인 나를 위한 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해바라기의 비명>을 연상케 하는 화가로 이인성이 있다.
함형수도 <가을 어느 날> 속의 해바라기를 보면서 시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인성은 열여덟 살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을 시작으로 제14회에는 <경주慶州의 산곡山谷에서(1935)>로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일찍부터 기량을 과시했다.
<가을 어느 날>은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작품이다.
붉은색 톤 tone(색조色調)에 여름의 끝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화려한 시절을 불사른 해바라기가 휘청거리듯 서 있다.
청명한 하늘에 흰구름까지 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유정幽靜(그윽하고 조용함)하게 한다.
끝없이 펼쳐진 높고 푸른 하늘은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대지에는 들풀과 꽃나무가 여름을 갈무리하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싱그러운 자태를 뽐내던 녹색의 자연은 갈색으로 물들어 세월의 무상함을 알린다.
작품의 중심에는 여인과 소녀가 등장한다.
하늘과 해바라기, 들풀과 꽃을 배경으로 여인은 반나체로 서 있다.
긴 머리에 흰 치마를 입고 팔에는 광주리를 건 채 무심히 정면(감상자 쪽)을 바라본다.
그 옆에는 고개를 숙인 소녀가 들녘을 보고 있다.
그런데 여인의 반라半裸와 소녀의 민소매 차림이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의 가을 풍경을 그렸다기 보다 상상 속의 가을 풍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성은 풍경화에 능했지만 인물화에도 기량을 보였다.
특히 그의 관심은 인물 누드화였다.
당시에 누드 nude는 우리나라의 정서상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전시를 할 수 없었다.
이인성은 고민한 끝에 여인을 전체 누드가 아닌 상방신만 누드로 그렸다.
이 점 역시 눈여겨보게 한다.
여전히 낮에는 무덥고, 밤에는 가을의 기온이 흐르는 환절기다.
<가을 어느 날>은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혼란한 시대의 산물이다.
우리의 근대미술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하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열정적인 화가들에 의해 꽃을 피웠다.
그 중심에 이인성이 있었다.
함형수는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며, 화가의 꿈을 노래했다.
그 꿈이 겹쳐지는 <가을 어느 날>을 보며,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숙인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6. 2. 1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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