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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 '오수삼매'

새샘 2026. 3. 4. 15:22

"잠조차 편히 못 자는 세상의 깊은 낮잠"

 

유숙, 오수삼매, 종이에 수묵, 40.4x28.0cm, 간송미술관(출처-출처자료1)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 Gregor Samsa는 흉측한 꿈을 꾼 뒤, 자신이 끔찍한 해충으로 변신한 것을 본다.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1883~1924)의 소설 ≪변신變身 Die Verwandlung(영어 The Transformation)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이 해충으로 변했으니, 이쯤이면 '변신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가 큰 변신이지만, 우리는 그 엉뚱함에서 현대인의 절대 고독과 인산 소외 현상을 감지한다.

 

변신은 종종 꿈이라는 특수 장치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유명한 고사 '호접몽胡蝶夢'(나비에 관한 꿈)에서 장자莊子는 꿈을 매개로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든다.

하루는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녔는데, 잠에게 깨어보니 장자 자신이었다는 이야기.

현실세계의 장자가 나비가 되어 가상세계를 날아다닌 것이다.

이는 장자가 꿈꾼 일종의 유토피아 Utopia(이상향理想鄕)였다.

장자의 이상세계는 곧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 도화서 화원인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도 <오수삼매午睡三昧>에서 스님으로 변신하여 깜빡 낮잠에 깊이 빠졌다.

그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꿈을 어릴수록 크고 가볍지만 나이 들면서 차츰 작아지다가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동심의 세계가 욕심으로 채워질 때, 꿈은 가능성에서 불가능으로 변한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간호사였다.

아픈 곳을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좋아서 그랬다.

사춘기에는 종교인이 되고 싶었고, 어느 때는 문득 현모양처가 되고 싶었다.

꿈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필자는 화가가 되었다.

 

역사의 페이지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19세기 중엽의 화단畫壇(화가들의 사회)은 풍속화와 진경산수화가 남종문인화의 바람에 떠밀려 쇠퇴기에 접어든다.

새로운 물결이 출렁이는 시기에 유숙이 살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통역을 전담하는 역관이었다.

그는 가업을 잇지 않고 화원화가가 되었다.

중인 출신으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문학과 시, 그림을 논한, 문인정신을 겸비한 심미주의자였다.

심성이 활달하고 술을 좋아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이어받았고, 추사 김정희의 남종문인화를 수용했다.

화원화가로서 궁중의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서민의 장식화도 그렸다.

여행을 하며 실경을 스케치한 진경산수화도 계승했다.

19세기 말 오원 장승업에게 화풍을 넘긴 '그림의 스승'이라는 설도 있다.

 

유숙은 화원에 몸담으면서 창작에 변신을 도모한 충실한 화가였다.

<오수삼매>를 보면, 스님만 오롯이 햇살을 받고 있다.

스님 주위에는 배경이 없다.

고요하다.

그만큼 깊이 잠들었다.

'오수午睡'는 낮잠을 뜻한다.

'오수삼매午睡三昧'는 삼매에 든 것처럼 낮잠에 깊이 빠졌다는 뜻이다.

풍성한 가사장삼의 어깨 부분이 유난히 짙다.

졸음이 짓누르는 듯한 효과를 낸다.

바위 같은 졸음의 무게가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다.

수묵의 문인정신이 깃든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1783~1837)의 그림에도 <오수도午睡圖>가 있다.

서재에서 독서를 하다가 책을 베고 자는 선비가 주인공인 그림이다.

뜰 한 모퉁이에서 찻물 끓이는 아이와 한 쌍의 학이 등장한다.

제발題跋[제사題辭(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따위를 적은 글)와 발문跋文(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개요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는 "새소리 위아래서 들려오는데 낮잠이 곧 쏟아지네"라고 적었다.

 

유숙의 그림에는 새소리 대신, 한낮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진다.

온기에 노출된 스님의 머리카락이 성글다.

두 손은 무릎에 올려두고, 그 위에 얼굴을 묻고 있다.

마치 천인天人이 하강하여 잠시 날개를 접고 쉬는 중인 것 같다.

맨발에 짚신을 신고 있어서, 무소유의 경지도 보인다.

청담한 표현에 강산 정신성이 우러난다.

대담한 옷 주름의 표현에서 호방한 성품이 느껴진다.

 

살다가 한번쯤 다른 생을 살고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유숙은 스님의 꼿꼿한 뒷모습을 보며, 스님은 푸른 물기가 서린 탑 하나를 품고 산다고 믿었다.

그 탑이 좋아서 몇 번이나 꺼내보곤 하다가 꿈에서나마 소원을 이뤘다.

 

사람은 자기만의 혜안慧眼(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혜안을 어디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예술가가 되기도 하고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예술가의 혜안은 수많은 변신을 거듭한다.

카프카는 ≪변신≫에서 문학이라는 가상공간을 통하여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현대인의 고독을 대변했다.

장자의 이상세계는 지금 이 사회에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16년 11월, 자고 일어나면 새롭게 터지는 정치 이슈(박근혜·최순실 추문)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잠자리마저 뒤숭숭하다.

꿈을 꾼다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다.

유숙은 화가로서 꿈을 펼치고, 꿈을 전파했다.

꿈은 그늘진 사회의 귀퉁이를 밝히고 저마다의 희망에 날개를 달아준다.

꿈꾸는 삶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이다.

잠마저 '순실淳實하게'(순박하고 참되게) 못 이루는 세상, 어려울수록 꿈이 더 필요하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9.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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