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미테이션 게임 본문

글과 그림

이미테이션 게임

새샘 2026. 3. 7. 10:57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F%B8%ED%85%8C%EC%9D%B4%EC%85%98_%EA%B2%8C%EC%9E%84#/media/%ED%8C%8C%EC%9D%BC:%EC%9D%B4%EB%AF%B8%ED%85%8C%EC%9D%B4%EC%85%98_%EA%B2%8C%EC%9E%84.jpg)

 

2014년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암호를 풀어낸 앨런 튜링 Alan Turing(1912~1954)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The Imitation Game>이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복잡한 수식이 등장하는 영화이지만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숫자 속에서 법칙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 과정이 마치 고고학자의 작업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유물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과거의 유물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과정은 마치 전혀 모르는 언어를 들으면서 그 안에서 문법을 찾아 공부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실제로 필자는 유학 시절에 러시아어 Russian를 독학해야 했는데, 변변한 사전이 없어서 간신히 한러 사전을 구했다.

단어 약 2,000개 정도를 냉전시대 군사용어 중심으로 번역해놓은 아주 간략하고 허점도 많은 것이었다.

어쨌든 3개월의 발굴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럭저럭 러시아어가 입에 익었다.

문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책을 좀 읽으며 소통에도 크게 지장 없게 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러시아어의 문법적인 용어 자체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읽고 쓰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은 바로 고고학자의 형식학式學 topology은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상당히 닮았다는 것이다.

 

원래 언어에서 문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모국어를 구사할 때 사람은 문법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어를 공부할 때는 나름의 규칙을 이해하기 위해 문법을 공부한다.

문법은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해당 언어를 인지하기 위한 도구로 개발되었다.

마찬가지로 고고학자 역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만들었던 유물에서 법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법이라는 것이 실제 원어민의 인식을 반드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존하는 모든 문법을 완벽하게 구사한다면 방송국의 아나운서 announcer나 컴퓨터 프로그램 computer program이 말하는 것 같은 어색함을 느낄 공산이 크다.

이렇듯 문법은 실제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원어민의 인식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인공적인 결과물이다.

 

고고학자가 만들어내는 형식도 마치 문법과 비슷하다.

고고학자는 과거를 실제 살아보지 못한 현대인에게 과거를 이해시키기 위해 형식型式 format을 만들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과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하여 현재적 관점으로 유물을 분류하는 것이 형식이다.

만약 고고학자가 나눈 형식을 초시간 여행선(타임머신) time machine을 타고 가서 당시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아마 대부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분류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필자는 영자를 배울 때에 5형식, 관사, 동명사 따위와 같이 원어민은 거의 인지하는 못하는 문법 단어로 배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법을 통해서 외국어를 배운 학생 중 상당수는 원어민을 능가하는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다.
문법이라는 것이 모국어와 외국어를 비교하고 반조
反照하는(돌이켜 살펴보는) 일종의 거울 또는 기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드물지만 성공을 이룰 수 있다.

 

고고학자의 유물 분석도 마찬가지이다.

고고학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유물을 분석하고 누가 언제 사용했는지를 밝힌다.

하지만 그런 고고학자의 연구가 과거 인간의 생각 및 제작 패턴 pattern(일정한 형태나 양식 또는 유형)에 직접 접근한다는 보장은 없다.

형식학적 분류가 과거 인간의 사용 패턴 및 인지된 유물의 분류 체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극히 일부이다.

중국 청동기에 대한 분류가 그러한데, 심지어 청동기에 명문이 새겨져 어떤 연유로 만들었는지 밝혀져 있다.

하지만 정작 발굴이 될 때는 증여, 약탈, 전래 따위와 같은 다양한 변수를 거쳐서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고고학자가 발굴한 것이다.

너무 많은 변수가 있으니 우리가 직접 유물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비교하면 정말 유물을 분석하는 고고학자의 노력은 외국어의 뜻을 알아내려는 언어학자의 문법과 정말 비슷하다.

조각나 있는 유물을 조합하고 그들 안에서 나름대로의 규칙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유물의 속삭임을 알아듣기를 기대한다.

 

대만 Taiwan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대학교 Harvard University 고고학 전공 교수였던 장광즈(장광직張光直)는 동아시아 고고학을 이렇게 평가했다.

"고고학자의 시간과 힘의 80~90퍼센트는 그의 자료를 분류하는 데에 소비한다. 나머지 10~20퍼센트 정도를 무언가 지적이고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법한 일을 한다."

그가 이 말을 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의 고고학자도 크게 차이가 없다.

많은 고고학 자료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되어도 결국 고고학자가 하나하나 유물을 정리하고 손질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주변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흔히 혼자서 꾸준히 단순한 작업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고고학에 적합하다고 조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부분의 고고학자는 토기 조각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분류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 무료해 보이는 과정은 사실 과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귀한 과정이다.

그렇게 몇십 명의 고고학자가 몇십 년 고생을 해서 쌓아올린 역사가 바로 당신이 읽고 있는 고고학 책의 한 줄인 셈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3. 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