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인골, 사람은 죽어서 뼈를 남긴다 본문
흔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적어도 고고학자에게 이 말은 틀렸다.
인간의 뼈 즉 인골人骨은 가장 소중하고 원초적인 자료가 된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인골에 새겨진 이야기는 우리의 고대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인간의 뼈를 연구하는 학문은 전통적으로 형질인류학 또는 체질인류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뼈에 남아 있는 인간의 흔적을 통해서 인류의 과거를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뼈를 연구하는 학문은 좀 더 세분화되어서 뼈에 남은 증거로 범죄를 밝히는 법의학法醫學 forensic medicine, 특히 뼈의 크기를 가지고 과거 사람의 특징을 연구하는 골학骨學 osteology, 그리고 과거의 병을 연구하는 고생물병리학古生物病理學 paleopathology 따위가 인골을 통해서 연구할 수 있는 학문이다.
인간이 죽고 땅에 묻히면 신체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뼈이다.
물론 무조건 뼈가 다 남는 것은 아니라 각각 묻혀 있는 환경이나 토양의 영향이 크다.
예컨대 한국과 러시아 연해주沿海州(프리모리예 Primorye 지방)는 강한 산성의 토양으로 뼈가 잘 남아 있지 않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래도 조개무지(조개무덤, 패총貝塚) 같은 곳(알칼리성이라 뼈가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다)이나 늪지 또는 사막같이 극도의 보존 환경에서는 잘 남아 있는 뼈가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발견된 경우는 무덤에서 출토된 뼈의 형태를 일일이 다 기록한다.
○시신의 위치가 뜻하는 것
일반적으로 인골이라고 하면 무언가 음침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고고학자에게는 뼈 자체뿐 아니라 무덤에 놓여 있는 방법 자체도 주요한 고고학적 자료가 된다.
무덤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보수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장례라고 하면 대충 하지 않고 각 문화의 전통과 풍습에 따라 최선을 다한다.
무덤에 사람을 묻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까지도 지관地官(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의 좋고 나쁨을 가려내는 사람)이 나침판(나침반羅針盤)으로 일일이 방향을 정해서 세심하게 머리가 눕는 방향을 정했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집에서 잘 때 북쪽으로 누우려고 하면 어르신이 호통을 치며 바로 누우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하물며 무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공동묘지 하나를 발굴하면 그 무덤의 방향은 대개 일정하고, 그 역시 각 집단의 특징을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시신屍身(송장: 죽은 사람의 몸)을 묻는 방법도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가 된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사람을 펴서 묻는 방식만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 발굴해서 보면 사람을 묻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옆으로 눕히기도 하고 마치 말을 타듯 무릎을 세워서 묻기도 한다.
또한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사람을 땅속에 묻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나라와 문화에 따라서는 화장을 하거나 나무 위에 시신을 걸어두는 수목장樹木葬을 하기도 한다.
셀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먼저 죽은 사람에게 예를 다하는 것이다.
무덤에 묻혀 있는 인골이야말로 과거 사람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통과 과정인 죽음에 대한 정성을 모아놓은 시간상자(타임캡슐 time capsule)인 셈이다.
무덤에서 발굴한 인골의 모습을 각각 큰 상징을 지닌다.
그 이유는 바로 무덤은 내세로 들어가는 관문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의 요소는 바로 죽은 자의 복(명복冥福: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을 뜻한다.
예컨대 말을 타듯 무릎을 세워서 묻는 것은 유목민 사이에서 많이 보이니, 저승을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몸을 옆으로 웅크려서 묻은 것은 죽음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해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시신을 접은 것이다.
화장을 하거나 수목장을 하는 것 역시 각 사회의 내세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를 믿었던 지역에서는 땅을 더럽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신을 조장鳥葬(시신을 들에 내다 놓아 새가 파먹게 하던 원시적인 장사)시키고 인골은 따로 토기로 만든 뼈 단지(골호骨壺)에 담아서 보존했다.
이런 인골에 대한 태도는 사람이 처한 지리환경에 따라 변화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장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인구밀도가 과밀화되어 묘지가 부족해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납골당이 거의 일반화되었다.
시베리아 Siberia의 원주민은 나무 위에 관을 거는 수목장의 풍습이 있는데, 이는 겨울이 길어서 땅을 파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원인도 함께 있을 것이다.
경북 울진군 후포리의 언덕 뒤에서 신석기시대의 무덤이 발굴된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길쭉한 돌도끼와 함께 여러 인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몇십 명의 인골이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인골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딘가에 가매장(아마도 수목장)해서 산골散骨(뼈가 삭아서 가루가 되어 흩어짐)되기를 기다렸다가 남아 있는 인골 무더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아마 지금 납골당의 전신인 셈이다.
○인골을 숭배하는 사람들
인간이 무덤을 만든 역사는 약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현생인류(슬기사람, 호모사피엔스 Homo sapiens)의 역사에 함께하는 셈이다.
무덤을 썼다는 것은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내세가 있다고 믿었다는 뜻이므로 종교와 제사의 기원도 된다.
멀쩡한 무덤을 다시 파헤치는 '파묘破墓(옮기거나 고쳐 묻기 위하여 무덤을 파냄)'의 풍습도 적어도 약 1만 2,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거대한 석조 기념물로 유명하여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 Göbekli Tepe in Türkiye에서는 제단에 걸었던 해골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그 위에는 화려한 색칠을 하기도 했는데, 제사에서 영정사진을 올려놓듯이 해서 다시 조상을 기억했다는 뜻이다.
괴베클리 테페 이후에 발달한 차탈회위크 Çatalhöyük(영어 Chatalhoyuk)의 신석기시대 마을 사람들은 집 안 마루 밑에 무덤을 만들던 풍습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 이전에 만들었던 무덤을 건들려면 급하게 덮어버리거나 따로 꺼내서 제단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렇게 파묘를 하는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고고학과 인류학에서는 전문용어로 '이차장 second burial'이라고 한다.
한 번 묻은 무덤을 다시 파헤쳐서 인골을 수습하고 화장한 뒤 뼈 단지에 담아서 따로 묻는 풍습을 말한다.
한국에서도 그러한 증거는 고인돌과 독무덤(옹관묘甕棺墓: 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의 경우 그 밑에 만든 무덤의 크기로 이차장의 흔적을 짐작한다.
무덤의 길이가 30센티미터 정도로 안 되는 작은 것들이 종종 발견된다.
이는 어딘가에서 무덤을 만들었다가 후에 파묘하고 다시 꺼내어 그 뼈를 모아서 넣어둔 것이다.
또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한 독무덤도 같은 원리이다.
이렇듯 파묘라는 풍습은 사실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오랜 전통이다.
○해골로 만들어진 도시

인골 자체를 숭배하는 풍습은 중세 서양이나 중남미로도 이어졌다.
특히 해골 숭배 사상이 발달한 아즈텍 문명 Aztec civilization에서는 해골에 화려한 보석과 황금을 붙여서 아름답기까지 한 예술품을 만들었다.
서양 중세시대는 더국 극적이다.
서기 9세기에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한 프랑크 왕국 Francia(Kingdom of the Franks, Frankish Kingdom)의 카롤루스 대제 Karolus Magnus(영어 Charles the Great)는 우상을 믿던 이교도를 개종시키기 위해서 성인의 유골에 믿음의 서약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교회들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성인의 유골'이라는 아이템 item(특별한 물건)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훔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성인이 갑자기 늘어날 리 없으니 나중에는 공동묘지에서 엉뚱한 유골을 파서 성인으로 둔갑시키기까지 했다.
지금 같은 유전자 검사가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해골 숭배의 결과로 도시가 만들어진 경우가 있으니, 바로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였다.
베네치아는 828년 무렵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in Egypt에서 마르코 성인聖人 Saint Marcus(영어 Saint Mark)(마가복음福音 Gospel of Mark의 저자)의 유골을 훔쳐왔고, 이를 기점으로 베네치아는 크게 흥성하여 수많은 교회 건물과 광장이 지어졌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산마르코 광장 Piazza San Marco(영어 St Mark's Square)도 바로 마르코 성인의 유골을 기념하여 지어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성인의 유골이 세계적인 도시를 탄생시킨 격이다.
서양권이 주로 해골에 집착한 반면 한국은 땅에 집착한다.
조상의 유해 자체는 금기禁忌로 여기고(터부시 taboo視하고) 대신에 좋은 곳에 무덤을 만들어서 시신이 곱게 자연으로 돌아가면 후손들이 발복發福(운이 틔어서 복이 닥침)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인골보다는 그들의 유택幽宅, 즉 무덤터를 중시하는 풍수사상이 발달하는 배경에는 한국만의 독특한 지리 지형의 조건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과 러시아 극동지역은 산성이 매우 강한 토양인지라 매장을 하면 인골이 빠르게 풍화한다.
삼국시대 고분 몇백 개를 파도 제대로 된 인골은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풍수사상은 한국이라는 풍토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사상인 셈이다.
○무덤, 부활을 기다리는 공간

무덤이라는 주제는 고고학자에게는 일상적이지만 사실 무덤이나 죽음은 모두가 꺼리는 주제이다.
고고학자끼리 회식이나 술자리에서 인골과 무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하다 보면 주변에서 눈총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무덤은 보통 생각하는 것과 달리 부활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하다.
무덤 안의 많은 유물은 사실 부활을 위한 상징이다.
●생명을 불어넣는 우유
수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무덤 속에서는 토기가 머리맡이나 발치에서 등장한다.
여기에 무엇을 담았을까 생각하면 아마 고인이 저승에 갈 때에 드시라는 뜻으로 음식을 넣었을 것이다.
즉, 부활하여 저승에 가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러시아 알타이 Altai in Russia 지역의 파지릭 문화 Pazyryk culture에서는 유목민의 쿠르간 Kurgan(크게 봉분을 쌓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유목민은 말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흙을 빚어서 구운 토기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쿠르간에서는 발치(발이 있는 곳)에서 단지 한두 개가 꼭 발견되었다.
아마도 소중한 것을 담았으리라고 추측할 뿐이지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에 그 실마리가 풀렸다.
알타이 우코크 Ukok 고원지대의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에서 액체를 휘젓는 나무막대가 함께 발견된 것이다.
신선한 우유는 금방 상하니 케피르 kefir(양이나 산양의 젖을 사용하여 만든 발효주)나 요구르트 yogurt처럼 발효시킨 유제품으로 만들어 무덤에 넣은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나는 고인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용도였다.
●천국으로 가는 열차

사람이 저승으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 시대나 사회마다 다양하게 생각한다.
대체로 삼도천三途川(삼도내: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큰 내)이나 요단강江(요르단강 Jordan River: 서아시아 요르단 서쪽을 흐르는 강)처럼 강을 건너간다고 믿거나 하늘로 올라간다고도 믿는다.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 경우는 인간이 직접 날 수는 없으니 다른 동물이나 도구를 빌려서 올라간다고 상상한다.
날개가 달린 새나 호랑이를 타기도 하고 뱀의 꼬리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도 생각했다.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Lake Baikal 서쪽에 위치한 '세로보 Cerovo'라는 마을 근처에서 발굴된 6,000년 전의 무덤에서 마치 <은하철도 999>(동기動機 즉 모티브 motive가 된 소설의 원제는 ≪은하철도의 밤≫)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샤먼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머리가 두 개인 동물이 메텔 Maetel의 치렁치렁한 머리처럼 꼬리를 했는데, 그 끝에는 그 동물과 함께 어딘가를 여행하는 샤먼의 얼굴이 달려 있다.
약간 굳은 얼굴을 한 샤먼의 모습은 긴장된 표정에서 마치 만화 속 주인공 철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하다.
앞에는 사람과 동물의 머리가 달려 있다.
아마 하나는 그들을 타고 가는 동물, 그리고 또 하나는 그를 인도하는 전령사였을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영원히 여행을 떠나는 모습은 중국의 청동기에도 새겨져 있다.
흔히 '식인食人' 장면이라고 불리는 상商나라 때의 청동기이다.
마치 거대한 동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듯한 모습이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그 귀한 제사를 위한 청동기에 굳이 잡아먹히는 사람을 새겨 넣는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 장면은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이 아니라 동물이 사람(또는 샤먼)을 입에 물고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는 장면을 묘사한다고 해석된다.
신대륙에서는 멕시코 팔렝케 Palenque in Mexico에서 발굴된 서기 7세기 때의 파칼 Pakal이라는 왕의 무덤이 유명하다.
그가 묻힌 석관의 뚜껑에는 무엇인가를 조종하며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미스터리 mystery(신비神祕)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동안 마야문명 Maya civilization의 사람은 우주선을 탔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자는 이 모습을 구름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떠나가는 파칼 대왕 Pakal the Great이라고 해석한다.
약 4,000년 전에 전차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의 상상 속 저승으로 오고가는 이동수단이 전차로 바뀐다.
구약의 에스겔서 Ezekiel書를 비롯해서 성경의 곳곳에는 하늘의 천사가 전차를 타고 오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렇게 부활(또는 영생)을 기원하며 떠나는 여정에 대한 바람은 <은하철도 999>로 친숙하다.
은하철도의 이야기에서는 전차 대신에 당시 첨단의 교통수단이었던 철도가 등장한 것만 다르지 고대 무덤에 담겨 있는 상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묵직한 쇳덩어리인 은하철도의 기차가 우주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잘 어울려 보이는 이유이다.
이렇듯 호랑이, 구름, 전차, 기차 따위의 이동수단들이 지난 몇천 년 동안 다양하게 표현되었지만 모두 인간을 저세상으로 인도해주는 매개자가 있다고 믿어왔다.
우리가 무덤에서 발견하는 여러 유물은 이렇게 부활의 의미를 가진 소중한 자료인 셈이다.
●죽은 자를 위한 마지막 예의

고고학자는 무덤을 발굴하면 손가락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자세히 기록한다.
그 이유는 고인을 염습殮襲(시신을 씻긴 뒤 수의를 갈아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했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몇 시간 이후 사후경직이 오기 때문에 사지가 제대로 굽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례를 준비하면서 무덤에 들어갈 모습을 제대로 만들어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염습의 최초 증거는 한반도 남쪽인 부산 가덕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드물게 인골이 잘 남아 있는 공동묘지가 발견되었는데, 각각의 무덤은 서로 다른 형태로 묻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웅크리고, 어떤 사람은 팔을 교차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쭉 펴기도 했다.
각각의 모습은 죽자마자 그 몸을 적당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저승으로 향하는 과거인의 사상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흔히 인간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례를 관혼상제冠婚喪祭[관례(남자가 성년이 되어 갓을 쓰는 의례), 혼례(결혼 의례), 상례(상을 당했을 때 의례), 제례(제사 의례)]라고 한다.
그중에서 상喪이야말로 고고학자가 가장 쉽게 접하는 인간의 과정이다.
이렇듯 고고학자가 발굴하는 무덤 속 인골 하나하나에는 또 다른 세계관이 담겨 있는 셈이다.
○진정한 무덤의 의미
왜 사람은 무덤을 만들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죽음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죽음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면 삶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삶의 연장이라는 생각을 담아 무덤을 만들고, 먼저 간 이들을 기억하는 축제인 제사를 지냈다.
이런 의례를 통해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
이렇게 인간의 죽음을 매장과 제사라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이고 살아있는 자들에게 체화體化(생각, 사상, 이론 따위가 몸에 배어서 자기 것이 됨)시키는 과정이 무덤이다.
우리가 때가 되면 무덤에서 제사를 지내고 또 파묘를 해서 이장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믿음이다.
고고학자가 죽은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을 통해서 과거 사람의 삶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이유는 무덤이야말로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담긴 과거 사람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플라빈스키 Dmitri Plavinsky는 중앙아시아 Central Asia의 버려진 이슬람 Islam 묘지를 거닐면서 "공동묘지의 언덕 위에서 영생을 갈구하던 영혼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무덤을 만들고 다시 파묘를 하는 그 죽음을 대하는 과정의 본질은 결국 삶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저주의 범인
인골과 인간의 잔해는 과거의 여러 전염병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인류는 끊임없이 역병과 싸워왔다.
가축을 키우면서 가축의 병이 인간에게 전해지기도 했다.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도시화가 되면서 역병의 창궐은 인간사의 일부가 되었다.
사실 전염병이 없었다면 아마 지구는 진작 엄청난 수의 인류로 덮였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일부는 전염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스페인독감 Spanish flu에서 최근 코로나-19 COVID-19(코로나19바이러스 SARS-CoV-2 감염에 따른 급성호흡기질환)까지 우리 주변에서 역병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리 인간이 대응해도 그 확산을 쉽게 막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은 세균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에도 역병의 대처 방법을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도 마을에 역병이 돌면 시신은 그냥 집에 버려두고 도망갔다.
시신과 접촉하면 그 병이 확산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전염병은 확인하기 어렵다.
전염병을 옮긴 세균은 숙주의 사망과 함께 죽는 것이 상식이다.
몇천 년씩 남아 있기는 어렵다.
물론 가끔 상태가 좋은 미라나 무덤에서 우리가 모르는 바이러스나 세균이 고고학자를 공격할까 하는 두려움이 들긴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무덤이 심각하게 고고학자의 생명을 위협한 적은 없다.
1922년에 이집트 투탕카멘왕 King Tutankhamun of Egypt의 피라미드 pyramid를 발굴할 때에 발굴에 참여한 여러 사람이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미라의 저주'는 피라미드 안의 알지 못하는 세균 때문이라는 설도 나돌았다.
그런데 미라의 저주로 죽었다는 것도 사실 수많은 관련자 중에서 다양한 사인으로 죽은 사람을 '저주'라는 이름으로 엮은 것에 불과하다.
이 글을 보는 고고학을 지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 말기를 바란다.
하물며 그 '저주'는 정작 발굴을 주도한 카터 Howard Carter에게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염병을 고고학으로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갑자기 어떤 지역에서 인구가 감소하고 묘지가 급증했다면 전염병의 증거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중세시대에 유라시아 Eurasia 일대에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 Nestorianism 선교사의 무덤이 비단길(실크로드 silkroad)을 따라서 난데없이 발견된다.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 pest로 몰살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글자를 쓰는 시대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경우이다.
선사시대에는 그러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기후변화이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에서 세균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흔히 볼 수 있다.
인간이 대처할 수 없는 질병이 아프리카 Africa 또는 북극권에서 발병하여 현대인을 괴롭힌다는 줄거리(플롯 plot)가 대부분이다.
특히 북극권에서 과거의 세균이 남아 있는 무덤이 우리를 다시 괴롭힐 가능성은 단순히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도 가능하다.
북극권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가능성이 확인된다.
북극권은 영구동결대로 짧은 여름에 땅의 겉은 녹지만 한 삽만 파도 얼음이 차 있기 때문에 땅을 더 파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무덤도 깊게 파지는 못한다.
나무도 뿌리를 깊숙이 내리지 못하고 옆으로 마치 거미줄처럼 뻗는 상황이다.
땅속은 사시사철 냉동고인 셈이니 사소한 털 한 오라기도 잘 남아 있는 시간상자(타임캡슐)의 역할을 한다.
추코트카 Chukotka(축치 Chukchi)와 같은 러시아 극북 지역에서 무덤 발굴은 그야말로 삽이 필요 없이 솔로만 한다.
무덤을 만들 때에 땅을 깊게 팔 수 없기 때문에 얕게 파고 늑대나 여우 같은 들짐승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돌로 쌓아 올리는 식이다.
어떤 무덤은 돌만 걷어내면 방금 그 자리에 누운 듯한 시신이 옷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누워 있다.
그러니 굳이 땅을 걷을 것 없이 발굴하면 된다.
발굴하다 보면 몇천 년 지난 시신이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전혀 손상이 가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다.
그러니 유물을 조사하기 전까지는 몇천 년 전 것인지 얼마 전 것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을 정도이다.
17세기 이래 러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Europe의 여러 나라는 북극권을 탐험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당시 탐험대는 부실한 배를 타고 북극해를 다니다가 눈이 내리고 바다가 얼면 배를 끌어올리고 월동한 뒤에 다시 봄이 되면 목적지로 전진하는 식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전염병, 결핵, 괴혈병 따위로 많은 선원이 희생당했고, 그들을 곧바로 그 자리에 묻었다.
즉, 지금도 북극해 일대 군데군데에는 당시 사람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문제는 이들의 몸에 지금은 사라져 버린 병균이 있다는 데에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천연두로 사망한 수많은 시신이 북극권에 묻혀 있다.
또한 결핵도 안심할 수 없다.
결핵균 자체가 워낙 빠르게 돌연변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결핵이라고 해도 과거 사람을 괴롭힌 결핵균은 현대의 것과 다를 수 있고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는 저항력이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요즘 같은 정보사회에서 누군가가 그 무덤을 일부러 발굴해서 악용하는 것을 그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변수가 앞에서 말한 기후변화이다.
지구온난화로 급격히 영구동결대가 해체되고 있다.
자칫하면 녹아내린 얼음속에서 무덤이 드러나고 철새나 북극권의 동물이 그 세균을 옮기는 숙주가 될 수 있다.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하지만 최근 급변하는 기후변화에서 어떤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
고고학 자료가 단순하게 과거의 일이 아닐 수 있다.
○DNA로 찾아가는 우리의 조상

인골에 대한 연구는 최근 DNA 기술과 결합되어 아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DNA 정보만 주면 개인의 몇백 년 전 선조를 찾아주는 TV 프로그램도 있을 정도이다.
자신의 조상을 찾는 작업은 고고학이라면 금방 떠올리는 일 중 하나이다.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을 통해서 고대의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조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고고학이 최신 유전학과 만나서 고고유전학적인 연구가 발달하고 있다.
몇천 년, 몇만 년 전 인골의 뼈에서 DNA를 추출하고 현대 우리와의 관계를 찾아내는 방법은 매우 매력적이다.
하루가 멀다 않고 뉴스에 등장하는 네안데르탈인 Neanderthals(Homo neanderthalensis)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예컨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와 결혼을 했다든가 현생인류와 서로 경쟁했고 그 결과 지금도 현대인에게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는 식의 연구가 나오고 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유전학과 함께 고대인의 혈연관계를 추적하는 기술은 계속 정교해지고 있다.
이런 고고유전학의 발달과 함께 우리가 관심을 두는 주제는 바로 한국인의 기원이다.
고고학 발굴 유물로 보면 대체로 한국인의 조상은 북방 유라시아의 많은 친연성親緣性(친척 관계)이 나온다.
하지만 DNA 분석을 하면 매번 다른 결과가 나온다.
얼마 전에 러시아 연해주의 8,000년 전 초기 신석기시대 동굴 무덤 유적인 초르토비 보로타 Chertovy Vorota('악마문惡魔門'이라는 이름으로 더유명하다) 유적에서 40여 년 전에 발굴했던 인골의 유전자를 분석했는데, 베트남 Vietnam 쪽과 유사하다는 연구도 나왔다.
사실 DNA를 통해서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는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DNA 분석 방법은 옛 뼛속에 남아 있는 DNA의 서열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런데 세포핵 속의 DNA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대신에 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속의 DNA(mitochondrial DNA, mtDNA 또는 mDNA)를 분석한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의 유전자만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운 좋게 고대 유전자를 밝혀낸다고 해도, 그것은 모계의 흐름을 밝혀낼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사실 놀라운 연구이다.
하지만 모계만을 밝히는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고대 역사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 이래 한국의 유교의 영향으로 가부장제를 표방했다.
전통적으로 마을은 특정한 성씨가 같이 힘을 합쳐서 농사를 짓는 공동체사회였다.
그런데 세계의 대부분은 철저하게 근친혼을 금한다.
특히나 한국은 최근까지도 동성동본의 결혼을 법적으로 금할 정도로 근친혼을 엄격하게 금했다.
또한 부계사회였기 때문에 결혼할 때에는 여성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서 남편의 공동체로 들어가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두 가지 원칙 아래 필자의 성인 진주 강씨가 집성촌을 이룬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진주 강씨의 딸은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 때문에 진주 강씨의 집성촌에 있는 성인 여성은 모두 진주 강씨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가 원칙대로 유지될 경우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분석하면 진주 강씨의 유전자가 가장 희미한 곳은 역설적으로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우리 문화의 기원과 DNA 분석의 결과는 처음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DNA 분석 결과를 비교해서 현대 한국인과 가장 유사한 사람을 찾는 작업 또한 매번 바뀔 수밖에 없다.
만약 A와 가장 유사한 사람이 B라는 뜻은 현재까지의 시료에서 가장 유사하다는 뜻이지 절대적인 친연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하는 사람이 바뀌면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게대가 고대 유전자는 워낙 시료가 귀하다 보니 매번 새로운 분석이 나올 때마다 결과가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이렇듯 한두 개의 자료만으로 한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고학, 언어, DNA의 연구가 몇십 년 동안 축적되어야 대체적인 흐름을 찾을 수 있다.
하나하나의 연구가 모이고 토론될 때 비로소 한민족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몇만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밝힌다는 게 결코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자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무색하게 수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30여 년 전 필자가 처음 고고학과에 입학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매우 구체적으로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여러 연구와 가설이 나와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쌓일 때에 조금씩 그 진실에 접근할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4. 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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