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3: 국민국가의 건설 4-독일의 통일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3: 국민국가의 건설 4-독일의 통일
새샘 2026. 4. 16. 18:21
| 독일의 통일(1854~1871년) | |
| 크림 전쟁 비스마르크가 수상이 됨 덴마크 전쟁 7주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
1854~1856년 1862년 1864년 1866년 1870~1871년 |
1853년에 혁명가였던 아우구스트 루드비히 폰 로하우 August Ludwig von Rochau(1810~1873)는 ≪독일의 상황에 적용한 현실 정치 원리 Grundsätze der Realpolitik, angewendet auf die staatlichen Zustände Deutschlands(영어 Principles of Realpolitik, applied to the political situation in Germany)≫라는 긴 제목을 단 얇은 책을 서술했다.
로하우는 청년 시절에 이상주의와 혁명적 열기를 멀리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통치를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는·········철학적 사색의 영역에 속한다. 실제 정치는 권력만이 통치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과 관계있다."
로하우의 관점에 따르면 권력은 '정당한' 대의를 지닌 사람들, 즉 헌법과 계몽주의의 권력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은 경제 및 사회 제도의 확대 같은 다양한 형태를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났다.
몇 가지 중대한 방식으로 로하우의 관점은 독일 중간계급의 광범위한 분파들의 변화하는 사고방식을 사로잡았다.
'현실 정치 Realpolitik'는 1850년대와 1860년대의 표어가 되었고, 상당히 보수적이고 실용적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1815~1898)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비스마르크의 노련한 외교 및 권력정치 power politics는 독일 통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독일 국가는 정치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독일 통일은 국민감정의 성장, 중간계급 이해관계의 재검토, 외교, 전쟁, 그리고 정부와 그 반대자들 사이의 투쟁 따위의 산물이었다.
독일 자유주의는1848년에 결정적인 패배를 맞이했지만 상당한 곤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년 이내에 부활했다.
철두철미한 혁명 반대자인 프로이센 Preußen 또는 Preussen(영어 Prussia) 국왕 빌헬름 1세 Wilhelm I(재위 1861~1888)는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로 선출된 하원을 둔 양원제 의회를 수립하는 프로이센 헌법을 재가했다.
하지만 그는 일련의 칙령들을 통해 부와 권력의 계급 제도를 보강하기 위해 선거 제도를 수정했다.
새로운 조항들은 유권자를 그들이 납부하는 세금의 총액에 입각해 세 계급으로 나누었고 이에 따라 유권자의 투표수가 할당되었다(이 새로운 체제는 1789년 프랑스에서 폐지된 신분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는 전통적인 관행을 개선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모두 합쳐 이 나라 세금의 3분의 1을 납부하는 상대적으로 극소수인 부유한 유권자들이 입법자들의 3분의 1을 선출했고, 대지주나 산업가들이 보통 노동자들보다 거의 100배에 달하는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을 뜻했다.
1848년 청년 시절에 혁명가들에 대항해 군대를 이끌었던 빌헬름은 1858년에 프로이센의 섭정 왕자가 되었다.
프로이센은 보수주의 국가로 악명이 높았지만 정치 및 사회적으로 완전한 통일체는 아니었다.
산업 성장이 있었던 10년 동안 중간계급의 규모와 자신감은 확대되었다.
1850년대 말 프로이센은 적극적인 자유주의 지식인, 사려 깊고 활동적인 언론, 정치적·경제적 근대화에 헌신하는 자유주의적 공무원 따위를 보유했다.
이러한 변화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다수를 획득해 국왕에게 자신있게 맞설 수 있는 자유주의 정치 운동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자유주의자들과 국왕 사이에 특별한 분쟁의 씨(비록 유일한 문제는 아니지만)는 군사비 지출이었다.
빌헬름 1세는 상비군을 확대하고 예비군(구성원 중 중간계급이 더 많았다)의 역할을 축소하면서 무엇보다도 군사적 문제는 의회의 통제권에 속하지 않음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
의회 내 국왕 반대자들은 왕이 군대를 사병화하거나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의심했다.
1859년과 1862년 사이에 그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자유주의자의 저항에 대해 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정례적인 예산의 승인을 거부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해 빌헬름 1세는 1862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했다(수상은 의회에 책임을 지지만 비스마르크는 그러지 않았다).
프로이센 국내 정치의 이 결정적 순간은 독일 통일 과업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보수적인 토지 소유 귀족층으로 지배 계급인 융커 Junker 계급으로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1848~1849년의 혁명기 동안 군주정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운동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국가주의자(내셔널리스트 nationalist)는 아니었다.
비스마르크는 무엇보다도 프로이센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특정 집단의 권리를 찬성했기 때문에 국내 개혁을 제도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정책이 프로이센을 통일시키고 강화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시했다.
다른 독일 국가들을 프로이센 지배 아래 두려고 획책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거대한 독일을 설계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통일이 불가피하고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권력에 감복하고 스스로 위대해질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
어느 순간 그는 귀족계급 출신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선택하는 군대에서의 경력을 생각한 적도 있었고, 나중에 자신이 전선이 아니라 책상물림으로 조국을 위해 기여해야만 한다는 것에 후회했다.
그는 지위가 무엇이든지 간에 기회들을 마음대로 활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리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장단을 내게 유리하게 맞추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장단을 맞추고 싶지 않다."
그는 냉소주의, 거만함, 그리고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는 데에서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가 즐겨 인용했던 다음과 같은 라틴어 구절은 정치뿐만 아니라 노련한 개인과 역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한층 더 주의 깊은 평가를 보여준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창조하거나 관리할 수 없고 단지 동일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고 그리로 흘러가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프로이센에서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반대를 무시했다.
다수당을 이루는 자유주의자들이 세금 부과를 거부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국가를 전복시키고자 마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어쨌거나 세금을 거둬들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결정적인 행동은 대외정책에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단 국가주의(내셔널리즘 nationalism)에 반대하면서 노련하게 국내의 자유주의적 반대자들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고 독일의 국가 건설을 프로이센 당국의 업적으로 만들기 위해 민족이라는 카드를 활용했다.
또 다른 '독일' 세력은 독일 연합 내에서 특히 주로 남부의 가톨릭 지역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오스트리아 Austria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이해관계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으며 독일 연합이 그 유용성을 상실했다고 믿고 노련하게 오스트리아의 불리한 경제적 사정과 합스부르크 제국 Habburg Empire의 내부적 소수민족 투쟁을 이용했다.
그는 슐레스비히 Schleswig와 홀스타인 Holstein을 둘러싼 덴마크 Denmark와의 장기간 끓어오르던 논쟁에 불을 붙였다.
두 지방은 독일인과 덴마크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독일 연합과 덴마크 양쪽은 서로 자국 영토라고 주장해왔다.
이 두 지방에 대한 자유주의적 민족감정은 독일 연합에서 격앙되었고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주장하는 독일의 자유주의적 귀족은 소수의 공공연한 영웅이 되었다.
1864년 덴마크 왕은 이 두 지방을 합병함으로써 독일 민족주의자의 강렬한 항의를 촉발시켰다.
비스마르크는 그 갈등을 프로이센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 가담하라고 설득했다.
그 전쟁은 단기전이었고 덴마크의 통치자가 이 두 지방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게 양도하게 만들었다.
비스마르크가 기대했듯이 이 승전국들의 동맹은 즉히 해체되었다.
그는 1866년 프로이센을 좀 더 광범위한 독일 이해관계의 옹호자 역할을 맡게 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7주 전쟁 Seven Week's War이라고 알려진 이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었으며 독일 연합의 해체에 동의했다.
비스마르크는 그 자리에 북독일 연합 North German Confederation을 창건했다.
그것은 마인강 Main River 이북의 모든 독일 국가들의 연합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여론을 눈여겨보는 권력 정치를 했다.'
앞선 두 전쟁은 모두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프로이센의 승리는 국왕과 그의 재산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반대를 약화시켰다.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결과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예산, 군대, 헌법 조항에 대한 투쟁을 포기했다.
비스마르크는 또한 다른 수단들을 동원해 반대자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는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이용한 나폴레옹 3세 Napoléon III(재위 1852~1870)에 감탄했고, 그처럼 대중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는 독일인이 사업가 엘리트층, 자신이 속한 소규모 국가들의 관료제,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따위를 반드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북독일 연합의 헌법은 양원제 입법부, 출판의 자유, 하원에서의 성인 남성 보통선거권 따위를 지닌 한결 더 자유주의적 정체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 헌법의 구조는 프로이센과 보수적 황제에게 그리고 북독일 연합과 곧 제국으로 확장될 프로이센에게 결정적으로 이롭게 작용했다.
독일 통일을 완성하기 위한 최종적 단계는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France와의 대립을 통한 바이에른 Bayern과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 그리고 아직도 연방에 가입하지 않고 프로이센에 대한 역사적 경계심을 풀지 않은 남부 국가들에서 독일 국가주의(내셔널리즘) 정신이 촉발되기를 희망했다.
에스파냐 España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호엔촐레른 가문 House of Hohenzollern(프로이센의 통치 가문)의 권리를 둘러싼 외교적 소동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오해가 생길 기회를 제공했다.
빌헬름 1세 국왕은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엠스 Ems 온천 휴양지에서 프랑스 대사와 만나기로 했다.
빌헬름 1세는 처음에 프랑스의 요구 사항들을 묵묵히 들어주었지만, 프랑스 대사가 에스파냐 왕위 계승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을 '영원히 배제'할 것을 부탁하는 서툰 짓을 하자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했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보낸 전문을 편집해 그 일부를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대사의 부탁을 퇴짜 놓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언론에 유포시켰다.
편집된 보도가 프랑스에서 유포되자 프랑스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로 대응했다.
그것은 프로이센에서도 메아리쳤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라인란트 Rheinland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를 공개했다.
전쟁이 선포되자마자 남부 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 편에 모였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신속하게 끝났다.
유럽의 그 어떤 강대국도 프랑스를 도울 수 없었다.
가장 유력한 협력자였던 오스트리아는 몇해 전인 1866년에 있었던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으로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헝가리인 Hungarians은 강력해진 프로이센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독일의 힘이 커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약화되면 될수록 제국 안에서 권력을 공유하자는 헝가리 민족인 마자르인 Magyars의 요구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프랑스는 전문적으로 훈련되고 뛰어난 장비를 갖춘 프로이센 군대에 대적할 수 없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7월에 시작해 프랑스의 스당 Sedan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9월에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파리의 저항 세력들은 1870~1871년 겨울에 계속 독일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프랑스 제국 정부는 붕괴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 절대주의의 막강했던 과거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 Hall of Mirrors in the Palace of Versailles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아직 프로이센에 흡수되지 않았던 모든 나라가 초대 독일 황제(카이저 Kaiser)가 된 빌헬름 1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넉 달 뒤 프랑크푸르트 Frankfurt에서 체결된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조약에 따라 접경지대인 프랑스 알자스 Alsace 지방은 신생 독일 제국에 양도되었고, 프랑스인 French은 50억 프랑 franc의 배상금을 내야 했다.
프로이센은 신생 국가의 영토와 인구의 60퍼센트를 손에 쥐었다.
프로이센은 카이저, 재상, 군대, 관료제 대부분은 온전히 남았고, 독일 국민국가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이 기대했던 신생 국가는 아니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좀 더 낙관적인 사람들은 독일 제국이 상이한 정치적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고,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통일을 통해 자유를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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