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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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뛰어넘는 발굴의 세계

새샘 2026. 4. 20. 20:56

○화장실, 고고학자의 보물창고

 

(왼)익산 왕궁리의 화장실 유적과 (오른)2,700년 전 이스라엘의 화장실 유적(출처-출처자료1)

 

고고학 뉴스에 황금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2019년 백제의 왕궁터에서 화장실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것이 있었는데, 2021년에 이스라엘 Israel에서도 비슷한 뉴스 news가 나왔다.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2,700년 전의 이 유적이 발견되면서 근대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줄 알았던 화장실의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신문기사는 성서에 등장하는 다윗왕 King David의 궁전과 연결시키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화려한 황금 장식을 한 옷을 입은 왕이 변기에 쪼그려 앉아 있는 상상만 해도 뭔가 재미있다.

하지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살아 있다면 화장실에서는 모두 똑같지 않을까.

인간의 삶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배설을 담당하는 화장실은 고고학자에게도 소중한 자료이다.

 

고고학 발굴을 하다 보면 신기한 점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특히 궁금한 것은 화장실이다.

정작 발굴을 하면 고대 유적에서 화장실의 흔적은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석제 공중화장실이 남아 있는 고대 로마 Ancient Rome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화장실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인간의 배설물이라는 것이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니 고고학자가 화장실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흔히 재래식 화장실이라고 하는 구덩이를 파고 인분人糞(사람의 똥)을 모으는 식의 화장실은 몇천 년이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된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러니 어떤 곳이 음식물을 저장한 곳이고 화장실로 쓰인 곳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른 실마리가 있으니, 바로 기생충의 알이다.

그 알의 껍데기는 썩지 않기 때문에 화장실로 추정되는 부분의 흙을 모아서 분석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재래식 화장실을 찾아낸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이후 고대국가의 수도인 아스카(비조飛鳥)·나라(나량奈良)·헤이안(평안平安)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화장실의 존재를 증명해냈다.

한국에서도 국립광주박물관이 1997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2,000년 전의 회충과 편충 알을 발견해서 화장실의 가능성을 처음 확인했다.

본격적으로 화장실 터가 확인된 것은 2004년 3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리 유적이 최초이다.

여기에서도 길쭉하게 도랑을 파고 그 위에 나무를 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구덩이 안은 흙으로 차 있었고 그 밑의 흙은 유기물질로 검은색이었다.

화장실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직감한 고고학자는 그 토양을 기생충 연구실로 보냈다.

감정 결과 편충·회충·간흡충(간디스토마)와 같은 기생충 알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화장실임이 증명되었다.

백제의 귀족이 사용하던 공동화장실이 발되었던 것이다.

 

 

●배설물 전쟁

 

인간의 배설물은 그 사람이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건강 상태가 어떠한지 파악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냉전 시절 적국의 정상이 해외 순방을 할 때에 특별 보좌관들은 정상이 배설물을 특별히 처리하거나 보관했다.

반대로 상대국은 어떻게든 그 배설물을 얻기 위해서 별 수를 다 썼다.

그렇게 배설물을 얻어내면 적국 정상의 의료 차트 chart를 보듯이 건강 상태를 샅샅이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도 배설물을 통해 고대인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얻을 수 있다.

화장실 자체가 사실 인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인간이 어떻게 배설물을 처리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맥락을 알 수 있고, 또 배설물의 흔적에서 옛 사람의 식생활과 건강 따위를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에 따라 기생하는 기생충이 다르다.

돼지고기, 민물고기, 아니면 인분을 뿌려서 거름을 준 채소를 먹었는지 따위도 알아낼 수 있다.

또한 화장실의 위치, 크기를 통해 옛 사람의 생활 양상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France의 미식가 브리야사바랭 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한다면 당신이 누군지를 알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고고학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배설물을 발굴한다면 인간의 건강은 물로 집 안의 위생도 알 수 있다.

 

 

●화장실을 집 안에 둔 야만인

 

요즘에는 화장실이 집 안, 심지에 두세 개씩 있는 집도 많다.

이와 반대로 전통사회에서 화장실은 집에서 멀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인분이 아무러 귀한 거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집 근처에 두기엔 악취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에 그 화장실을 집 안에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지금의 러시아 Russia 연해주沿海州(프리모리예 Primorye 지방) 산악 지역에서 살던 읍루인挹婁人이라는 2,000년 전 사람들이다.

고대 중국인은 그들이 불결하기 짝이 없어서 화장실을 집 안에 두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읍루인은 겨울에 영하 30~40도로 떨어지는 지역에 살았기에 화장실을 간다고 밖으로 나가면 중요한 부위에 동상을 입었을 것이다.

땅속 깊숙이 움집을 파고 살던 그들은 겨울 내내 대변과 소변을 집 안에 모았다.

그래도 그것을 모았다가 밖으로 버릴 법도 한데, 굳이 집 안에 모아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변은 가죽을 무두질하는데 쓰고 또 살균제로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대변의 처리 방식도 읍루인이 돼지기름을 좋아했다는 기록과 함께 있는 게 주요한 단서가 된다.

아마 제주도의 화장실 겸 돼지우리인 '돗통시'처럼 배설물을 사료로 이용했을 것이다.

읍루인은 또 돼지의 기름을 피부에 발라서 동상을 막았다.

추운 지역에서 돼지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 인간의 배설물이 돼지를 키우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읍루인은 후에 말갈족과 여진족으로 이어졌다.

이후 이들은 오랑캐라는 오명을 딛고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하는 위대한 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들이 결코 미개해서 화장실을 집 안에 둔 것이 아니었다.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낸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화장실이 없는 곳은 없다

 

인간의 배설물이 더럽다는 생각은 지극히 오해이다.

인간은 그 배설물을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긴요하게 사용해왔다.

하지만 인간이 도시를 만들어 살면서 배설물을 멀리하고 무조건 피하려고 했다.

인구밀도가 높지 않은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전면적인 상수도 시설이나 화장실이 굳이 필요 없었다.

배설물은 아주 요긴한 인간의 필수품으로 자체적으로 처리하여 재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가 생기면선 상황은 바뀌었다.

한때 파리 Paris의 베르사유궁전 Palace of Versailles에도 화장실이 없다는 식의 뜬 소문(루머 rumor: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배설에 신분고하를 따질 것이 있겠는가.

궁전에 화장실은 많았고, 왕과 귀족은 호화로운 이동식 화장실도 썼다.

문제는 도시의 대다수를 점거하는 평민이었다.

배설물 처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평민은 도시 곳곳에 배설물을 버렸고, 도시는 빠르게 오염되었다.

도시의 발달과 화장실의 등장은 어쩌면 오래된 인간의 지혜와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모여 살면서 그들이 처리할 수 있는 배설물의 양을 넘어섰고, 배설물더미는 미생물과 세균의 온상이 되면서 천대받는 존재가 되었다.

 

얼마 전 청계천을 다시 복원하면서 그 주변 지역을 발굴했고, 청계천에서 출토된 배설물 정보를 토대로 조선시대 한양 사람의 생활을 복원했다.

한양 도성의 사람들은 대부분 회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한양의 인분은 전문업자가 수거해서 거름으로 팔았고, 그 거름으로 채소를 길러서 다시 한양 사람에게 공급했다.

그 과정에서 기생충 감염은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배설물에 의지해서 생활하면서도 도시라는 밀집된 환경 때문에 배설물을 천하고 더러운 것의 상징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사피엔스의 발달에서 배설물은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배설물의 증거는 고고학자의 꿈이다.

고고학자에게 화장실은 과거의 사람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또 조사하고 싶어 하는 유적이다.

 

 

○바닷속에 잠긴 유물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발굴이 있었던 신안 앞바다(사진 속 인물은 김도현 당시 해군 소위(출처-출처자료1)

 

흔히 발굴이라고 하면 땅을 파는 것을 생각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발굴은 땅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고고학은 인간이 살았던 모든 시간과 공간을 포괄하기 때문에 인간의 발자취가 남은 모든 곳이 고고학의 대상이 된다.

땅속 다음으로 조사가 많은 곳은 물속일 것이다.

2022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이제까지 고작 29건의 수중문화재가 발굴·조사되었다.

육상문화재가 한 해에 1,800건이 넘게 조사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수중 발굴인 신안 해저선의 전시 모습(목포해양전시관)(출처-출처자료1

 

한국의 수중문화재 발굴은 1976년에 신안 앞바다에서 우연히 어부의 그물에 도자기가 걸리면서 시작되었다.

수중고고학도 유물이 있는 위치를 기록하고 물에서 끌어올려 발굴한다는 점에서 기본 원칙은 육상고고학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냥 땅에 묻히는 것과 달리 물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처음 발견될 때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즉 그냥 배가 침몰할 경우 흔적도 없이 물살에 떠밀려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대신에 펄 속에 깊숙이 박히듯이 난파될 경우에만 남아 있다.

한국에서도 주로 서해안에서 난파선이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발굴 과정도 사뭇 다르다.

잠수를 기반으로 조사해야 하기 때문에 물속에서 조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번에 30분 이내로 극히 제한적이며 각종 조사 도구도 수업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태풍이나 파도와 같은 바다 날씨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에 조사는 더더욱 쉽지 않다.

또한 발굴 이후의 과정도 육상 유물과 비교할 수 없다.

몇백 년 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목재를 보존 처리하는 데에는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이렇듯 난파선으로 대표되는 수중문화재의 조사에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은 육상과 비교되지 않으니, 이는 강대국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수중문화재의 발굴로 꼽히는 것은 1956~1962년까지 발굴된 스웨덴 Sweden의 바사 Vasa 호 조사이다.

바사호는 1628년에 화려한 진수식과 함께 바다로 나간 지 30여 분 만에 침몰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이 배를 건조한 것은 '북방의 사자'라 불리던 구스타프 2세 Gustav II 왕으로 스웨덴이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징성을 생각해서 스웨덴 정부는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서 배를 발굴하고 박물관을 건설했다.

지금도 바사호는 대표적인 스웨덴의 관광 상품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수중고고학 강국으로는 중국을 들 수 있다.

중국은 2007년에 광둥성(광동성广东省/廣東省) 앞에서 발견된 12세기의 배인 남해 1호를 육상으로 끌어올리는 거대한 과제(프로젝트 project)에 착수했다.

1987년에 처음 발견되었지만 수중에 있었던지라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했고, 이후 경제발전을 이뤄낸 중국은 아예 배를 육상으로 끌어올려서 발굴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가로 64미터, 세로 40미터, 높이 23미터의 컨테이너 container로 펄에 묻혀 있는 채로 배를 육상으로 끌어올려서 전시도 하면서 발굴 작업을 했다.

2007년 기준으로 중국 돈 3억 위안(당시 약 500억 원)이 소요되는 대사업이었다.

 

 

○천공天空의 고고학

 

드론 조사를 통한 유적 탐사(고선지가 전투를 벌였던 탈라스 평원)(출처-출처자료1)

 

2021년에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OTT 서비스, over-the-top media service)를 통해 공개된 SF 영화 <승리호>는 우주 공간에서 다양한 인간의 우주 활동으로 남겨진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람들의 모험을 다룬 것이다.

영화 주인공들이 우주 공간을 헤쳐 가며 다양한 우주선의 잔해들을 찾는 모습은 마치 우주여행이 일반화된 직후의 미래 고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우주, 하늘과 같은 우리 머리 위의 공간 즉 천공天空도 고고학의 범위가 된다.

아직 본격적인 시도는 없지만 달 표면에 아폴로 계획(The Apollo Program)으로 탐사를 한 흔적이나 아직 대기권을 돌고 있는 유리 가가린 Yuri Gagarin과 스푸트니크 Sputnik 인공위성의 추진체나 연료통의 파편도 수거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고고학적 주제가 될 것이다.

 

우주고고학이 다소 먼 얘기라면 항공고고학 aeroarchaeology은 무려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항공고고학은 비행기가 전쟁무기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제1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공중에서 폭격이나 정찰을 하던 조종사가 석양이나 동이 트는 시점에 벌판에서 고대 건축물의 흔적을 발견하면서부터이다.

이 흔적을 적이 숨겨놓은 참호인 줄 알고 나중에 탐색해보니 아무것도 없었고, 한참 뒤에 고대 유적이라고 밝혀졌다.

이러한 유적 발견 원리는 간단하다.

곡물을 심어놓은 벌판 밑에 돌로 만든 구조물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곡물의 성장이 원활하지 못하여 짧아지고, 그것이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도랑이나 해자를 파놓은 경우 수분과 유기물이 풍부해서 곡물이 더욱 길게 자란다.

외계인이 남긴 음모론의 주제가 되기도 했던 남미의 나스카 지상화 Lines and Geoglyphs of Nasca and Palpa를 비롯한 수많은 거대 지상화도 바로 항공고고학의 발달로 확인된 것이다.

 

 

○이름 없는 영웅을 찾아서

 

고고학의 또 다른 로망은 칭기즈칸(성길사한成吉思汗) Genghis Khan ,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ros III) 같은 역사 속 영웅을 찾는 것이다.

그중에는 진시황秦始皇의 병마용兵馬俑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킬 목적으로 만든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같이 드물게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영웅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을 찾아주는 고고학이 있다.

 바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군인의 유해를 찾아주는 유해발굴단이다.
유해발굴단은 고고학인 듯하지만 그들이 발굴하는 것은 유물이 아닌 우리나라의 영웅이다.

 

유해발굴단은 고고학 기술이 전쟁과 이상적으로 조합한 경우로서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유해를 발굴한다.

물론 유해 발굴을 고고학적 발굴로 보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

자국을 위해서 희생한 군인의 유해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무덤에서 얻는 인골과 같은 맥락에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하여 유물과 달리 국군의 유해는 박물관이 아니라 예를 갖추어서 무덤에 매장한다.

하지만 유해발굴단이 사용하는 모든 기법은 고고학의 것을 거의 다 전용한다.

 

유해 발굴은 우리나라를 지킨 사람을 구체적으로 한 명씩 찾는, 사람 찾기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니 실제 고고학과 그 목적에서 조금 차이가 있지만 유해를 찾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다.

무덤의 도굴을 엄금했던 조선시대에도 가끔 자기 조상의 묘를 찾기 위해 발굴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란으로 몇 년씩 고향을 비우고 폐허가 된 뒤에 돌아와 다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니 나라에서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쟁에서 희생당한 우리 영령을 찾는 것도 사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재미있는 점은 고고학의 시작도 이러한 움직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국 고고학은 조상의 무덤을 찾기 위해서 발달한 학문이기도 하다.

 

유해 필굴은 단순한 조상 찾기를 넘어선 국가 차원의 사업이다.

유해 발굴은 비록 발굴이 아니지만 그 발굴 기술과 DNA와 같은 모든 고고학적 분석 기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목적지 주변의 정황(컨텍스트 context: 사정과 상황)에 대한 세심한 주의도 필요하다.

물론 차이는 있다.

발굴과 달리 그 지역 주민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

동네 어르신에게서 산의 어느 지점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지, 그리고 남겨진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따위에 대해 청취해야 한다.

때로 소년 시절에 시신의 매장에 동원된 분이라도 있다면 일은 정말 쉬워진다.

 

한편 군인의 유해는 다른 어떠한 발굴 조사보다도 정치적인 행위와 연결되기도 한다.

외규장각의궤와 같이 문화재가 국가 사이의 외교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극히 일부이다.

하지만 군인의 유해는 언제라도 강력한 국가 사이의 연결고리가 된다.

나라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 적군의 유해는 '화해의 아이콘 Icon of reconciliation'으로 큰 역할을 한다.

특히 미국이 군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본국으로 송환하는 데에 적극적이며, 이를 정치적인 회담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2018년에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하고 화해 분위기를 조성할 때에 북한은 상징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군의 유해를 반환했고, 이에 미국은 공항까지 트럼프 Donald John Trump 대통령이 나가는 최고급의 예우로서 그에 화답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에는 북한이나 중공군의 처리에 대해서 정해진 지침(매뉴얼 manual)이 없다.

비록 전쟁을 했다고 해도 적국의 희생자마저 무관심하게 방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조약을 체결해서라도 유해에 대한 규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사회 각 분야에서 DMZ에 대한 공동조사, 철도 건설과 같은 다양한 계획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DMZ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얼마나 많은 유해가 묻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DMZ에 대한 전면적인 유해 발굴 조사가 필요할 것이고, 고고학자의 기술과 노력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예가 될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사라진 시간과 만나는 법(김영사, 202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4.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