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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5: 동방의 문제: 국제 관계와 오스만 제국의 쇠퇴1-크림 전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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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21장 국가란 무엇인가? 영토, 국가, 그리고 시민(1848~1871) 5: 동방의 문제: 국제 관계와 오스만 제국의 쇠퇴1-크림 전쟁

새샘 2026. 5. 11. 22:34

 

크림 전쟁(출처-출처자료1)

 

19세기 동안 국가적 정체성과 국제 권력의 문제는 영토를 둘러싼 경쟁과 뒤엉켜 있었다.

전쟁과 외교는 유럽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지속 가능한 세력 균형을 모색하면서 국경선을 획정하고 또다시 획정하게 만들었다.

신흥 강대국의 등장, 주로 독일 제국의 등장은 유럽 대륙의 질서에 도전으로 여겨졌으며 더 오래된 정부들의 쇠약해지는 권세는 또 다른 도전을 가져왔다.

1853~1856년 동안 계속된 크림전쟁 Crimean War은 그런 심각한 붕괴에 대처하기 위한 특히 섬뜩한 시도였다.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이 남동 유럽에서 자국의 속주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자 오스만 제국의 약화로 누가 혜택을 볼 것인가라는 '동방의 문제 Eastern Question'는 유럽을 전쟁에 휘말리게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영토 획득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략적 이해관계, 동맹, 세력 균형이었다.

크림 전쟁은 독일 Germany과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통일 이전에 일어났지만, 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을 향해) 유럽을 이끌었던 강대국 Great Power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크림 전쟁(1853~1856년)

 

크림 전쟁의 근본 원인은 동방의 문제와 오스만 제국의 쇠퇴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초래한 위기에는 종교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면 프랑스 France와 러시아 Russia는 무슬림 Muslim 국가인 오스만 제국 안에 있는 종교적 소수자와 예루살렘 Jerusalem 성지의 보호를 주장했던 것이다.

1853년 (로마 가톨릭교 Roman Catholic Church를 대신한) 프랑스 France, (동방 정교회 Eastern Orthodox Church를 대표하는) 러시아 Russia, 그리고 튀르키예 Türkiye 사이의 3자간 다툼은 러시아에게 튀르키예의 술탄 Sultan(이슬람교국의 군주)과의 대결을 모색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는 튀르키예가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른 강대국들이 튀르키예의 나약함에 편승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국이 영국 UK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그릇되게) 믿고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영토인 몰다비아 Moldavia와 왈라키아 Wallachia를 침공했다(이 영토들은 도나우 강 Danube River과 흑해 Black Sea가 만나는 지점의 북쪽과 서쪽에 있었다).

이 전쟁은 11월에 시노프 Sinope 전투에서 함대를 잃은 튀르키예에게 재앙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팽창이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와 지중해 Mediterranean Sea 동부에서(프랑스), 그리고 인도 India로 가는 통로에서(영국) 자국의 이해관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영국과 프랑스에게 경계심을 안겨주었다.

그러한 팽창을 견제하기로 결정한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1854년 3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9월 러시아의 크림 반도 Crimea 또는 Crimean Peninsula에 상륙해서 세바스토폴 Sevastopol에 있는 러시아의 해군 기지로 진격해 이를 포위했다.

1855년에는 작지만 야심찬 이탈리아의 피아몬테-사르데냐 Piemonte-Sardegna가 프랑스, 영국, 오스만 제국의 편에 가담했고, 이들 모두는 러시아에 대항해 싸웠다.

이 크림 전쟁은 1815년 이래 유럽이 전면전에 가장 가까이 도달했던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으나, 전쟁의 양상은 파괴적이었다.

크림 반도의 상황은 비참했고 영국과 프랑스 쪽에게 재앙을 초래한 잘못된 보급 및 위생 상태 관리는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게 만들었다.

최소한 전투에서만큼이나 많은 병사가 발진티푸스 typhus와 콜레라 cholera로 사망했다.

영국 기병대가 러시아 포병의 집중 공격으로 도륙당한 영국의 '경기병 여단 Light Bridgade의 공격' 같은 악명 높은 어리석은 전략을 특징으로 했던 전투의 결과는 비참했다.

몇만 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러시아군 진영에 대항해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각각의 전투는 종종 육박전으로 끝났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잘 훈련된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크림 반도 주변에 대한 이들 국가의 제해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근 1년 가까이 포위 상태에 있던 세바스토풀은 1855년 9월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모질고 불만스러운 이 크림 전쟁은 1856년의 조약으로 끝났다.

 

프랑스와 사르데냐 병사들의 용맹함은 그들 국가에서 긍정적인 국민감정을 북돋웠다.

하지만 서툴게 전쟁을 운영한 영국과 러시아에서는 격렬한 비판의 물결이 일었다.

국제관계가 관련된 한에서 평화 협정은 러시아에게 타격이었고,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방은 루마니아 Romania로 통일되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

러시아의 지원 요청을 오스트리아 Austria가 거부한 것은 오스트리아에게 이전의 막강한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크림 전쟁은 앞서 보았듯이 1860년대에 독일의 비스마르크 Bismarck에게 이점을 제공해 주면서 프랑스를 곤경에 빠뜨렸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상당히 약화시켰다.

 

크림 전쟁은 다른 방면에서도 중요했다.

크림 전쟁은 40년 전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과 정신 상태로 치러졌지만 현대식 전쟁의 방향을 가늠케 하주는 기술 혁신을 가져왔다.

이 전쟁에서는 최초로 철도와 전신이 전술적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총신 내부에 강선이 새겨진 머스킷 라이플 musket rifle, 기뢰, 참호전 따위가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크림 전쟁을 현대적 의미의 전쟁 특파원과 사진기자들이 처음으로 취재함으로써 당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공개적인 전쟁으로 만들었다.

전쟁터에서의 보도는 객관적이고 진지한 세부 사실을 담고 전신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실시간으로 in real-time' 전파되었다.

예를 들면 (런던 London) ≪타임즈 Times≫의 기자 윌리엄 하워드 러셀 William Howard Russell(1820~1907)은 영국 병사들이 겪는 비참한 상황을 보도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게 만들었다.

군대에 대한 열악한 간호와 보급은 대중적 언론에서 국가적인 추문이 되었다.

이러한 보도들은 결국 군사 정책과 군수 체계에서 극적인 변화를 자극했고, 의사들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같은 간호사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영국 정부와 상업 출판사들은 모두 전쟁의 과정을 기록하고 아마도 군대가 보급이 충분치 못하고 영양부족 상태라는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사진작가들을 파견했다.

이들 전쟁 사진작가들 중 가장 탁월하고 가장 많은 사진을 찍었던 로저 펜턴 Roger Fenton은 군대 생활의 소름끼치는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이 새로운 매체를 채택했다.

기술적 한계와 정치적 고려가 전쟁터의 한층 더 끔찍한 주검을 촬영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펜턴의 사진들은 대중의 전쟁 개념에 새로운 수준의 사실주의와 직접성을 도입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5. 1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