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2장 제국주의와 식민주의(1870~1914) 4: 남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2장 제국주의와 식민주의(1870~1914) 4: 남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새샘 2026. 6. 9. 14:24인도印度 India는 대영제국大英帝國 British Empire의 중심이자 영국 UK 국왕의 보석이었다.
또한 인도는 신제국주의新帝國主義 New Imperialism 또는 Neoimperialism 시대(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팽창을 벌였던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 훨씬 이전에 확보된 18세기 제국 건설의 유산으로, 인도 정복의 대부분은 1750년대에 시작되었고 혁명의 시대에 가속되었다.
인도 정복은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에서의 '상실'을 벌충해주었다.
미국 독립 전쟁의 요크타운 Yorktown에서 패배한 영국의 찰스 콘월리스(1738~1805) Charles Cornwallis 장군은 인도에서 눈부신 경력을 쌓았다.
19세기 중엽 인도는 남아프리카 South Africa에서 남아시아 South Asia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에 이르는 영국이 새로이 확장한 전 지구적 세력의 초점이 되었다.
이 지역을 지키는 일에는 전술 및 통치 형태의 변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있는 영국 영토는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East India Company의 관할 아래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유럽인 Europeans과 (한층 더 거대한) 인도인 Indians(Indian people) 사단들로 구성된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인도 농민에게서 토지에 대한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보유했다.
19세기 초까지 이 회사는 인디고 indigo(검푸른 물감), 섬유, 소금, 광물, 그리고 가장 돈이 되는 아편을 포함한 모든 상품의 무역에 대한 합법적인 독점권을 갖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도 무역 독점을 허용했었다.
하지만 북아메리카와 달리 인도는 결코 영국인 British people이 정착한 나라가 되지 않았다.
1830년대 1억 5천만 명의 인도 인구 가운데 유럽인은 4만 5천 명밖에 되지 않는 한줌의 소수자였다.
동인도회사의 통치는 억압적이었고 군대가 이를 강행했다.
군인이 세금을 징수했고 공무원은 군복을 입었다.
영국군은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농민의 황소와 수레를 징발했다.
그렇지만 동인도회사는 회사의 규칙을 획일적으로 강행할 수는 없었다.
이 회사는 일부 지역을 직접 통치했고, 다른 지역은 지방 지도자들과의 제휴를 통해 통치했으며, 또 다른 지역은 상품과 돈을 통제함으로써 지배했다.
인도에서의 간접 통치란 다른 제국들에서처럼 원주민 협조자들을 찾아내고 그들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뜻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예전 정부들에서 행정가들을 배출했던 집단을 발굴했다.
예컨대 영국인은 특히 북인도 North India의 라지푸트족 Rajput(인도 카스트 Caste 제도에서 두 번째 지위인 왕족과 무사 계급)과 부미하르 Bhumihar(인도의 상류층 공동체)를 효율적인 군인이나 캘커타 같은 대도시의 상인으로 생각했다.
영국은 다른 나라들에 대항해 영국과의 동맹에 동의하는 이들 집단이나 나라에 경제적 특권, 국가 관직, 또는 군대의 지위 따위를 제공했다.
영국의 정책은 양극단—한 집단은 인도의 '서구화'를 바랐고, 또 다른 집단은 지방 문화에 따르는 것이 더 안전하고 한층 더 실제적이라고 믿었다— 사이를 오갔다.
점령지가 확대되면서 그 수가 늘어났던 개신교(그리스도교 Christianity)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의 광명과 진리의 친절한 영향력'으로 '맹목적 미신'을 대체하기로 결심했다.
아동 결혼과 사티 sati(죽은 남편을 화장할 때 부인을 산 채로 희생으로 바치는 순장 의식) 같은 관행에 분개한 선교사들은 힌두 문화 Hindu culture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 영국에서 지지를 구했다.
상당수가 자유주의자들이었던 세속적 개혁가들은 '힌두교도 Hindus'와 '마호메트교인 Muhammads'을 가정이나 국가에서 전제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의 개혁 열정을 법적·정치적 변화로 전환했다.
그러나 또 다른 집단과 영국의 행정가들은 자국민에게 인도의 제도와 관습에 간섭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한 영국인 행정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인은 종교에서의 마호메트교인들만큼이나 정치에서 대단한 광신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나라도 영국의 제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간접 통치가 지방 권력관의 협조 속에서만 작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갈등은 영국이 어떠한 단일한 문화정책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폭동에서 반란으로

동인도회사의 통치는 종종 저항과 항의에 부닥쳤다.
동인도회사는 1857~1858년에 일어난 '세포이 (군인들의) 반란 Sepoy Rebellion'—오늘날 인도에서는 1857년의 대폭동大暴動 Great Mutiny이라고 부른다—으로 인해 심하게 흔들렸다.
이 봉기는 소총 탄약통을 기름칠하는데 돼지비계를 사용하라는 것—힌두교도 Hindus나 이슬람교도 Muslims 중 어느 한쪽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을 거부한데 대해 군대가 세포이 sepoy(영국에 고용된 인도 군인을 칭하는 전통적 용어)의 연대를 징벌했을 때 델리 Delhi 인근에서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 Benjamin Disraeli(재임 1868, 1874~1880)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국의 쇠망은 기름칠한 탄약통의 문제가 아니다."
이 폭동의 원인은 훨씬 더 심오한 것으로 사회적·경제적 불만이 포함된 것이었다.
인도 농민은 부채와 부패에 항의하면서 법원을 공격해 세금 명부를 불태웠다.
최근에 합병된 아우드 Oudh 같은 지역에서 반란자들은 영국이 즉결 추방한 적이 있는 전통적인 지도자들을 옹호했다.
특권 계급 출신의 군 장교들은 영국에게 전횡적인 대우를 받는 것에 분개했다.
그들은 처음에 충성스런 동맹자로서 진급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이 생각했던 직함이나 명예를 얻지 못하고 복무할 것을 강요당했다.
폭동은 북서 인도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확산되었다.
무장한 반란자들에 비해 수적으로 5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던 유럽 군대는 통제력을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영국이 파견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과 지방 전통 및 관행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비난할 기회를 포착했다.
처음에 영국인들은 자국의 통제 아래에 있는 지역들이 서로 고립되고 친영국 편 도시들이 포위되면서 절망적 상황에 직면했다.
영국에 충성하는 인도 군대가 국경 지방에서 남부로 이동했고, 크림전쟁 Crimean War(1853~1856)에서 막 귀국한 영국군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다.
전투는 일 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고 영국인은 체계적인 진압 전투로 반란자들이 보였던 초기의 학살과 만행에 필적하는 행위를 했다.
모든 반란군 부대는 항복이 허용되지 않고 죽임을 당하거나 즉결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반란자들은 도운 소읍과 마을은 반란자들이 유럽인의 집과 전진기지를 불태웠던 것과 똑같이 불살라졌다.
하지만 반란의 참패는 영국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크림전쟁의 피비린내 나면서도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은 혼란 이후에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영국령 인도에 대한 간담이 서늘한 위협, 영국군에 의한 유럽인 인질과 영국 영토의 영웅적 구출 따위—였다.
포위된 백인 여성과 어린이를 해방시키는 스크틀랜드 Scotland 고원 연대의 그림(인도의 찌는 듯이 더운 열기 속에서 모직 킬트를 입고 있는)은 영국 전역의 각 가정에 전파되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영국 지도자들은 이 반란이 자신들을 재앙에 가까운 상황까지 몰고 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똑같은 실수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세포이 폭동 이후에 영국은 새로운 통치 전략으로 인도 제국을 재조직해야만 했다.
동인도회사에 부여된 특허장은 폐기되었고 인도는 영국 국왕이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영국의 라지 raj(통치)는 비록 영국인이 협력자들과 협력적인 이익집단을 모색하긴 했어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도의 기존 공국에 해당하는 지역은 영국인 고문관에 복종하는 원주민 군주들이 통치하게 되었다.
영국은 또한 군대를 재조직하고 군인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애썼다.
원주민 군대는 파괴적인 것으로 판명된 전우애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서로 분리되었다.
이에 대한 한 영국인 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한 연대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나는 그 다음 연대를 서로 이간시켜 반란을 일으킨 연대를 향해 발포하게 만들고 싶다."
영국은 이전보다 훨씬 더 인도인 상류계급에 반대하기보다 그들을 통해 통치하고자 했다.
인도의 왕인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인도 여왕 재위 1876~1901)은 다음과 같이 간접 통치의 원리를 확립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큼이나 토착 군주들의 권리·위엄·명예를 존중할 것이고, 그들이 우리 자신의 신민과 마찬가지로 번영과 내부적 평화와 훌륭한 정부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사회적 진보를 향유하기를 바란다."
공무원 개혁은 인도인 상류계급의 구성원에게 새로운 지위를 열어주었다.
영국은 인도 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재고해야만 했다.
선교 활동은 억제되었고 개혁 추진의 방향을 경제 발전, 철도, 도로, 관개 따위의 좀 더 세속적 사업들로 돌렸다.
하지만 효과적인 식민지 전략들에 대한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일부 행정가들은 더 많은 개혁과 변화를 권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토착 군주들을 더 많이 지원하고자 했다.
영국은 1947년 식민지 통치가 종식될 때까지 이따금 생각난 듯이 이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하고자 했다.
인도에서 신제국주의의 가장 걸출한 대표는 두드러진 보수주의자이자 1898년에서 1905년까지 인도 총독을 역임한 조지 커즌 경 Lord Geroge Curzon이었다.
커즌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참여를 심화시켰다.
영국의 세계적 지위에 관심을 가진 그는 러시아 Russia에 대항해 인도 국경을 요새화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고 계속적인 경제적 투자를 촉구했다.
커즌은 영국이 자국의 통치에 대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파괴되고 인도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에서 눈에 띄게 무능력에 직면하게 된다면, 영국인은 냉소적이 되고 "혼수상태에 빠져 국내 문제만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크게 염려했다.
동화 <정글 북>을 지은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인도에서 태어난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1865~1936)이 영국인과 미국인에게 "백인의 짐을 질 것"을 촉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커즌은 자국민에게 인도가 영국의 위대함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라고 간청했다.
인도는 대영제국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인도는 영국 최대의 수출시장이었다.
대영제국 전체 무역의 10분의 1이 인도의 항구 도시인 마드라스 Madras, 봄베이 Bombay, 켈커타 Calcutta를 통해 지나갔다.
인도는 영국의 국제수지에 엄청나게 중요했다.
인도에서 벌어들인 잉여금은 유럽 Europe과 미국 USA과의 교역으로 인한 적자를 상쇄했다.
또한 영국에게 인도의 인적 자원은 매우 중요했다.
인도의 노동자들은 미얀마 Myanmar 인근의 아삼 Assam 지방에 있는 차 대농장에서 일했고, 남부 아프리카 Southern Africa와 이집트 Egypt에서 철도와 댐을 건설했다.
영국의 통치는 제국 전역에 걸쳐 인도 노동자들의 엄청난 이산離散(헤어져 흩어짐)을 가져왔다.
100만 명 이상의 인도 계약 노동자들이 19세기 후반에 조국을 떠났다.
인도는 또한 대영제국에게 고도로 훈련된 기술자(엔지니어 engineer), 토지 측량사, 점원, 관료, 교사, 상인 따위를 제공했다.
예를 들면 민족주의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1869~1948)는 인도인 변호사 회사가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Republic of South Africa의 프리토리아 Pretoria에서 젊은 변호사로서 처음 대중의 눈에 띄었다.
영국은 제국 전역에 걸쳐 인도인 군대를 배치했다(나중에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약 120만 명의 인도인을 소집한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커즌과 같은 사람들은 인도 없는 대영제국 또는 심지어 영국 자체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의 통치는 인도 사회를 어떻게 형성했는가?
영국의 간접통치 관행은 영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인도인 정예층(엘리트 elite)을 창조해냈다.
그들은 한 영국 작가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은 집단이었다.
그 집단은 "우리와 우리가 지배하는 몇백만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통역을 할 수 있는 집단, 즉 피부색과 피는 인도인이지만 취향, 주장, 도덕, 지성 면에서 영국인인 사람들이다."
결국 그러한 관행은 영국식으로 교육된 인도인 공무원과 사업가의 대규모 사회집단—정부를 위해 잘 훈련되었지만 그들이 인도에 진보를 가져왔다는 영국의 주장에는 회의적인 집단—을 만들어냈다.
이 집단은 인도에서의 영국 통치에 도전한 민족주의 운동에 지도부를 제공했다.
그와 동시에 이 집단은 점차 인도의 나머지 집단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인도의 압도적인 다수는 사라져가는 한 줌의 토지와 많은 경우에 영국인 지주에게 빚을 진 채로 살아가려고 투쟁하는 절망적으로 가난한 농민과 값싼 영국제 상품의 수입으로 붕괴된 직물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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