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2장 제국주의와 식민주의(1870~1914) 10: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제국의 위기, 22장 결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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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2장 제국주의와 식민주의(1870~1914) 10: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제국의 위기, 22장 결론

새샘 2026. 7. 2. 10:39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나타난 제국의 위기

 

20세기로의 전환은 서양 제국들에게 일련의 위기를 가져왔다.

이런 위기들은 유럽의 통치를 끝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위기들은 서양 국가들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을 조성했다.

이 위기들은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해외 영토에서 자국의 경제적·군사적 참여를 확대하도록 만들었다.
그 위기들은 서양의 자신감을 흔들어 놓았다.

온갖 방식으로 이 위기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년 동안 서양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파쇼다

아프리카 분할과 파쇼다 사건(출처-나무위키 https://namu.wiki/w/%ED%8C%8C%EC%87%BC%EB%8B%A4%20%EC%82%AC%EA%B1%B4)

 
1898년 가을에 일어난 첫 번째 위기는 이집트령 수단 Egyptian Sudan에 있는 파쇼다 Fashoda(오늘날의 남수단 코도크 Kodok, South Sudan)에서 영국 UK과 프랑스 France가 서로 맞붙은 것이었다.
수에즈 운하 Suez Canal에서의 대치는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남겼다.
그것은 영국의 세실 로즈 Cecil John Rhodes(1853~1902)가 말한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 철도 Cape to Cairo Railway'라는 생각에 고양되면서 동아프리카에서 east Africa에서 영국의 전략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또한 영국의 모험가와 학자들, 명민한 역사학도들과 자기 과시적 편집자들에게 이집트 Egypt의 과거가 남긴 고고학적·문화적 보물들에 대한 접근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 가장 오래된 문명은 이제 가장 성공적인 근대 국가와 연결되는 것처럼 보였고, 영국의 탐험가들은 영국의 깃발 아래에서 통치되는 수로를 거슬러 여행하면서 나일강 Nile River의 발원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나일강 상류로 더 멀리 모험을 떠난 탐험가들은 영국인뿐만이 아니었다.
친영국적 신임 통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영국은 수단에서 이슬람교도의 봉기에 개입했다.
영국-이집트 군대가 수단의 수도 하르툼 Khartoum에 파견되었다.
이 군대는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로 잘 알려진 가장 현란하고 아마도 양식이란 거의 없는 영국의 식민지 장군 찰스 '중국인' 고든 Charles 'Chinese' Gordon(1833~1885)이 이끌었다.
마흐디 Mahdi(예언자 무함마드 Muhammad Ahmad bin Abd Allah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가 이끈 수단 반란군은 고든을 포위 공격했다.
영국군은 나일강 남쪽으로 이동하기에는 병력면에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고든은 반란군들이 하르툼으로 쇄도하자 '영웅적 죽음'을 택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고든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이집트에 있는 관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에 대한 영국 대중의 상상력도 10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1898년 두 번째 대규모 반란이 복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조직적이고 야심찬 기술자(엔지니어 engineer)인 호레이쇼 키치너 Horatio Herbert Kitchener(1850~1916) 장군이 지휘한 영국-이집트 군대는 나일강 남쪽으로 항해해 하르툼을 공격했다.
최신식 소총, 야포, 기관총을 사용하면서 그들은 옴두르만 Omdurman 마을에서 마흐디의 군대를 학살하고 하르툼을 탈환했다.
고든이 시신은 발굴되어 영국 대중이 유명하고 손쉬운 승리를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다시 매장되었다.
 
하지만 이 영국의 승리는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수단에 바로 이웃한 중앙아프리카 central Africa에 영토를 보유한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쪽 측면을 따라 영국이 주둔하는 것을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대한 영국 지배의 서막이라고 보았다.
프랑스 원정군이 수단 영토의 최남단에 대한 영국의 권리에 도전하기 위해 수단의 파쇼다에 파견었다.
프랑스 원정군은 키치너 군대가 파견한 부대와 대결했다.
1898년 9월 몇 주 동안 상황은 전쟁 직전의 상태를 오갔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영국이 프랑스의 허세를 비난하면서 새로운 영국-이집트령 수단의 국경—수에즈 운하와 더불어 시작된 정치적 통제력이 더 크게 확장된 것이었다—을 굳건히 함으로써 더 이상 팽창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자 해결되었다.
 
 

○에티오피아

 
전통적인 제국주의적 통치 방법과 유럽이 군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관념은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중국의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Boxer Rebellion은 서양의 제국주의적 방법과 그 결과에 대항한 수많은 원주민 반란 중 하나였다.
러일(로일露日) 전쟁 Russo-Japanese War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유럽이 우월하다는 타고난 관념에 도전한 제국주의 두 열강 사이의 위험천만한 대규모 충돌이었다.
 
유럽 열강에게 다른 말썽거리들도 발생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동안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는 홍해 Red Sea 연안을 따라 자국만의 소규모 제국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 State of Eritrea와 소말리아 Somalia의 일부를 병합했고, 하르툼에서 고든이 사망한 직후 마흐디 군대가 자국의 새로운 식민지들에 대해 침략을 감행하자 이를 무찔렀다.
이들 식민지에서 거둔 최초의 성공들은 여전히 근대적 산업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이탈리아 정치가들에게 한층 더 야심찬 제국주의 과제를 시작하도록 고무시켰다.
1896년 에티오피아 Ethiopia를 정복하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군이 파견되었다.
에티오피아는 산이 많은 내륙 제국이자 아프리카 최후의 주요 독립 왕국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Menelik II(재위 1889~1913)는 경험 있고 박식한 정치가이자 빈틈없는 군사령관이었다.
그의 백성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인 Christians이었고 이 제국의 무역은 메넬리크 2세에게 방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유럽의 최신형 야포 구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천여 명에 불과한 이탈리아의 직업 군인들과 훨씬 더 많은 소말리아 징집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은 에티오피아의 산악 통로들을 행군해 들어갔다.
메넬리크 2세는 그 통로들을 지키면 이탈리아 사령관들이 군대를 나누어 진격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그들이 들어오게 놔두었다.
그리고 메넬리크 2세가 직접 이끄는 대규모 군대는 산맥을 넘어 이동했다.
1896년 3월 아드와(또는 아두와) Adwa 마을 인근에게 지리멸렬한 이탈리아 사령관이 부대를 재조직하려고 하자 에티오피아 군대는 분리된 이탈리아군 대열들을 공격해 6,000명을 죽이면서 철저하게 괴멸시켰다.
아드와 전투 Battle of Adwa는 20세기 초 동안에 이탈리아에게는 국가적 수치였고 아프리카의 정치적 급진주의자와 개혁가들에게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메넬리크 2세의 번창하는 에티오피아 제국 Ethiopian Empire은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유럽인의 판단에서 곤혹스럽고 아마도 위험천만한 예외로 생각되었다.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

 
아프리카의 다른 곳에서 분에 넘치는 야심은 한층 더 난처한 충돌, 즉 유럽인이 유럽인 정착민과 싸우게 된 사건을 일으켰다.
보어인 Boer(네델란드어 Dutch 로 '농부')이라고도 부르는 아프리카너 Afrikaner들은 네덜란드 Netherlands와 스위스 Swiss에서 온 정착민이었다.
그들은 180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함께 남아프리카에 도착했고 영국과 장기간에 걸쳐 난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세기에 아프리카너들은 케이프타운에서 내륙으로 이주해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곳에 두 개의 독립 공화국인 트란스발 Transvaal과 오렌지 자유국 Orange Free State을 세웠다.
1880년대 중반에 트란스발에서 금 매장지들이 발견되었다.
세실 로즈는 영국의 다이아몬드 왕이자 제국주의자로서 아프리카너들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광산과 목초지를 자신의 영토인 로디지아 Rhodesia에 추가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실제로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전쟁을 촉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899년 일련의 논쟁을 거쳐 영국은 아프리카너들과 제2차 보어 전쟁 Second Boer Wars에 돌입했다.
근래에 수단에서 거둔 승리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변변치 못하게도 이 전쟁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영국군을 위한 보급품, 통신, 의약품 따위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이 초기의 문제들에 이어 영국군 종대 대형이 지형을 잘 아는 아프리카너 군대에 의해 산산조각 나면서 몇 차례의 수치스런 패배가 이어졌다.
레이디스미스 Ladysmith와 마페킹 Mafeking 마을에 있는 영국의 요새들이 포위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실패에 화가 나고 당황한 영국 정부 특히 식민장관 조지프 체임벌린 Joseph Chamberlain은 어떤 타협도 거부했다.
신임 영국 사령관 로버트 로버츠 Frederick Sleigh Roberts(1832~1914)는 우월한 영국의 자원과 다이아몬드 광산에 이용하기 위해 건설된 철도들을 유리한 쪽으로 이용했다.
영국군은 보어인들을 압도하고 포위된 영국의 요새들을 구해내며 아프리카너의 수도 프레토리아(프리토리아) Pretoria를 장악했다.
런던에서는 축하연이 열렸고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희망이 넘쳐났다.
 
하지만 아프리카너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독일 Germany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은 아프리카너들은 특공대 commando(소규모 기습 특공부대)를 조직해 황야로 나아가 3년 동안 끈질기게 게릴라 guerrilla 전투(유격전)를 치렀다.
특공대와 질병으로 인한 영국의 손실은 영국군 장교들로 하여금 나중에 서양 군대들이 게릴라 전투에 직면해 빈번하게 의존했던 광범위하면서도 잔인무도한 방법들을 대폭 취하게 했다.
전략적 위치들을 지키기 위해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토치카 tochka(특화점特火點)가 설치되어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종종 모국인 영국을 위해 싸우는 아일랜드인 Irish people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인 Australian 기수들로 구성된 특수기병대가 자신들 방식대로 게릴라들과 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 전투에서 양쪽은 나름대로의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양쪽 모두에서 멸시당한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이 전쟁이 소중한 농토를 파괴하자 기근과 질병에 시달렸다.
영국은 또한 강제수용소 concentration camps(이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를 설치했다.
이 강제수용소에서 아프리카너 민간인들은 포위되어 끔찍한 상황에서 살아야 했다.
영국은 그들이 게릴라에게 지원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거의 2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2년이 지나는 동안 질병과 빈약한 위생으로 말미암아 사망했다.
이런 조처는 국제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및 미국의 신문들은 영국을 제국주의 골목대장이라고 힐난했다.
강제수용소는 영국 안에서도 반대를 불러왔다.
영국에서 보수 언론으로부터 '친보어인'이라고 불린 항의자들은 이 충돌에서 토착 아프리카인의 운명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백인 유럽인의 권리 침해에 대항한 운동을 벌였다.
결국 아프리카너들은 순응했다.

아프리카너 정치가들은 정치권력의 한몫을 떼어준 신생 영국령 남아프리카 연방 British Union of South Africa에게 자신들의 옛 공화국을 넘겨주는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영국 정착민과 아프리카너 사이에 불편한 제휴를 창출했다.
양대 파벌의 정치가들은 저렴한 아프리카인의 노동에 의존해 높은 생활수준과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라고 알려진 인종 분리(차별) 체제를 유지했다.
 
 

○미국의 제국주의

 

마침내 제국주의는 에스파냐 España와 미국 USA을 1898년의 미국-에스파냐 전쟁(미국-스페인 전쟁) Spanish-American War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최소한 50년 전으로 소급되었고 국가 건설, 즉 새로운 영토의 정복, 국가 권력의 팽창, 북아메리 인디언의 패배 따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미국은 1840년대 멕시코 Mexico와 싸우기 시작했다.
부채로 약화된 멕시코는 텍사스 Texas와 캘리포니아 California를 포함한 넓지만 인구가 희박하고 멀리 떨어진 영토들에 대한 권한을 점점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땅들은 미국 정부와 토지를 갈망하는 백인 북아메리카인을 유혹했다.
1845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략 7,000명의 멕시코인 Mexicans이 1,000명의 백인 미국인 white American peoples에게 합류했다.
미국 대통령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캘리포니아를 매입하기 위해 노력했고 곧 멕시코를 자극해 전쟁에 끌어들였다.
멕시코의 패배와 1848년의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Treaty of Guadalupe Hidalgo은 미국으로 하여금 남서부 지방을 획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방대한 영토의 획득이기도 했지만 노예제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일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미국과 에스파냐의 충돌은 유사한 유형으로 이어졌다.

에스파냐 제국은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에스파냐는 카리브해 Caribbean Sea와 태평양의 식민지에서 일상적인 반란에 직면했다.

미국의 대중 언론은 반란자들의 대의에 흥미를 갖게 만들었다.

미국은 쿠바 Cuba에 상당한 투자를 해놓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염려했고, 쿠바의 아바나항 Havana Port에서 미국의 전함이 우연히 폭발했을 때 제국의 옹호자들과 다수의 언론은 복수를 소리 높이 외쳤다.

미국의 여론은 이구동성의 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윌리엄 매킨리 William McKinley, Jr.(재임 1897~1901) 대통령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지만, 전쟁의 정치적 필요성도 이해했다.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고 미국과 태평양 해상 무역로의 안전을 보장하며 새로이 건조된 미 해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개입했다.

미국은 1898년 에스파냐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신속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벌어진 미국-에스파냐 전쟁(미국-스페인 전쟁 Spanish-American War)은 모든 세대의 작가, 정치가, 지식인을 자극해 국가적 영혼 탐색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 전쟁은 또한 장기적인 결과들을 초래했다.

에스파냐의 패배는 에스파냐 군주정을 약화시켜 1912년에 몰락하게 했다.

하지만 군주정을 무너뜨린 정치적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긴장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에서 중요한 일화逸話(에피소드 episode)인 1930년대의 에스파냐 내전의 폭력 속에서 표면으로 다시 떠올랐다.

 

미국에서 에스파냐에 대항한 이 '찬란한 작은 전쟁(splendid little war)'은 푸에르토리코 Puerto Rico의 합병, 쿠바에 대한 보호국, 에스파냐의 식민주의 못지않게 미국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필리핀 반군 Philippine rebels에 대한 짧지만 잔인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은 간섭 활동을 계속했다.

1903년 콜롬비아 Colombia의 파나마 Panama 지방이 반란을 일으키자 미국은 재빨리 반군을 지원하고 파나마를 공화국으로 인정하면서 이 신생 정부로부터 빌린 토지에 파나마 운하 Panama Canal를 건설하는 동안 파나마 공화국을 보호했다.

영국의 지원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처럼 파나마 운하(1914년 공식 개통)는 서반구와 동태평양에서 미국의 바다에 대한 지배를 굳건히 해주었다.

하와이 Hawaii와 나중에 생 도밍그 Saint-Domingue에 대한 간섭은 미국 제국주의의 권능을 보여주는 더 많은 증거였다.

 

영국에서처럼 미국에서도 19세기의 마지막 10년은 문명화 사업이나 그러한 활동이 후진적인 나라들에게 문화, 번영, 진보를 가져다준다는 신념에 자극받은 선교 활동이 쇄도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특히 미국 선교협회드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몇몇 경우 미국인들은 자의식적으로 대영제국과 제국주의 정신을 모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미국인들은 식민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것을 피했다.

필리핀 Philippines 합병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의회에서의 매우 근소한 표차로 이어졌다.

영국 작가 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1865~1936)은 빠르게 떠오르는 미국이 제국의 짐을 질 것을 요구했지만 그의 호출은 분열된 반응으로 나타났다.

 

◎22장 결론

 

1875년 서양 국가들과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 사이의 오랜 관계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이 단계에서의 까무러칠 정도로 빠른 공식적인 서양 통제력의 확대와 새로운 유형의 규율과 정착이 눈에 띈다.

그것은 산업적인 서양의 증대되는 경제적 필요성, 영토를 둘러싼 충돌, 19세기 말에 이르러 국가를 제국으로 연결시킨 국가주의(내셔널리즘 nationalsim) 따위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것의 즉각적인 결과들 중 하나로 서양에서 자의식적 제국주의 문화가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명백히 불안을 불러일으켰고 19세기 말 서양을 휩쓴 위기의식에 크게 기여했다.

 

서양의 팽창은 그 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도전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국주의는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통치 전략을 필요로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제국의 자원을 동원하는 일은 승리에 결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의 조건들을 다시 부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이 시대에 확립된 정치 구조, 경제 발전, 인종 관계의 유형 따위는 20세기 동안 내내 장기간에 걸쳐 의문시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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