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15. 5/10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 본문

여행기-국내

2015. 5/10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

새샘 2015. 7. 19. 12:23

봉선사奉先寺는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부평리) 운악산雲岳山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고려 광종 때인 969년 법인국사 탄문坦文(900-975)이 창건하고 운악사雲嶽寺라 칭하였다고 한다. 조선 예종 때인 1469년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능침사찰로 지정하여 중창하면서 봉선사라 개칭하였다.

 

명종 때인 1551년 교종을 대표하는 수首사찰로서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때인 1902년 경기도내 전 사찰을 관장하였다. 1962년 제25교구 본사로 지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여러차례 중수하였고,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9년화엄스님의 범종각을 시작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식민치하에서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림 초대교장이 월초스님(1858-1934)이 봉선사 주지로 봉직하면서 후학양성을 위해 홍법강원을 설립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운허스님(1892-1980)이 광동학교와 동국역경원 설립에 앞장서 인재양성과 역경불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역경불사 시작 이후 37년만인 2002년에는 월운스님이 우리말대장경 총 318권을 완역하여 교종본찰로서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주요 문화재로는 조선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인 봉선사범종(1469, 보물 제397호)과 비로자나삼신괘불도(보물 제1792호) 등이 있다.

 

 

 

입구의 봉선사 화강암 표지석

 

 

 

일주문-1열 4주의 1루3칸으로 높다란 화강암 배흘림 초석 위에 열대우림에서 자란 붉은색 부빙가목으로 기둥을 세웠다. 다포 맞배지붕 외사출목外四出目 형식이며 조선 후기 건축양식이다. 정면 한글현판 '운악산 봉선사'는 운허스님의 유고에서 집자하였다.

 

 

 

일주문 뒷면엔 정수스님의 글씨인 '교종본찰봉선사敎宗本刹奉先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주차장 부근의 대형 연지蓮池에는 연못 안을 걸어다닐 수 있도록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노랑꽃창포

 

 

 

봉선사 전경-봉선사에서 제작한 팜플렛의 사진

 

 

봉선사 불전으로 들어가는 길

 

 

 

봉선사 보호수 느티나무-수령 550년으로 조선 예종때 봉선사를 중창할 때 심은 것으로 보인다.

 

 

 

느티나무 뒷편에 서 있는 하마비下馬碑-세조의 위패를 어실각에 모시고 세운 것으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음각되어 있다.

 

 

 

봉선사 불전 배치도

 

 

 

 

청풍루와 당간지주幢竿支柱-당간지주는 당幢(법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절에 다는 기)을 다는 깃대幢竿인 당간을 떠받치는 돌이며, 당간은 사찰입구임을 알리는 동시에 사찰에 행사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당간지주는 1469년 봉선사 창건때 세워진 것으로 명종 때 승과고시 부활과 더불어 전국 스님들이 모여 승과평僧科坪에서 시험을 치를 때 승과기를 높이 달아 두었다고 한다. 1매 대석으로 깎아내어 양쪽 기둥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기드문 형태라고 한다.

 

 

 

청풍루와 범종루

 

 

 

청풍루淸風樓-한국전쟁 전에 천왕문과 해탈문, 소설루가 있던 자리에 지은 대형 누각. 1층은 종무소 겸 사무실, 2층은 설법전이다. 1층 통로에 사천왕 탱화와 금강역사 탱화가 봉안되어 있어, 천왕문의 기능을 하고 있다. 1층 통로를 지나 큰법당(대웅전) 앞마당으로 진입한다. 

 

 

 

 

청풍루를 지나 돌아보면 안쪽에는 설법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설법전 내부에는 비로자나여래좌상과 후불탱화를 모셨다.

 

 

 

청풍루의 서쪽 벽에는 불천회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1층을 봉선사 사무실(종무실)과 포교실로 사용하고 있다.

 

 

 

범종루梵鐘樓-한국전쟁으로 전소된 이후 1956년 화엄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큰법당 마당 남쪽 어귀에 종각을 세웠던 것을 현재의 자리에 다시 옮겨 지은 것이다. 2011년 문화재청이 현재의 범종루를 재건하였다.

 

 

 

위층에는 새로 조성된 범종을 비롯 운판, 목어, 법고의 사물을 안치하였고 아래층에는 보물 제397호 봉선사범종梵鐘이 있다. 이 범종은 봉선사 창건연도인 예종원년 1469년에 같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 이후의 범종 양식에 따르지 않고 조선시대 독자적인 범종 양식의 선례가 되는 작품으로서 조선 전기의 동종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1층의 봉선사동종-높이 229.4cm, 입지름 156cm 청동범종. 예종이 선왕인 세조의 치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종의 고리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역방향으로 향하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의 용뉴龍鈕를 형성하였으며, 중심 정상부에는 용의 발톱으로 여의보주를 소중히 받든 모습이다. 이 종은 15세기 후반에 왕실의 발원으로 관장官匠에 의하여 제작된 대형범종. 용뉴조각이나 각부 장식의 조형상태가 우수하고 종신의 연곽蓮郭(연꽃 문양을 둘러싼 네모 테두리)과 보살상, 하대문양(종 아래쪽의 문양) 등 부분적으로 한국 종의 문양요소가 반영된 조선전기의 모범적 조형성을 잘 보여준다.

 

 

 

청풍루 1층을 통과하여 큰법당 앞마당 도착

 

 

 

큰법당 앞마당에 서 있는 삼층석탑-1972년에 세운 이 탑은 정중탑庭中塔(마당 한가운데 있는 탑)이라고 부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국보 제99호 갈항사葛項寺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이다. 1975년 운하스님이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가 봉안되었다고 한다.

 

 

 

큰법당 大雄殿-대웅전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큰법당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봉선사가 국내 최초라고 한다.지금의 큰법당 건물은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된 삼창三創된 다포양식의 팔작지붕 전각(初創은 조선 예종 1년 1469년, 再創은 1637년 계민戒敏선사가 重修). 대웅전 편액을 큰법당이라 한 것은 운허耘虛스님(1892-1980)의 뜻에 따라 이름하였다. 운허스님은 교육부가 2015년 2월 '이달의 스승'으로 선정한 바 있다. 속명이 이시열李時說인 운허스님은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유점사를 거쳐 1921년부터 1980년 입적할 때까지 봉선사에서 머물렀다. 불교대중화에 힘쓴 운허스님은 국내 최초로 '불교사전'을 편찬하였고 한글대장경 편찬사업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절 대부분의 건물 기둥에 쓴 세로 글인 주련柱聯도 한글로 하였다.

 

 

 

큰법당 오른쪽(동쪽)의 지장전-원래는 어실각御室閣으로서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로서 1999년 복원하여 지장전이 되었다.

 

 

 

큰법당 왼쪽(서쪽)의 관음전-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노전스님이 머무는 노전채였던 것을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발굴조사를 거쳐 1999년 복원되어 관음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관음전 아래 큰법당 앞마당 왼편(서쪽) 운하당雲霞堂-1963년 능허, 운경 두 스님이 한국전쟁 이전의 운하당 자리에 일부 복원한 것을 2003년 원래의 규모로 재복원한 것이다. '승당'이라 하여 스님들과 신도들이 모여 수행과 집회를 할 수 있는 큰 방과 스님들이 거처하는 작은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봉선사 신도들의 교육장소.

 

 

 

운하당은 'ㄷ'자 건물이며, 남쪽에서 보면 '봉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왼쪽(서쪽) 건물은 판사관무헌.

 

 

 

판사관무헌判事管務軒-운하당 서쪽이고 선열당 위에 있는 당우. 봉선사는 능침사찰로서 세조와 왕비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御室閣으로 인해  봉선사 주지는 봉향판사奉香判事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봉향판사인 봉선사 주지가 머무르는 당우가 곧 판사관무헌. 한국전쟁때 소실된 것을 1998년 팔작지붕의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방적당放跡堂-큰법당 오른쪽에 운하당과 마주 보는 불전이며, 현재 능엄학림 스님들의 교육장소이다. 1973년 만허스님이 정문수행의 시주를 받아 복원하였다. '방적'이란 '발걸음을 자유롭게 놓아준다'라는 뜻으로, 방적당이란 스님들이 어느 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더 나은 수행을 준비하는 곳이란 뜻의 이름이다.

 

 

 

운하당과 마주 보고 있는 길다란 1층 기와 건물은 회랑이다. 회랑은 청풍루 서쪽에 위치한다.

 

 

회랑 서쪽의 선열당. 선열당禪悅堂은 반지하의 후원(식당)을 신축하여 그 위에 지은 당우이다. 처음에는 객실로 신축하였으나 관리문제로 지금은 주로 수좌스님들의 해제철에 머무르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본 회랑. 회랑 왼쪽(서쪽) 끝으로 선열당이 보인다.

 

 

 

관음전 뒤 한 단 높은 곳에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3분의 성인, 즉 산신, 칠성, 독성을 모신 전각이다. 월초화상에 의해 1926년 건립되어 한국전쟁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맞배지붕 전각이다.

보통은 삼성각이란 현판을 달고 불전안에 세 성인을 모시고 있는데 반해, 봉선사 삼성각은 삼성각이란 현판 대신 1개의 불전을 3개의 방으로  나누어 왼쪽부터 각각 산령각山靈閣, 북두각北斗閣, 독성각獨聖閣이란 현판이 붙었다.

 

 

 

삼성각과 같은 높이의 지대 동쪽 끝이며 지장전 뒤에 조사전祖師殿이 있다. 이 불전은 1977년 삼성각과 동일한 규모로 지어서 처음에는 개건당으로 사용하다가, 근래 이 조사전 아래쪽이며 지장전 오른쪽(동쪽)에 개건당을 다시 지음으로써 조사전이 되었다. 봉선사 개산開山과 중건의 공덕주와 함께 계민선사, 월초스님을 비롯한 봉선사 주지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큰법당 동쪽 옆에서 바라본 마당의 괘불대와 정중탑

 

 

 

지장전 오른쪽(동쪽)의 개건당開建堂-봉선사를 창건하여 개산한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한 계민선사와 정문수행鄭文殊行을 모시는 당우堂宇(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개산과 중건의 머릿글자를 따서 개건당이라 이름한 것이다. 공덕주들의 영정과 함께 일반인들의 납골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사전 서쪽에서 바라본 큰법당과 개건당 뒷모습, 그리고 큰법당 앞마당 너머로 보이는 청풍루 

 

 

 

방적당 앞을 지나 범종루 쪽으로 내려오면 중간에 약사불을 모신 대의왕전大醫王殿을 만난다. 사찰에서는 보통 약사전이란 불전 안에 약사불을 모시고 있으나, 봉선사에서는 약사전 대신 정자의 형태로 대의왕전을 짓고 약사불을 모시고 있다.

대의왕전 왼쪽 뒤에 보이는 당우는 차를 마시며 경을 읽는다는 뜻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유래된 다경실茶經室이다. 1978년 원래 애월재愛月齎가 있던 자리에 운허스님의 퇴로지처退老之處로 지은 것으로서, 역대 조실스님들이 거처하는 곳. 춘원 이광수도 이곳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느티나무 보호수 옆에서 본 청풍루-느티나무 왼쪽에 하마비, 그리고 삼각형 천막 앞에 보이는 위아래로 2개의 구멍이 뚫린 직사각형 바위가 당간지주

 

 

 

주차장 쪽으로 가까이에 큰 기와집이 한 채 있다. 식당 즉 공양실인데 현판은 육화당六和堂으로 걸려 있다. 2013년에 준공하였으며 대중의 화합을 상징하는 전각이다. 뒤에 보이는 지붕은 휴월당休月堂이며, 템플스테이 전용관으로 산사에서 머무르며 사찰의 일상을 체험하는 곳이다.

 

 

 

2015. 7. 1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