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16. 10/2 광주 남한산성행궁 본문

여행기-국내

2016. 10/2 광주 남한산성행궁

새샘 2016. 10. 2. 21:00

<남한산성 전체 지도와 산성 내 남한산성행궁 위치>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에 위치하고 있는 남한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는 지리적 여건의 산성이다. 전체 길이는 약 12km, 면적은 212만 ㎡이다.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옛터를 기초로 하여 1624~1626년(인조2년~4년)까지 대대적으로 축성되었으며, 이 기간 중인 1625년 남한산성행궁의 상궐과 하궐이 건립되었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한양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행궁은 20여개로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고 이용되었는데, 능행, 전란, 휴양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이 가운데 남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 강화행궁 등 3곳이 전란을 대비하여 건립한 행궁이다. 인조14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 간 머물렀다.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능행길에 머물러 남한산성행궁을 이용하였다. 특히 정조는 남한산성 사대문 이름 짓기, 과거시험 시행, 승군의 진법 및 매화포 무기 확인, 야간군사훈련 실시 외에도 광주부와 수어청을 병합하여 광주유수부로 승격시킴으로써 남한산성을 서울 외곽 방어을 담당하는 군사요충지로 삼는 등 남한산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었다.


남한산성행궁은 다른 행궁들과는 달리 왕실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인 좌전(현재의 좌전)과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인 사직을 모시는 사직단인 우실(옛지도에 남문 근처에 표시되어 있음)을 두고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서 유사시 임시수도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남한산성행궁 건물배치도 및 탐방로>




남한산성행궁 매표소 앞 너른 잔디밭에서는 남한산성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왼쪽 초가집은 방문자센터, 오른쪽 초가집은 매표, 그 뒤 기와집은 인화이며, 오른쪽 끝에 보이는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가 나온다.




방문자센터 왼쪽엔 왕릉 주변에 세워지는 동물석인 2마리의 석양石羊이 보인다. 석양 왼쪽에 인화관 가는 길이 있다.



방문자센터




매표소와 기념품가게



산성로타리에서 행궁 한남루에 가는 길 입구 오른쪽에 종각이 있다. 종각 안엔 천흥사天興寺 동종銅鐘이 걸려 있다. 천흥사 동종은 높이 170㎝, 아래지름 100㎝로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고려 현종1년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조선 태조4년(921) 태조가 창건한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 천흥사에 있었는데 이 종이 언제 남한산성으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해방 후엔 덕수궁미술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국보 제280호) 종각 안의 이 종은 원형의 문양과 형태로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할 때 종 울림을 좋게 하기 위해 3배 크기로 제작된 것이다.



종각 주변에 핀 가을 들국화 포천구절초




남한산성행궁 한남루 가는 길가의 단풍(앞에 있는 나무는 화살나무, 왼편 뒷쪽 나무는 산수유)-길 끝으로 행궁이 보인다.



화살나무 단풍



부들레야




남한산성 사진전 대상 작품 <하늘에서 본 행궁>




한남루漢南樓-행궁의 정문으로 정조22년(1798)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 행궁 건립할 당시 정전까지의 문은 외삼문과 중문의 2개뿐이었는데 궁궐 제도엔 삼문이라 하여 정전까지 3개의 문이 법도였기 때문에 한남루를 대문으로 세우면서 '삼문삼조'의 법도가 완성되었다. 한남루란 뜻은 '한강 남쪽 성진城鎭(성곽 진지)의 누대'라고 한다. 길 오른쪽 하얀 꽃은 종각 부근에도 피었던 포천구절초.



한남루를 들어가면 연못이 나오고, 그 뒤로 정전의 두번째 문인 외삼문外三門이 있다. 외삼문 오른쪽 건물은 외삼문북행각, 왼쪽은 외삼문남행각이다. 행각行閣이란 대문 좌우로 죽 벌여 있는 행궁 근무자들의 숙소로서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으므로 줄행랑行廊이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행궁관리소와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있는 중문中門. 중문 뒤로 정전인 외행전이 보인다.



외삼문과 중문 사이의 마당에 전시된 한남루 사진-1893년 이전에 찍은 사진으로 원본은 경기도박물관 소장.



외삼문북행각의 전시실(2개의 열린 문이 입구와 출구)과 전시실에 걸린 자료



중문 안으로 들어가 바라본 아랫쪽 대궐인 궐下闕의 외행전外行殿-왼쪽 건물은 하궐남행각, 오른쪽 흰색담장 안 건물은 일장각, 그 뒤로 보이는 흰색담 건물은 좌승당, 외행전 오른쪽 바로 옆에 보이는 작은 문은 내행전으로 들어가는 응청문이며, 사진 맨 오른쪽으로 마당에 서 있는 가건물은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



외행전外行殿에서는 내일(10/3 개천절) 있을 <2016 남한산성 역사토크쇼 '그날'>의 공연준비가 한창이다.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정당正堂이라고도 불렀다. 내행전과 함께 남한산성 축조 기간인 인조4년 1626년에 준공.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상궐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이 내행전보다 약간 좁다. 지금의 외행전 건물은 2010년 중건한 것으로, 앞마당엔 통일신라건물지가 발굴 확인되어 보존하고 있다. 





외행전 오른쪽에 있는 일장각 출입문 앞에서 바라본 외행전



일장각日長閣-하궐 외행전 왼쪽의 관아건물로 광주유수가 사용한 8칸 규모 건물. '日長閣'은 남한산성의 산 청량산의 또 다른 이름인 일장산에서 따온 것이다. 순조29년(1829) 광주유수 이지연이 처음 세웠다. 현재 건물은 2010년 중건.



외행전과 일장각 사이의 위치한 내행전 출입문 응청문凝淸門



외행전 왼쪽에 위치한 방에는 사군자 병풍, 보료와 장침, 머릿문갑, 서안, 화로 등이 있다.



외행전 방 오른쪽에 붙은 대청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외행전과 일장각 사이의 응청문凝淸門은 내행전이 있는 대궐인 상궐上闕로 들어가는 문이다.



응청문을 지나면 또 다른 담장으로 둘러싸인 내행전이 있다. 담장 끝에 붙은 건물은 상궐북행각이며, 맨 오른쪽에 있는 좌승당은 내행전 담장 밖에 위치하고 있다.




가운데 건물이 좌승당, 왼쪽 끝 담장 기와집은 상궐북행각, 두 건물 사이의 문이 후원 출입문 명위문이다. 명위문 뒤로 후원의 이위정이 보인다. 좌승당 오른쪽에 보이는 문은 좌숙문左肅門이며, 이 문을 나가면 행궁 밖 좌전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좌승당坐勝堂-행궁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광주유수 집무용 건물. '坐勝'이란 '앉아서 이긴다'란 의미로 반드시 이길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다. 순조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지었다.




좌승당(오른)과 상궐북행각(왼) 사이의 후원 입구인 명위문. 문 뒤 오른편 정자는 후원 내 이위정이며,문 뒤 왼편 건물은 재덕당.




좌승당 앞 상궐북행각 문을 통해 내행전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재덕당이 서 있다.




상궐 내행전內行殿-임금의 침전으로 규모는 28칸 건물로 외행전과 같지만 면적은 더 넓다. 중앙 3칸은 대청, 양 옆은 온돌방과 마루방이다. 다른 방들은 임금이 머무는 동안 수행원 공간. 내행전은 임금의 안위를 위해 담으로 둘러쌓았으며, 부속시설도 담 밖에 설치하는 등 폐쇄적인 배치구조이다.




내행전 중앙에 위치한 대청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병풍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과 도자기, 탁자, 교의(접는 의자)가 놓여 있다.



내행전 왼쪽 뒷담 언덕위 느티나무



내행전 뒤편 언덕 앞 온돌 굴뚝과 언덕 위 재덕당在德堂-재덕당은 숙종14년(1688) 유수 이세백이 건립하였으며,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2002년 복원한 건물. 사당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용도는 모름. 남쪽에 '반석盤石'이라는 암각문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재덕당 언덕 아래 내행전 뒷뜰에 낀 초록빛 이끼가 오래된 건축물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명위문明威門을 통해 상궐을 빠져나가 후원으로 들어선다.




명위문을 지나면 보이는 후원의 정자 이위정과 오른쪽 담 뒤의 좌전소나무숲



좌전과 뒷산 소나무숲



이위정以威亭-후원에 있는 정자로서 순조17년(1817) 광주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지은 정자. 以威亭이란 글씨는 당시 31세였던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이위정 뒤로 행궁 후원 뒷담이 빙 둘러져 있으며, 뒷담 뒷편으로 좌전이 보인다.




이위정 뒷담에 있는 행궁 뒷문



명위문 서쪽에 위치한 상궐 담장 문을 통해 다시 상궐로 들어간다. 문 왼쪽 건물이 내행전이고, 오른쪽은 상궐남행각.



후원에서 상궐남행각 쪽으로 들어가는 문



상궐남행각 앞에서 뒤돌아 본 후원 출입문과 행궁 후원 뒷담



상궐을 빠져나와 하궐남행각 앞에서 바라본 상궐 출입문



하궐남행각




외행전 앞 중문통일신라건물지-남한산성행궁 하궐 중건공사를 위하여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록에 문무왕12년(672)에 당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고, 주장성은 신라 최대규모의 둘레 8km 석축산성이라 하였는데, 주장성이 바로 남한산성인 것이다. 발굴된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 건물 중 최대규모로서 잘 다듬은 초석과 기단석이 사용되었다. 건물 벽 두께 2m, 1장의 무게가 20kg인 대형기와(조선시대 기와의 무게는 약 4kg)를 사용하였다. 발굴된 숯의 연대 측정 결과 건물 연대가 670~880년으로 주장성과 기록과 일치하였다.



하궐 둔덕 아래 남행각 앞 외행전 마당에서 뒤돌아 본 하궐남행각(왼), 상궐출입문(가운데), 외행전(오른)



중문(왼)과 외삼문(오른) 사이 마당에 전시 중인 남한산성 옛날 사진들



남한루를 통해 행궁을 빠져나와 행궁 왼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를 쌓아두는 장소인 와적지를 찾아가면서 바라본 남한산성행궁




하궐남행각 담장 아래 위치한 통일신라와적지와 쌓아둔 통일신라시대의 기와들



행궁 왼쪽(서)의 수령 350년 느티나무 보호수




행궁 오른쪽(동)으로 난 길을 따라 좌전을 향해 가면서 바라본 행궁 외삼문 



좌전 가는 길 오른편에 서 있는 느티나무 보호수(수령 250년)



느티나무 보호수 오른쪽으로 수어장대 가는 길이 나 있고, 왼쪽엔 2개의 비석이 서 있다.



길 왼쪽이 행궁 동쪽담벼락에 붙은 상궐 좌승당으로 들어가는 문 좌숙문左肅門이고, 길 오른쪽 건물이 좌전이다.




길을 사이에 두고 행궁 후원의 이위정(왼)과 좌전(오른)이 마주보고 있다.



좌전座殿-상궐 북쪽 담장 밖에 위치하며, 유사시 종묘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기 위해 만든 행궁의 종묘에 해당하는 건물. 숙종37년(1711)에 부윤 김치룡이 우실과 함께 건립하였다. 좌전이란 명칭은 봉안처가 행궁 좌측에 위치하므로 좌左를 붙이되 예의 의미를 지닌 묘廟를 감추고 전殿을 붙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서울 종묘와 같이 정전(오른)과 영녕전(왼)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영녕전 출입문과 영녕전



영녕전 문 너머로 바라본 정전



정전


정전 문 너머로 바라본 영녕전



좌전 왼쪽 담 너머로 바라본 영녕전(앞)과 정전(뒤)



좌전 뒷담 너머에서 본 좌전과 행궁 후원 이위정(오른쪽 소나무 사이 정자)



좌전 뒷담너머에서 찍은 사진 입선작 <소나무와 좌전>



좌전 뒷산에 있는 영월과 주변 소나무숲-영월정은 조선시대 정자는 아니며, 1957년 경기지사가 처음 지었으며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영월정에서 침괘정을 거쳐 종각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



침괘정枕戈亭-무기제작소라고 알려져 왔으나 온돌,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총융무고'라고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잘 모른다. 무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이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침괘정 주변 나무들. 첫 번째 사진의 양쪽 나무는 모두 측백나무이고, 두 번째 사진에서 측백나무 사이로 뒤에 보이는 나무는 은행나무.



침괘정 옆 은행나무들




침괘정에서 내려오면 종각을 만난다.



종각에서 매표소 앞 잔디밭을 지나 방문자센터 왼쪽 앞에 서 있는 2개의 석양石羊 옆길을 끼고 올라가면 곧 인화관을 만난다.



인화관人和館-행전 동쪽의 객관으로서 인조2년(1624) 목사 유림이 건립하고 목사 이태연이 '人和'라는 편액을 걸었다. 현재 인화관은 전패를 봉안하는 중앙 정청과, 파견된 관리의 숙소인 동익헌과 서익헌의 3개의 건물과 이루어져 있다.



인화관 왼쪽(서) 담장 밖 산사나무 열매


2016. 10. 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