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2015. 7/12 구리 동구릉 본문

여행기-국내

2015. 7/12 구리 동구릉

새샘 2016. 9. 8. 12:58

동구릉東九陵'동쪽에 있는 아홉 기의 능'이란 뜻으로서,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에 있는 조선의 7명의 왕과 10명의 왕후가 안장된 국내 최대의 왕릉군. 조선 왕조를 건립한 태조가 1408년 승하하자 아들 태종이 이 자리에 건원릉을 조성함으로써 왕릉이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역대 여러 왕과 왕후를 모심으로써 총 9기의 능이 있는 동구릉이 완성된 것이다. 사적 제193호.

 

동구릉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뒤에 있는 검암산을 능을 보호하는 산인 주산主山으로 하고 중턱에 봉분들을 만들었으며, 좌우의 지형이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이루고 묘의 맞은편인 남쪽의 안산案山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9기의 능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능의 수에 따라 동오릉, 동칠릉 등으로 불리다가 1855년 마지막으로 문조 수릉이 조성되면서 동구릉이 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 양식,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조경, 세계에 유례가 없는 산릉제례山陵祭禮(왕릉에서 직접 치르는 제사 의식)의 전통과 풍부한 기록문화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북한의 2기를 제외한 남한의 40기 전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은 조성 방식에 따라 6가지로 분류하며, 이 중 5가지가 동구릉에 있다. 없는 양식은 왕과 비의 능을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조성하는 여주 효종영릉과 같은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동구릉에 있는 5가지 능 형태를 보면 건원릉과 같이 왕이나 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單陵, 한 언덕에 나란히 왕과 비의 봉분을 마련한 원릉과 같은 쌍릉雙陵, 경릉과 같이 한 언덕에 2명의 비의 봉분 3개를 함께 조성한 삼연릉三連陵, 수릉처럼 왕과 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 하나의 정자각 뒤로 두 언덕 줄기에 각각의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현릉과 같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 그것이다.

 

조선왕릉 분포도

 

입구 오른쪽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표지석

 

동구릉 배치도와 탐방로

 

태조고황제(이성계) 시비詩碑

 

<백운봉에 올라-등백운봉登白雲峯>

손 당겨 댕댕이덩굴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인수반라상벽봉引手攀蘿上碧峯)

한 암자가 흰구름 속에 높이 누워 있네         (일암고와백운봉一庵高臥白雲峯)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약장안계위오토若將眼界爲吾土)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리 (초월강남개불용楚越江南豈不溶)

 

동구릉 역사문화관

 

외홍살문-홍살문紅箭門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구조물로서 이곳을 지날 때 몸과 마음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신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홍살문의 한자 표기는 '화살 전箭'자를 쓰므로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동구릉에는 출입구 가장 가까이에 이 외홍살문이 있고 각 능마다 홍살문이 하나씩 서 있다.

 

길 양쪽의 소나무가 마주보면서 아치를 만들었다.

 

재실齋室-왕릉의 제사를 준비하는 집

 

건원릉 가는 길

 

수릉綏陵-문조文祖(1809-1830)와 문조의 비 신정왕후(1808-1890)를 모신 능. 문조는 23대 왕 순조의 아들이며 24대 헌종의 친아버지인 효명세자이다. 문조는 세자가 된 후에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는 12살에 세자빈이 되었고,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오랜 기간 조선정계에 관여하면서 친정 인물을 다수 등용함으로써 19세기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이었다. 철종때인 1855년에 이곳으로 옮겨져 동구릉 중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며, 1890년 신정왕후와 합장되어 현재의 수릉이 되었다.

 

수릉의 홍살문과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2개의 돌길인 신도 神道와 어도御道. 왼쪽의 약간 높은 신도에는 왕들의 신성한 혼이 다니는 길로서 밟으면 안되는 길이고, 제사지낼 때 왕은 오른쪽 돌길인 신도보다 약간 낮은 어도로 다닌다.

 

수릉의 정자각(제사 지내는 건물-위에서 보면 '정丁'자 같이 생긴 누각). 정자각 뒤로 능이 보이며, 오른쪽 건물은 왕과 왕비의 업적을 새긴 비석이 있는 비각.

 

현릉顯陵-5대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과 왕후인 현덕왕후(1418-1441)의 능.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이며 단종의 친아버지. 1421년에 왕세자가 되었고 세종이 승하한 1450년 왕위에 올랐다. 현덕왕후는 1437년 세자빈에 오르고 1441년 단종을 낳다가 돌아가셨다. 1513년 중종이 훼손된 현덕왕후의 무덤을 현 지역으로 모셔 문종 능과 함께 두 개의 언덕에 각각의 능을 만든 동원이강능으로 조성하였다.

 

멋들어진 자태를 뽐내고 있는 건원릉 가는 소나무길

 

동구릉 최초의 왕릉인 건원릉 홍살문과 정자각

 

건원릉健元陵-조선을 건국한 1대 왕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의 능이다.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군주의 무덤답게 동구릉 중에서 유일하게 이수螭首(뿔이 없는 가상의 동물 용 2마리가 얽혀 있는 모습)와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를 갖춘 대형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태조는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에 고향에서 나는 억새를 심으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만 봉분에 억새가 심어져 있다.

 

건원릉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정자각 문을 통해 바라본 건원릉

 

건원릉 수라간

 

휘릉徽陵-16대 왕 인조의 두 번째 비인 장렬왕후(1624-1688)는 15세였던 1638년 왕비가 되었다. 이후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대까지 살았으며, 창경궁에서 사망하여 이곳 휘릉에 안장. 장렬왕후는 1차예송(기해예송) 논쟁의 단초가 된다. 즉 효종이 승하하자 왕실의 큰어른이자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가 어머니뻘이므로 상복을 얼마동안(남인은 3년 또는 서인은 1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당쟁으로 번진 것이 1차예송이었다.

 

원릉 가는 길

 

원릉元陵-21대 왕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와 두 번째 비인 정순왕후(1745-1805)의 능. 영조는 조선 왕 중 가장 긴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20대 왕 경종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자 후궁의 아들이었던 연잉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 정성왕후와 혼인한 후 돌아가실 때 서오릉 홍릉에 안장되었다. 원래 홍릉 정성왕후 옆에 영조 능을 비워두었으나 승하한 후 현재의 동구릉에 안장되었다. 두 번째 비였던 정순왕후는 15살 때 당시 66살이었던 영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을 대신하여 3년간 수렴청정하였다. 원릉 비각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직접 쓴 표석이 남아 있다.

 

 

경릉景陵-24대 왕 헌종(1827-1849, 재위 1834-1849)과 두 왕비 효현왕후(1828-1843)와 효정왕후(1831-1903)를 모신 능이며,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3개의 봉분이 이어진 삼연릉 형식의 능이다. 헌종은 1834년 8살에 왕이 되어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첫 왕비 효현왕후는 10살이었던 1837년 왕비가 되었고 1843년 돌아가셔서 현 경릉의 첫 주인이 되었으며, 6년 후 헌종이 승하하자 쌍릉 형식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두 번째 비인 효정왕후가 돌아가신 1903년에 지금의 삼연릉 형식이 되었다. 경릉에 있는 하나의 석表石은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올리면서 제작한 비이다. 따라서 경릉 비석에는 '대한大韓'과 '황제皇帝'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들은 기존의 경릉 표석을 깎아서 다시 새긴 것이라고 한다.

방문 당시 경릉이 보수 중이라서 들어가 보 못했다.

 

동구릉을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돌아온 재실 앞

 

2016. 9.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