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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윤두서 "나물 캐기"

새샘 2017. 3. 29. 11:12

<현장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처음으로 풍속화를 그린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

 

 

공재는 조선시대 처음으로 시골 아낙네의 생업을 소재로 삼은 선비화가일 것이다.

그의 <나물 캐기>는 따스한 봄날, 들일이 한창인 여인의 뒤태를 포착했다.

한 여인은 양손에 망태기와 칼을 든 채 허리를 굽혀 나물을 캐고, 다른 한 여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두 아낙네 모두 머릿수건을 둘렀고,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돌멩이가 군데군데 흩어지고 잡목과 푸성귀가 듬성듬성 자란 들녘이다.

경사진 비탈 너머 가파른 원산이 보이고 하늘에 새 한 마리가 난다.

 

시골아낙네의 소박한 노동과 주변 인물의 실제 경관을 재현한 파격적인 풍속화가 아닐 수 없다.

이 그림을 감상한 이하곤 李夏坤(1677~1724)은 "남쪽 지방에는 유독 머리에 수건 두르기를 좋아한다"고 호남의 풍속을 지적했는데, 윤두서가 특정 지역의 세세한 습속까지 모두 파악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남존여비와 남녀유별이 극에 달하던 양반 중심사회의 지식인이 어떻게 이러한 소재를 선택했을까?

개념과 이론만을 논하는 풍조에서 벗어나, 실제로 보고 들어 몸소 체득하려 했던 진취적 노력이 '참됨'과 '사실성'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 것이다.

게다가 직업 화가 이상의 손재주와 그림 솜씨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풍속화를 탄생시켰다.

 

※이 글은 송희경 지음, '아름다운 우리 그림 산책 (2013, 태학사)'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로서 해남의 고산고택을 이어가던 윤씨집안의 종손이었다. 그는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성리학은 물론 천문, 지리, 수학, 의학, 병법, 음악, 회화, 서예, 지도地圖, 공장工匠 등 다방면에 걸친 박학을 추구했던 학자였다. 윤두서는 초상화 말그림이 유명하며, 특히 하층민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서민풍속화(나물 캐기, 밭 가는 농부, 짚신 삼는 사람)도 남김으로써, 우리나라의 풍속화를 개척하여 시작한 화가로서 조선회화사에서 그 업적을 평가를 받고 있다.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회화의 3재三齋(공재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넣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불린다.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도 그림을 잘 그려서 이들의 작품이 현존한다.

 

2017. 3. 2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