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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은 이정 "고죽"

새샘 2018. 4. 13. 21:40

<시련을 의지로 극복하고 탄생시킨 일세一世(온세상)의 보물>

 

고죽枯竹, 검은 비단에 금물=금니金泥, 25.5x39.3cm, 간송미술관(사진 출처-출처자료)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몸을 굶주리게 하여 곤궁에 빠뜨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게 한다.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이겨 내어,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함이다.

 

이것은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하늘에서 인재를 낼 때에는 재능과 시련을 동시에 준다고 한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낸 위인이나 대예술가들의 삶을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이 말에 수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을 그린 탄은灘隱 이정(1554~1626)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탄은은 세종대왕의 고손자로 윤택하고 문예를 애호하는 집안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30대부터 묵죽화墨竹畵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순탄한 삶이었다.

하지만 서른아홉 살이 되던 해인 1592년, 하늘이 준비해 둔 시련을 맞는다.

바로 임진왜란 조일朝日전쟁이었다.

이때 탄은은 왜적의 칼에 맞아 팔이 거의 잘려 나가는 고초를 겪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욱 빼어난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먹물 들인 비단금니金泥라는 최상의 재료로 대나무, 매화, 난 20폭을 그리고, 자작시 17수를 곁들어 성첩한 삼청三淸帖≫이 그 증좌이다.

팔을 다친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삼청첩 표지, 간송미술관-청색 비단 바탕에  '삼청첩 매죽란' 이라 쓴 표제가 붙어 있다. 병자호란(조청朝淸전쟁) 때 불탄 이후 몇 차례 복원을 거쳐서 탄은 당시의 상태는 아니다. 웅건하고 장중한  표제의 글씨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썼다고 전해진다.(사진 출처-출처자료)

 

탄은이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옛 친구들을 만나 ≪삼청을 보여 주니, 간이簡易 최립崔(1539~1612)은 감격에 겨워 이렇게 찬탄했다.

 

                전란 겪고 삼 년 만에 이렇게 모이니

                그래도 화첩 한 권 증표로 남겨 두셨구려.

                부러질 뻔한 그대의 팔뚝 조물주가 보호해 준 덕에

                남은 생애 나의 눈동자도 흐리지 않게 되었소.

 

탄은은 최립에게 첩의 서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6)에게 글씨를,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1556~1615)에게 제시를 청하여 첩의 앞뒤에 덧붙인다.

이들은 모두 당대 문예계에서 최고의 평판을 얻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삼청첩≫은 문인묵객들 사이에서 '일세지보一世之寶'로 불리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유근, 이안눌, 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이 앞다투어 글을 보태니 평판은 더욱 높아졌다.

그야말로 '일대교유지사一代交遊之士(서로 사귀면서 왕래하당대의 선비들)'가 동참하여 만들어 낸 일세의 보물이었던 것이다.

 

≪삼청첩≫은 이정이 죽은 뒤 선조의 부마인 영안위 홍주원(1606~1672)에게 넘어갔고, 조청전쟁 때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선조의 또 다른 부마로 홍주원의 동서인 해숭위 윤신지(1582~1657)는 ≪삼청첩≫ 발문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 첩 하나가 잿더미 속에 떨어져 장갑粧甲(보관함)에 불길이 미치고,

         안쪽 면까지 번져 석봉의 서첩을 반쯤 태우고 돌아 나가더니,

         석양의 대나무에 이르러 저절로 불이 꺼져 하나도 상하지 않았다.

         이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이 단련시키고, 귀신이 보호하는

          신물이라 훼손되지 않은 것이나, 아! 경탄할 만한 일이로다.

 

≪삼청첩≫ 곳곳에는 지금도 화마가 스쳐 간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조청전쟁이 끝난 후 홍주원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불에 탄 부분을 복원했고, 이후 ≪삼청첩≫은 풍산 홍 씨 집안에서 7대를 이어 가며 가보로 존해진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 침탈의 와중에 끝내 지켜 내지 못했고, 일진함의 함장이었던 일본인 츠보이 코우소(평정항삼坪井航三)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처럼 조선 망국기 외세 침탈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민족문화 말살의 현장을 목도하고, 국중 제일의 재산을 모두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에 의해 ≪삼청첩≫은 간송의 유지를 받들어 설립된 간송미술관에 수장되어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역량, 영광, 그리고 굴곡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마른 대나무라는 뜻의 <고죽枯竹> ≪삼청첩≫의 그림 중 마지막 장에 그려진 작품이다.

가지가 왼쪽 하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향하는 완전한 대각선 구도를 보이고 있다.

대나무 줄기를 아래에서 위쪽으로 늘씬하게 뽑아내어 상승감을 강조하고 있다.

금니로 그려 효과는 반감되었지만, 마른 붓질로 드러낸 비백飛白(붓을 빠르게 움직여 남게 되는 흰 부분)의 효과는 고죽의 생태와 느낌을 자연스럽게 살려 내고 있다.

 

 

고죽枯竹의 세부, 앙상하고 가는 가지 위에 짧은 댓잎이 성글게 매달려 있다. 겨울을 견디기 위해 무성한 잎을 떨궈 낸 마른 대나무이다. 하지만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지와 굳센 댓잎에는 부드러운 듯 강인한 대나무의 특성과 상징성이 잘 드러나 있다.(사진 출처-출처 자료)

 

한편 댓잎은 '개介'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윗부분의 점획들은 뒤로 넘어가는 댓잎을 정면에서 묘사한 것이다.

붓끝을 아래로 돌려 잠시 멈추었다가 붓을 들어 올려 날렵하게 떼어 내면서 삼각형에 가깝게 처리하여 예리하고 강경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날개처럼 좌우로 뻗친 댓잎은 탄은의 탄탄한 필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 그림이 고죽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기세 넘치는 표현은 다소 생경해 보이기도 한다. 

 

                  만력갑오십이월십이일탄은사우공산만사음촌우

                  萬歷甲午十二月十二日灘隱寫于公山萬舍陰村寓

 

그림에는 이런 관서款署(관款, 관지款識, 관기款記라고도 하며,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작가의 이름과 함께 그린 장소나 제작일시, 누구를 위하여 그렸는가를 기록한 것)가 있어, 이 작품이 탄은이 41세가 되던 1594년 12월에 충청도 공주에서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주는 탄은이 조일전쟁 이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은거하며 지내던 곳이다.

 

그 옆으로는 다섯 방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앞에 있는 '탄은灘隱, 석양정정石陽正霆, 중섭仲燮'은 모두 탄은의 호號(본 이름 대신에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와 봉호封號(생전에 임금이 내린 이름)와 자字(성인이 되었을 때 붙이는 이름)를 새긴 것들이다.

나머지 두 방의 인문은 '의속醫俗'과 '수분운격水分雲隔'이다.

醫俗은 속된 것을 고친다는 의미로, 중국 시인 동파 소식이 지은 '녹균헌綠筠軒'이라는 글에서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

사람이 여위면 오히려 살찌울 수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그 병은 고칠 수 없다'라는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물이 나누고 구름이 막는다'는 의미인 水分雲隔은 당나라 시인 두보가 지은 '취증설도봉醉贈薛道封' 중 한 구절이다.

자연을 벗 삼아 은일하며 지내는 자신의 생활 모습을 집약한 내용이다.

 

<고죽枯竹>현전하는 탄은의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며, 탄은에 의해 정립된 조선묵죽화풍이 성립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이 들어 있는 삼청첩≫에는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일제 침탈로 이어지는 조선의 국난과 이을 극복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이로써 우리 문화재의 수난과 보존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와 미술품이 눈으로 즐기고 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실체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4.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