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겸재 정선 "풍악내산총람" 본문

글과 그림

겸재 정선 "풍악내산총람"

새샘 2018. 8. 8. 17:16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겸재 진경산수의 본질

<겸재 정선, 풍악내산총람, 비단에 채색, 100.8×73.8㎝, 간송미술관>

 

'풍악내산을 총괄해 살펴보다'는 의미의 <풍악내산총람 楓岳內山總覽>겸재의 금강산도를 대표하는 대작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을 대작으로 부르는 이유는 단지 외형적인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화면 구성과 필치, 채색에 이르기까지 겸재 산수화의 총결이라 불러도 될 만큼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 그대로 가을의 내금강金剛 전경을 화폭에 압축해 넣은 그림이다. 아마도 단발령에서 내려다보이는 금강내산의 경관을 기본 조형으로 그린 듯한데, 주역의 대가답게 내금강 전모를 태극의 형성으로 정리해 냈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정점으로 하여 정양사에서 장안사로 이어지는 동선과, 오른쪽의 혈망봉을 거쳐 삼불암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태극 양의兩儀에 대입했다. 그러면서 왼쪽은 미점과 피마준(돌의 주름을 삼의 잎을 펼친 것같이 그리는 기법)을 써 흙산으로 처리했고, 오른쪽은 겸재 특유의 서릿발 모양으로 금강산 백색 암봉을 강조했다. 음이 양을 감싸며 태극 모양으로 돌아 나가는 형상이다.

 

전체적인 구도와 화면 구성도 빼어나지만 금강산 각 봉우리와 암자들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낸 세부 묘사도 치밀하다. 예로부터 산수화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원망취세遠望取勢 근간취질近看取質'해야 한다고 하였다. '멀리 보아 세를 취하고 가까이 살펴 내용을 취한다'는 뜻이다. 겸재는 화면 구성을 통해 금강산 명승들의 세세한 자태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그래서 금강산의 기세와 내용이 이 한 그림에서 온전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최근 현장에서 실측한 바에 따르면 금강내산이 이렇게 보이는 곳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겸재는 보이는 대로 그저 화폭에 옮겨 낸 것이 아니라 금강내산 일만이천 봉을 자신의 회화 창작 원리에 맞춰 재구성한 것이다.겸재의 후배 문인이었던 정지순鄭持淳(1723~1795)은 겸재의 그림에 대해 "실재 경치를 그리되 눈에 의지해 그리지 않고,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달아 그렸다"고 했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본질을 꿰뚫는 적절한 평가이다.

 

이것이 바로 겸재 진경산수화의 요체이다. 실재實보다 더 실재같은 그림, 그것은 단지 실물을 사진으로 찍어 낸 듯 옮겨 온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느낌과 정취까지 그려 낼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것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우리 머릿속에 입력된 형상들은 대체로 그것을 본 당시의 분위기나 느낌과 어우러지면서 변형되고 단순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겸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겸재는 산수가 지닌 구체적 형상과 그것을 봤을 때의 느낌과 정취를 교묘하게 결합시켰다. 겸재의 그림이 실재보다 더 강력한 실재감을 주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관찰과 사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그림처럼 전체와 세부를 모두 담아낼 수 있고 형상과 정취를 조화시킬 수 있다.

 

<풍악내산총람>공을 굉장히 많이 들인 그림이다. 그림의 규모도 크거니와 단풍에 물든 가을 금강산의 형상과 정취를 한층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 진채를 구사하여 장엄하고 화사한 가을 금강산의 자태를 오롯하게 담아냈다. 게다가 금강산 명승고적의 이름을 일일이 써놓기까지 했다. 예로부터 진경산수화는 지도처럼 보이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겸재는 이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림 속의 지명을 표기한 것이다. 어째서일까?

 

<풍악내산총람 부분-무성한 솔숲을 경계로 삼엄한 암봉과 부드러운 흙산이 대비를 이룬 가운데 금강산 곳곳에 자리한 명승과 암자들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겸재는 이렇듯 절묘한 화면 구성을 통해 금강산의 기세를 담았고, 정교한 세부 묘사를 통해 금강산의 속살까지 생생하게 전해 주었다.>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그리면서 그림 속에 지명을 명시한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대체로 초기작에 국한된다. 노년작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러모로 볼 때 60대 중후반경 작품으로 보여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또한 노년작으로는 보기 드물게 섬세하고 단정한 필치나 고급 비단에 고가의 석채 안료를 써서 그린 것도 예사롭지 않다. 필시 겸재와 각별한 사이였던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단단히 마음먹고 그린 그림이다. 그림으로나마 금강산의 절경을 보고 싶어 했던 지인에게 '와유지락臥遊之樂', 즉 '누워서 유람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겸재의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다섯 번 봉래산을 밟고 나니 다리가 피곤하여

                    쇠약한 몸은 금강산의 신령과 이별하려 하네.

                    화가의 삼매에 신령이 녹아들어 있으니

                    무명 버선 푸른 신 다시 신어 무엇 하겠나.

 

겸재의 금강산 그림이면 노구를 이끌고 굳이 금강산을 다시 찾을 필요가 없겠다는 칭찬이다. 또한 정선의 동문 후배인 동포東圃 김시민金時敏(1681~1747)은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보고, "꿈속에서 금강산 생각 30년, 와유로 오늘에서 흡족함을 얻어 냈다"고 찬탄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까지도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만 보았으면"이라고 할 정도로 천하의 명산이다. 금강산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그림을 그려 놓고 예배하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하니, 옛 사람들에게 금강산은 풍류의 공간이자 경배의 대상이었다. 이 <풍악내산총람> 역시 비록 그림이지만 풍류와 경배의 대상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선鄭敾(1676~1759)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 겸재謙齋.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하고 성행시켰다는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를 정선파라고 부른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8.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