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겸재 정선 "단발령망금강" 본문
30년간 그리고 또 그린 금강산의 아름다움
진경산수화는 '진짜 경치眞景'를 사생하여 '참된 경지眞境'로 승화시킨 그림이다.
그래서 실재하는 경치를 그렸다고 해서 모두 진경산수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경의 사생은 진경산수화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다.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인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즐겨 그렸던 실경은 한양과 금강산이다.
한양과 그 주변이야 겸재 자신이 태어나 평생을 살았던 곳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금강산은 두어 차례 다녀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겸재는 한양에 버금갈 만큼 금강산을 많이 그렸다.
그만큼 금강산이 주는 감흥이 컸던 탓이다.
겸재가 금강산을 처음 찾은 것은 30세 때였다.
겸재와 동문수학 했던 진경시의 대가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금강산 초입인 금화 현감으로 부임해 간 것이 계기였다.
사천은 부임한 이듬해인 숙조 37년(1711년)에 겸재를 초청했다.
겸재와 그의 그림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좋아했던 사천이기에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이 겸재의 붓끝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금강산과 첫 대면한 정선은 금강산의 조형적 본질과 내재된 정신성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간 갈고닦아 왔던 기량을 모두 쏟아 화폭에 담아냈다.
삼엄한 바위산과 수풀이 울창한 흙산이 어우러진 금강산을, 굳센 선묘 위주의 필법과 먹의 변화를 위주로 하는 묵법을 통해 온전하게 옮겨 냈다.
중국 남방화법과 북방화법의 장점을 성리학의 기본 경전이 주역의 원리에 입각해 음양의 대비와 조화로 풀어낸 과감한 실험이었다.
이 혁신적인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에 들어 있는 13폭의 금강산 그림들이 명백한 증거이다. 겸재의 나이 36세 때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겸재의 명성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당대의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후계後溪 조유수趙裕壽(1663~1741)는 사천에게 겸재가 그린 금강산 화첩을 빌려 보고 "스승 김창흡의 시, 겸재의 그림, 금강산의 절경을 묶으니 시와 그림과 경치가 한데 모여 삼절三絶을 이루었다"고 찬탄했다.
서화 감식에 능했던 문인 서암恕菴 신정하申靖夏(1680~1715)는 "이 화첩 같은 것을 나옹 이정이나 허주 이징 같은 무리가 꿈속엔들 본 적이 있으랴"라고 극찬하고, 그림을 모르는 사천이 이런 훌륭한 화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욕심을 내기까지 했다.
이처럼 당대 제일의 문사들이 이구동성 겸재를 칭송하니, 겸재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한양의 화단을 주도하는 화가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금강산 유람과 사생은 겸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화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묘년풍악도첩'은 초년의 실험작이라 신선하고 건실하지만 숙련도는 다소 떨어진다.
이후 겸재는 각고의 노력과 수없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나라 제일의 대가가 되기에 이르렀고, 72세가 되는 해에 금강산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는 36년 전에 그렸던 금강산 명승들을 같은 위치에서 같은 구도로 다시 그려 낸다.
이 화첩이 바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다.
그래서 이 두 화첩을 비교하면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30여 년 동안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를 명료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이 '단발령에서 금강산을 바라보다'라는 뜻의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 剛>은 '신묘년풍악도첩'과 '해악전신첩' 양쪽에 모두 들어 있는 그림으로, 구도와 화면 구성에서 동일한 조형 원리를 적용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단발령은 금강산 유람 여정의 초입으로,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처음으로 금강산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이 너무 황홀하여 사람마다 머리를 깎고 금강산의 승려가 되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단발령'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겸재도 단발령에서 첫 대면했던 금강산의 황홀한 경치와 감흥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화면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이어지는 사선의 하단에 경물들을 집중 배치하고 나머지는 시원한 여백으로 처리했다.
구름과 안개로 끊어져 보이긴 하지만 금강산과 단발령이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이루며 안정감과 변화감을 동시에 추구했다.
단발령과 금강산을 가르는 운무는 속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경계이자 금강산을 더욱 신비롭고 장엄하게 보이게 하는 주요한 장치이다.
하단에 위치한 단발령은 붓을 누여 찍은 길쭉한 타원형의 미점을 중첩하여 흙산의 울창한 숲을 옮겨 냈다.
이른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이다.
송나라 화가인 미불芾米(1051~1107)과 그 아들 미우인米友仁(1090~1170)이 완성했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남방 산수를 대표하는 기법 중 하나.
반면 금강내산은 서릿발 모양의 선묘를 써서 맑고 투명한 수정 무더기처럼 묘사했다.
운무에 둘러싸인 채 보석처럼 빛나는 금강산, 과연 신선이 머무르고 부처가 상주하는 영험한 산의 느낌이 절로 든다.
30대에는 단순히 자신이 세운 화리畵理에 입각하여 음양 대비와 조화에만 신경 쓰느라 단조로웠던 금강산의 묘사는 훨씬 세밀하고 원숙해졌다.
일률적인 삼각 봉우리로 처리했던 금강산은 주산이 비로봉, 왼쪽 사자암, 금강대 등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오른쪽으로는 혈망봉, 오현봉,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삼엄한 금강산의 열봉列峯들이 압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30대에 금강산을 첫 대면할 때에는 금강산의 절경에 압도되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리라.
반면 산행을 하는 인물들의 묘사는 매우 소략하게 처리했다.
기록화적인 효용성을 염두에 두고 금강산 산행의 현장감까지 담아내려 했던 생각이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듯하다.
금강산 자체의 아름다움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 제일의 노대가다운 여유가 느껴진다.
겸재 진경산수화의 백미이자 겸재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한때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1933년 장형수라는 골동거간이 친일인사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런데 측간에 가려다 군불을 때고 있던 머슴이 아궁이 속에 이 '해악전신첩'을 넣으려는 장면을 목격하고, 빼앗아 송재구에 들고 가 헐값에 산 뒤 간송 전형필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장형수가 그때 마침 측간에 가지 않았다면 이 화첩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다행한 일이지만 동시에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사라져 버린 우리 문화재들이 어찌 한둘이겠는가.
어쩌면 남에게 빼앗긴 것보다 이처럼 제 스스로 내다 버린 것들이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제 나라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살던 망국기의 비애이다.
훗날 누군가 우리 시대를 이야기하며 또 다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 문화의 황금기의 영광과 우리 민족의 암흑기의 비극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이 작품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정선鄭敾(1676~1759)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자는 원백元伯, 호는 난곡蘭谷, 겸재謙齋.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하고 성행시켰다는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를 정선파라고 부른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대표적인 작품.
※이 글은 백인산 지음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8.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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