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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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

새샘 2018. 9. 8. 15:40

<구텐베르크 성경의 일부 - 14574년 구텐베르크가 독일 마인츠에서 간행한 '시편'의 일부. 문자 'B'의 기둥 부분에 개가 새를 쫓는 모습이 보인다. 지극히 정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이 책은 성경에 나오는 찬송가, 기도문, 죽은 이를 위한 추도문, 종교축일에 낭송되는 시 등을 모은 것으로, 인쇄인의 간행기가 들어간 최초의 문헌이다.(사진 출처: http://magazine.notefolio.net/features/1555)>

 

20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역사 전문 케이블방송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서기 1000년부터 2000년까지 1,000년 동안 세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 10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힐러리 클린튼, 헨리 키신저 등 미국 각계의 명사들이 패널리스트로 참여한 이 텔레비전 프로그램 <1000년을 빛낸 세계의 100인>에서 1위로 뽑힌 인물은 놀랍게도 활판인쇄술의 선구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였다.

 

2위는 아이작 뉴턴, 3위는 마르틴 루터, 4위는 찰스 다윈, 5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7위는 카를 마르크스, 8위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9위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0위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서양 사람의 시각에서 선정된 것이기에 한계가 분명하지만, 구텐베르크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제치고 1위로 선정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구텐베르크는 중세 말 혼란기에 돈을 벌어 재정난을 타개할 생각뿐이었던 일개 벤처사업가였다.

인류 문명에 기여할 생각이라곤 전혀 없던 장사꾼에 불과한 구텐베르크가 갈릴레이·마르크스·뉴턴 같은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1,000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선정된 것이다.

그는 출생일도 정확하지 않아 1400년경으로만 알려져 있다. 사망일은 1468년 2월 3일이다.

 

활판인쇄술의 발명은 13, 14세기에 책 만드는 재료가 양피지에서 종이를 바뀐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양피지란 양, 송아지, 산양 등의 가죽을 무두질해서 일정한 크기로 재단한 것이다.

서기전 2세기부터 널리 지중해 세계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파피루스 대신 일반화되어 서양에서는 중세 내내 종이가 등장할 때까지 사본, 악보 등에 쓰였다.

 

중세의 양피지는 대단히 값이 비쌌다.

양이나 송아지 한 마리에서 양피지를 4장밖에 얻을 수 없었으므로, 성경 한 권을 만들려면 200~300마리의 가축을 도살해야 했다.

게다가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1,200쪽짜리 책 한 권 제작에 필경사 두 명이 꼬박 5년을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펄프로 만든 종이 덕분에 책값이 크게 하락했다.

자연히 읽고 쓰기를 배우는 비용이 저렴해졌다.

이렇게 해서 문자해득률이 높아지자 더 저렴한 서적을 요구하는 시장 규모가 커졌다.

이런 수요에 부응해 구텐베르크는 당시 첨단벤처사업이었던 인쇄업에 뛰어들어 1450년경 활판인쇄술을 발명했고 1455년에 성경을 인쇄했다.

 

인쇄술은 사상의 신속하고 정확한 전파에 기여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의 면벌부(면죄부, 대사大赦)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 교회문에 붙였다.

이 글은 때맞추어 발명된 활판인쇄술 덕분에 대량 인쇄되어 불과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면벌부 비판 논리를 널리 퍼뜨려 종교개혁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인쇄물 가운데 면벌부도 있다는 것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독일은 다른 지방 사람과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지역별로 언어의 차이가 심했다.

하지만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 인쇄술을 통해 널리 보급되면서 그 번역어가 독일 전역에 표준어로 정착했고 독일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확산시켰다.

19세기 영국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의상철학>(1836)에서 "활자를 처음 발명하여 책을 베끼는 필생들의 수고를 던 사람은, 용병을 해산하고 왕들과 원로원들을 타도하여, 전혀 새로운 민주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했다.

인쇄술이 역사 변혁의 지렛대로 활용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 부통령(1992~2000)을 지냈던 앨 고어가 2005년 한국을 방문했다.

고어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 2005'에서 한국의 정보기술 IT 발전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기술은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라며 "구텐베르크가 교황 사절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친구로부터 인쇄 기술에 관한 정보를 처음 접했다"고 전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한국의 금속활자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한국이 구텐베르크보다 약 70년 앞서서 고려 시대인 1377년에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을 인쇄한 사실을 바탕에 두고 한 말이다.

언론은 앨 고어의 말을 앞 다투어 기사화했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시민들이 열광한 것은 물론이다.

앨 고어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가 오세영은 <구텐베르크의 조선>(2008)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앨 고어의 말은 허황된 말은 아닐 것이나 그렇다고 학계에서 공인된 역사도 아니.

유추는 가능하지만 기록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백보를 양보해서,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생각해야 할 문젯거리가 남는다.

서양 세계에서 근대를 탄생시킨 '변혁'의 수단으로 기능했던 인쇄술이, 한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는 역사를 바꾸는 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활판인쇄술을 먼저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변혁의 힘으로 활용하지 못했던 이유는 '책'에 대한 동양 사회 특유의 관점 때문이다.

동양 사회의 정치 지배자들이 보기에 책은 일반 대중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경전이나 역사서를 인쇄한 목적도 주로 보관용이었지 열람하거나 널리 유포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연유로 동양의 활판인쇄술은 안타깝게도 역사 변혁의 추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기네스북>과 다르다.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과 <기네스북>에 오른다는 것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기네스북>은 맥주회사 기네스가 세계 최고기록만을 모아 해마다 발행하는 세계 기록집이다.

맥주를 누가 많이 마시는지, 누가 가장 무거운 기관차를 끌 수 있는지, 맨손으로 1분 동안 콘크리트 벽돌을 몇 개나 격파할 수 있는지 따위를 다룬다.

세계 최초, 최고, 최대, 최단 등은 호사가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흥미로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의의 historical significance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누가 '최초'였는지가 아니라, 누가 '역사를 바꾸는 데 더 크게 기여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역사학의 핵심 주제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박상익이 지은 <나의 서양사 편력 1>(2014,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9.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