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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미술의 보물 창고 '간송미술관' 본문

글과 그림

전통 미술의 보물 창고 '간송미술관'

새샘 2018. 10. 17. 10:37

<간송미술관 정문과 건물> (출처-정문: http://fallsfogs.tistory.com/tag/%EA%B0%84%EC%86%A1%EB%AF%B8%EC%88%A0%EA%B4%80; 건물: 위키코어 https://www.google.co.kr/imgres?imgurl=http://static.panoramio.com/photos/original/16726408.jpg&imgrefurl=https://xe.rigvedawiki.net/w/%25EA%25B0%2584%25EC%2586%25A1%25EB%25AF%25B8%25EC%2588%25A0%25EA%25B4%2580&h=1200&w=1800&tbnid=5i1e6ATh9vtL3M&tbnh=183&tbnw=275&usg=AI4_-kTPJirJhScXqQkSRZVWBOCWR1bFTg&vet=1&docid=zcUhycG7ux6XqM#h=1200&imgdii=5i1e6ATh9vtL3M:&tbnh=183&tbnw=275&vet=1&w=1800)

 

올해로 설립 80주년을 맞는 간송미술관간송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 선생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문화재와 유물 5천여 점을 보유한 국내 최고의 사립 박물관이다. 국보 12점과 보물 10점 등(2014년 6월 현재) 그 소장품만으로 한국의 역사와 미술을 서술할 정도로 국내 최고 수준의 가치를 자랑한다. 간송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문화가 갖은 수난을 당하던 참담한 시기에 십만 석이나 되는 막대한 재산을 우리 미술품을 지키는 데 모두 쏟아부은 선각자였다.

 

            <간송 전형필 선생> (출처-https://brunch.co.kr/@mydreamer/29)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우리 역사상 제일 소중한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거래 가격의 열 배를 주고 구입한 일이나, 현재 심사정의 일생 대작인 '촉잔도권'을 5천 원에 사들이고 이를 일본에 보내 6천 원에 수리했던 일이나, 고려청자의 최고봉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일본인 대수장가에게서 2만 원에 사들인 일 등 손에 꼽기 힘들 정도이다.

 

간송 선생의 문화재 수집이 민족문화의 수호 차원이었다는 것은 해방 이후 문화재 수집을 중단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이 더 이상 미술품을 구입하지 않아도 우리 미술품은 우리 땅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송 선생은 빛나는 우리 민족의 정수를 그에 걸맞은 집에 수장하기를 바라며 일제의 민족 수탈이 절정에 달하던 1938년에 우리나라 최초 서양 건축가인 박길룡의 설계로 근대식 건축물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운다.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

 

간송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우리 미술품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은 간송 자제분들과 동료, 후학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이때 연구소에 합류한 스물여섯의 신진 학자가 이후 45년 동안 간송미술관을 지켜온 가헌 최완수 선생이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간송미술관이 설립된 지 5년 후인 1971년 가을, 드디어 보화각에 깊이 비장되어 있던 미술품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이 제1회 겸재전이다. 겸재 정선은 '조선의 화성'이라 일컬어지던 대화가이다. 간송 선생이 수집한 그림 가운데 겸재의 그림은 양과 질 모두에서 으뜸이었고 국내에 있는 겸재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코 제 일급의 수준이었다.

 

제1회 겸재전을 시작으로 이후 해마다 5월과 10월, 각각 2주간, 매번 주제를 달리해 개최되는 간송미술관 정기전은 42년 동안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2013년 10월, 제85회 전시까지 마쳤다. 매 전시는 가헌 최완수 선생이 주도하고 선생이 가르친 제자들이 뒷받침해 역사와 미술품 연구를 거듭해 쌓인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치러졌다. 그 결과 한국 사학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식민사관 탈피를 마침내 실현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간송 선생이 모아놓은 겸재와 현재, 단원과 혜원 등 조선 시대의 뛰어난 미술품 덕분이었다.

 

한 시대 문화는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뿌리가 이념이라면 꽃이 예술이다. 꽃이 풍성하고 생기 있다는 것은 뿌리가 튼튼하고 둥치와 가지 모두 건실하다는 뜻이다. 만약 식민사관에서 말하듯 조선 후기가 당쟁에 골몰해 어지러운 시기였다면 어떻게 겸재와 단원 같은 뛰어난 화가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숙종 대부터 정조 대에 이르는 125년간의 우리 문화 황금기를 최완수 선생은 1996년에 '진경 시대'라 이름 붙였다. 이로써 우리는 오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 문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되었다. 공론을 주도하는 식자층 일부에서 여전히 식민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1990년대 중반 간송미술관에서 탄생한 '진경 시대'란 개념은 간송 선생의 문화재 수집만큼이나 값진 것이었다. 간송 선생이 우리 미술품을 목숨과 같이 아끼며 지켜낸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지나간 간송미술관 전시의 역사는 전시 때마다 한 권으로 출간되어 어느덧 85권에 이른 《간송문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1971년 1회 전시회 때 출간된 도록 판형이 지금껏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어 간송미술관의 오랜 전통과 결을 같이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온갖 화초가 가득한 미술관 마당을 보고 "정원도 국보급이네!"라고 감탄한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거목과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마당은 전시장 안 미술품만큼이나 오래되어 관람객을 먼 옛날로 데려가 준다. 빛의 속도로 질주하는 회색빛 도시의 삶 속에서 휴식이 필요한 이들이 해마다 간송미술관을 찾아 긴 줄을 서는 것은 이렇듯 우리 옛것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자연스러운 흥취를 찾으려는 마음 때문이리라.

 

자고 나면 새 건물과 새 도로가 우리 일상을 끊임없이 낯설게 하는 오늘날 80 년 동안 한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 간송미술관은 전통의 미덕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도 정원 한편에 선 간송 선생 흉상이 미술관을 찾은 수만은 관람객을 흐뭇한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 흉상>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9110)

 

※이 글은 사진을 제외하고는 '탁현규 지음, 그림소담 - 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2014, 디자인하우스)에서 발췌한 것이다.

 

2018. 10.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