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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겸재 정선 "목멱조돈"

새샘 2018. 10. 23. 10:09

목멱산에서 아침 해 돋아 오르다(목멱조돈木覓朝暾)

정선, 목멱조돈, 비단에 채색, 23.0x29.2㎝, 간송미술관(사진 출처-출처자료)

 

목멱산木覓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순우리말로 남산을 마뫼, 말뫼라 하는데 이를 음역해 목멱이 되었다.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에서 바라본 남산 일출 모습이다.

겸재 정선은 65세에 양천현 현령으로 나가 5년 동안 고을 사또를 지내며 한강을 유람하고 곳곳의 명승을 사생해 화첩으로 꾸몄다.

양수리(두물머리)에서 행호(행주산성)까지 이어지는 절경을 담았는데 양천현아 주변에서 바라본 장면이 가장 많다.

양천현아에서 바라볼 때 아침 해가 남산에서 떠올라 노을이 강물을 붉게 물들이고, 그 빛을 받은 어부들이 배를 저어가면 이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산빛, 물빛을 모두 맛볼 수 있어 동해 일출만큼이나 아름다웠을 남산 일출을 겸재는 5년 동안 매일 지켜 봤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따스한 기운에 대지가 깨어나는 이른 봄날 해돋이가 제일 훈훈하고, 산천의 빛깔 또한 연둣빛으로 가장 고왔다.

 

목멱조돈 부분, 우리 그림의 매력 중 하나는 은근함. 하늘에 동그랗게 떠 있는 해보다는 산에 걸려 뜨고 있는 해가 훨씬 더 멋지지 않은가. (사진 출처-출처자료)

 

붉은 태양이 남산 능선에 반쯤 걸려 막 떠 오를 찰나다.

동해 일출이건 남산 일출이건 해가 모두 떠오르면 보는 재미가 없다.

뜨기 직전이어야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된다.

 

태양 주변에 동그랗게 여백을 주고 다시 물들여 남산 주변이 온통 붉은데, 이 붉은빛이 다시 산 아래 강물을 좀 더 옅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좌우의 푸른색 강물은 아주 자연스레 변해서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그 미묘한 차이를 알 수 있다.

겸재가 그린 남산이 늘 그렇듯이 짙은 먹으로 찍어 울창한 솔숲을 표현했고, 남산 아래 작은 산들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어 능선만 검은 먹선으로 구분되고 아래는 흐릿하다.

이 와중에도 솔숲이 한 줄로 이어진 언덕이 있는가 하면 모래언덕이 자연스레 물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많은 산의 능선이 중첩되지만 같은 색이 하나도 없어 질서 있으면서도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높이 자란 버드나무는 수많은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려 강가의 정취를 살린다.

낚싯배 또한 해와 마찬가지로 반쯤 숨어 있어 은근한 멋을 풍긴다.

어부들이 노 저어 물살을 헤치고 있는지 배 아래로 짧은 선들이 거뭇거뭇한데, 이는 일렁이는 물결을 표현한 것이다.

화가의 예리한 안목으로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겸재의 진경산수는 언제나 현장에 있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겸재는 금강산 화첩에서 문암에서 바라본 동해 일출을 빼놓지 않았고, 한강 화첩에서는 남산 일출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겸재 덕분에 250년 전 남산 일출 풍경의 아름다움을 앞으로도 두고두고 마음속에 담을 수 있다.

 

정선의 평생지기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은 '목멱산에서 아침 해 돋아 오르다(목멱조돈 木覓朝暾)'라는 시제로 이런 시를 지어 보냈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서색부강한 曙色浮江漢)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고릉은조삼 觚稜隱釣參)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조조전위좌 朝朝轉危坐)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초일상종남 初日上終南)"

 

※정선鄭敾(1676~1759)은 영조 때의 화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난곡蘭谷. 정선은 84세의 천수를 누리면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창안하고 발전시켜 추상화까지 이룬 조선 회화 사상 제일의 대가이다. 산수뿐만 아니라 인물, 꽃, 풀, 벌레 그림에 두루 정통했다. 율곡학파인 서인의 학통을 계승한 광주 정씨 가문에서 태어난 정선은 당대 명문가인 안동 김씨의 대학자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 특히 주역 연구에 매진했다. 그림 솜씨를 타고난 정선은 조선 성리학과 조선 중화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자긍심에 찬 국토애와 민족애를 진경산수화로 표현했다. 정선은 토산과 암산이 어우러진 천하의 명산 금강산 그림에서 중국의 남방화법인 묵법墨法과 북방화법인 필묘筆描를 한 화폭에 조화롭게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는 주역의 핵심 원리인 음양조화와 대비의 묘리에 통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정선은 우리 산천의 주종을 이루는 화강암 바위와 소나무를 묘사하는 화법을 만들었으며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가장 적합한 화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먹으로 삼라만상의 정신을 청명하게 묘사했고, 과감한 색을 써서 대상의 진면목을 그대로 전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경물에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해 가장 그림답고 아름답게 표현한 데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정선이 사물의 이치에 밝은 선비 화가였기 때문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에는 금강산 외에 관동팔경, 한양과 한강명승, 단양팔경 등 전국의 명승지가 모두 들어 있으며 조선 선비, 정자, 집, 나귀 등이 빠짐없이 등장해 오늘날 우리를 250년 전 조선의 명승으로 안내한다. 영조는 왕자 시절 그림 스승이던 정선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호로 부를 정도로 지극히 배려했으며 당대 일급 문사였던 정선의 스승과 친구들은 정선이 금수강산을 유람하며 우리 산천을 화폭에 담는 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선은 자신의 호처럼 평생 겸소하게 화도畵道에 정진해 평생 쓴 몽당붓이 무덤을 이뤘다고 하니 조선의 화성畵聖, 묵성墨聖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따랐던 일군의 화가를 정선파라고 부른다.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등이 정선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글은 탁현구 지음 '그림소담-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디자인하우스,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10. 2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