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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신사임당 "맨드라미와 쇠똥구리" "가지와 방아깨비"

새샘 2018. 10. 30. 21:32

풀과 작은 미물까지도 서로 어울려산다는 자연 운행의 섭리가 감지되는 초충도

전傳 신사임당, 맨드라미와 쇠똥구리, 종이에 채색, 34×28.3㎝, 국립중앙박물관

 

전傳 신사임당, 가지와 방아깨비, 종이에 채색, 34×28.3㎝, 국립중앙박물관

 

맨드라미 꽃 밑에서 쇠똥구리 3마리가 쇠똥 하나를 힘을 합쳐 굴려 가고 있다.

그림 속의 쇠똥구리라!

산수화 중심의 조선 시대 그림에도 이처럼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처럼 들풀에 벌레가 그려진 그림을 초충도 라 한다.

초충도 하면 으례 신사임당 申師任堂이 떠오를 정도로 그녀의 초충도는 유명하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초충도 8폭 병풍 중 하나이다.

그림은 A4 용지보다 약간 큰 종이에 그려져 있으며, 각 폭은 기본적으로 구성이 비슷하다.

대개 화초 한두 그루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곤충이나 작은 동물이 등장한다.

초충도라고 해서 곤충만 그려진 것은 아니며 생쥐나 개구리도 그렸다.

또 화초 아니라 오이와 가지, 수박 같은 식물도 그려져 있다.

그런데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 이들은 대개 짝을 이룬다.

예를 들어 원추리 아래에는 개구리가 있다.

또 여뀌 밑에는 사마귀, 맨드라미 옆에는 쇠똥구리 그리고 양귀비에는 도마뱀, 수박에는 생쥐라는 식이다.

 

이런 초충도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인간 사회를 풍자하고 비유하는 의미로 그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송시대가 들어서서 특히 창저우(상주常州) 지방에 이런 초충도를 직업적으로 그리는 화가들이 대거 나타나 심지어는 이 지방의 특산품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이 원, 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조선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알고 보면 신사임당 이외에도 초충도를 잘 그린 화가가 많이 있었다.

강희안(1417~1464)은 물론 그의 동생 강희맹(1424~1483)도 초충도를 잘 그렸다.

이암(1507~1566)도 초충도를 그리면 따라올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의 그림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초충도가 명나라에서 조선에 건너올 무렵 이미 어떤 상징적 의미는 사라진 듯하다.

그보다는 자연의 작은 미물을 정교하게 그린 호기심과 또 거기에까지 자연 운행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이른바 유교적 찬탄 일색이다.

 

2013년 신사임당 하면 초충도가 연상되는 등식이 언제 생겨났는지를 밝힌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끌었다.

미술사학자 고연희의 연구에 따르면 신사임당이 초충도의 대가로 올라서게 되는 것은 18세기 들어 조선성리학의 학맥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양상이란 것이다.

신사임당의 생전이나 타계 직후 쓰여진 기록에는 신사임당이 정작 잘 그린 것은 산수화였다는 점이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초충도와 억지로 엮어 보자면 포드 그림을 잘 그렸다는 내용이 있는 정도이다.

 

아들인 이율곡 선생도 어머니에 대해 쓰면서 초충도의 초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어머님께서 생전에 남기신 그림과 글씨는 범상치 않으시다.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화를 그리신 것이 지극히 오묘했다. 또한 포도를 그리셨는데 세상 모두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라고 했다.

이 글만 보면 신사임당은 산수화의 대가로 손꼽히고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연희에 따르면 이런 신사임당에게 초충도의 명수라는 별도의 타이틀이 붙여진 것은 17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이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었다.

우암은 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쓰면서 제아무리 신사임당이지만 "산수화를 이렇게 잘 그릴 리 없다"고 하면 옆으로 제쳐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충도를 가리켜 "이는 돌아가신 이원수 공의 부인 신 씨가 그린 것이다. 그림은 그의 손가락 끝에서 나왔지만 마치 하늘이 낸 듯하여 사람 힘이 느껴지지 않으니 마땅히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의 융화가 모여 진정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과연 율곡 선생을 낳으심에 마땅하도다"라고 했다.

그림 한 조각을 그려도 자연의 이치를 통달한 것처럼 그려 내니 대학자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는 신사임당의 그림 솜씨보다는 율곡 선생을 낳으신 모성을 드높이기 위해 한 말로 보인다.

우암의 이 글 이후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가 싹 달라졌다.

산수화 얘기는 없고 온통 초충도만 거론하게 된 것이다.

 

고연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보충 자료로 18세기 문인 21명이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남긴 글 26편을 조사했다.

단 2편에서만 산수란 말이 언급될 뿐 나머지는 모두 초충만 거론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고연희는 우암 계열 학자들의 이런 평을 거치면서 18세기 이후에 신사임당 하면 초충도라는 등식이 보편화됐다고 주장한다.

현모양처의 표상이며 자녀 교육의 사표임을 강조하기 위해 산수화 대가의 이미지가 초충도의 명수라는 식으로 유교적 각색을 거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처럼 탐정과 같은 추적 조사를 통해 감추어진 실상을 복원하는 것을 보면 미술사가 흥미롭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인지 신사임당 작으로 전하는 그림은 초충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참고로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사임당 병풍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1978년에 기증한 것이다.

 

신사임당 師任堂(1504~1551)은 조선 초기의 여류 화가이다. 강릉 북평촌에서 신명화의 둘째로 태어났다.

1522년 사헌부 감찰까지 오른 이원수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 대학자로 성장한 셋째 율곡 栗穀 이이 李珥(1536~1584) 외에 첫째 딸 매창과 넷째 아들로 막내인 이우가 그림을 잘 그린 것으로 전한다. 신사임당의 그림에는 초충도 이외에 11점 정도의 산수화가 전한다. 여기에는 율곡 선생의 종가에 전하는 8폭 산수화와 금강산도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산수도 2폭이 포함된다. 이외에 쏘가리를 그린 것과 원앙을 그린 그림도 있다.

 

※이 글은 윤철규 지음,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컬처북스, 2015)'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8. 10. 30 새샘